-
-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평점 :
Man’s Worldly Goods—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
잡동사니
역사적 사실과 경제적 이론을 잘 버무려 ‘중세 봉건제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자본주의’가 어떻게 커나갔는지 보여주는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B급 좌파’ 김규항씨가 그의 글 어딘가에서 추천한 어렵지 않게 쓴 책이라 읽기 쉬우면서도 그 통찰력이 깊은 책이다.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책의 내용은 명확하지만—리오 휴버먼의 입장에서—그 명확함에 대한 내 불명확한 지식과 불안함이 잡동사니처럼 뒤엉켜 결국 어려운 책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우리가 대답할 수 있어야
책의 내용을 글로 읊는 일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니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읽고 현재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이가를 읊어본다.―그것이 결국 책의 내용을 읊는 것일지라도.
첫 번째,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계급’을 없애려면 먼저 그것을 적절히 보호하고 있는 장막을 걷어치우고 그 실체부터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현실성 없는 장막과 성공이라는 것이 ‘잉여 가치 착취’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현실에서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다. ‘시장’을 통해 형성된 계급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것에 대한 모든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은 현재 자본 소유의 정도와 그 자본 활용 능력으로 구분 가능하고 실제 그렇게 운영되는 ‘계급사회’다.
두 번째로 우리는 대량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 자본가에 '반'하는 입장에서 자본가들이 단순히 그들의 더 많은 이윤을 위해—노동자를 이용해—발전시킨 '수단들' 예컨대 더 많은 상품을 빨리 생산하고 더 많고 좋은 곡물을 재배하고 이것들을 빠르게 운반할 수 있는 수단들이 과연 그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로운 것인지에 대해 부정 또는 긍정의 확실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그 입장이 부정이든 긍정이든 간에 그렇게 입장을 가짐으로써 현실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와의 혹은 우리끼리의 건설적인 토론―대안이 생기는―이 시작된다. 그것은 곧 자기 사상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자유무역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유무역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무역을 통한 상생의 이념이 아닌 자본의 입장에서 ‘시장의 팽창’에 따른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고 더 많은 이윤의 추구다. 그것은 곧 시장의 독점에 대한 자본의 욕구가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필요를 넘어선 것은 필요로 하는 곳에 수출하고 필요한 것은 수입하는 자유무역이 그것을 관리하는 ‘정부의 특혜와 규제에 의해 쇠퇴 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에 일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자유로운 무역에 보태진—정부의 이권에 따른—어떤 특혜나 규제가 독점으로 나타나고 독점으로 인해 대중은 빈곤해지고 자본은 더욱 팽창한다.
한·미 FTA를 추진한 정부나 자유주의자들은 한·미 FTA를 통한 몇 가지 이득 중에 하나로 일자리가 늘어나 실업률을 줄이고 경제를 활성화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일자리는 먹고 살기 위해 시장의 팽창에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일자리다. 영국에서는 가장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나 그 팽창하는 산업을 자유무역으로 해소하려 했지만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보호무역을 실시했고 러시아는 1877년, 독일은 1879, 프랑스는 1881년에 각각 보호 관세가 시행됐다고 한다.(298p) 그런 미국이 왜 지금 관세장벽을 철폐하려 할까. 뻔하다. 경쟁이 안 되는 상대와 붙어 승리하기 위함이다. 경쟁에서 이겨 더 팽창하기 위해서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에 등장하는 가오나시를 보는 것 같다.
국가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개혁, 혁명, 전쟁의 주체와 그 이후의 주체에 대한 물음 등 많은 물음이 존재하지만 이상의 것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건설적인 대화 속 ‘대안’ 찾기는 이미 저 멀리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와서?
진중권씨와 누리꾼을 대표(?)한다는 몇 명의 누리꾼이 맞장 뜨는 토론을 본 기억이 난다. 한 누리꾼은 ‘몇 백 몇 천년 전의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고 곧바로 진중권씨는 ‘그럼 여러분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왜 배웁니까’라고 응수했다. 지금은 2007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936년에 리오 휴버먼이 쓴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시대적 의심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