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의 현학

나 자신이 사랑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알게된 것은 남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내가 사랑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언급하는 것들은 대부분 빈약하다.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처럼 현학적으로―그러나 매우 풍부한 감성과 경험을 바탕으로―혹은 즉흥적으로 ‘사랑은 이것이지’라고 대답할까. 내가 대답하기 껄끄러운 사랑에 대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란 주제로 한 권의 책을 낸 작가가 있으니 읽어볼 수 밖에. 읽으며 부분마다 멍하니 추억에 잠길 수 밖에.


사랑에 대한 물음



“책을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궁금하게 됐지만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여자의 입장에서 본 클로이의 입장과 생각이 궁금했어. 어때?”

“여자­남자의 생각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주인공 ‘나’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사랑에 대한 여자­남자의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자들이 생각하는 ‘클로이’의 입장과 생각이 궁금해 질문했는데 그 여자아이가 일정정도의 확신을 갖고 한 말이다. “과연…”이라 생각하며 난 고개를 갸우뚱 했고 진지한 분위기와 활기찬 분위기가 번갈았다.



잊기와 술잔


모두 동의 하듯이 ‘사랑’에 대한 저마다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듣자마자 잊어버릴 수 있는―사람과 술잔이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제정신으로 자신의 온갖 감성과 행동이 담긴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야기가 추억이야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추억이 어떻게 다르냐. 사랑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기보다 현재를 중심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땐 사랑이었지’ 그래서 사랑은 제정신으로 다른 이에게 털어놓기 껄끄럽다.


모두 사랑을 했고 하고 있으며 하려고 한다. 서로의 ‘사랑’에 대해 들으며 어느 정도의 감정 동요와 공감으로 입에서 쓴 소리가 나왔다. 술잔을 앞에 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이의 ‘사랑’에 대해 듣고 있는 것만큼 그에 대해 알기 쉬운 길도 없는 것 같다. 그 사랑에 온갖 감정과 행동이 응축되어 있으니 말이다.



사랑이 떠나고 나면


물음과 의심이 남는다. “사랑했던 사람은 날 사랑했을까” “난 사랑을 한 걸까” “내가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얼마의 시간 동안 아파해야 할까” “……”


사랑은 온갖 피해의식과 감정적 동요, 추억을 남기고 떠난다. 저자가 말하는 ‘낭만적 테러리스트’의 역설적인 행동처럼 또 사랑에 빠지겠지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헬리아 2008-01-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언제가 되야 '사랑'일수도 있는 것을 알게될까요....

legows 2008-02-01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 수는 있는 걸까요? ;;;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an’s Worldly Goods—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



잡동사니


역사적 사실과 경제적 이론을 잘 버무려 ‘중세 봉건제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자본주의’가 어떻게 커나갔는지 보여주는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B급 좌파’ 김규항씨가 그의 글 어딘가에서 추천한 어렵지 않게 쓴 책이라 읽기 쉬우면서도 그 통찰력이 깊은 책이다.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책의 내용은 명확하지만—리오 휴버먼의 입장에서—그 명확함에 대한 내 불명확한 지식과 불안함이 잡동사니처럼 뒤엉켜 결국 어려운 책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우리가 대답할 수 있어야


책의 내용을 글로 읊는 일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니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읽고 현재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이가를 읊어본다.―그것이 결국 책의 내용을 읊는 것일지라도.


첫 번째,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계급’을 없애려면 먼저 그것을 적절히 보호하고 있는 장막을 걷어치우고 그 실체부터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현실성 없는 장막과 성공이라는 것이 ‘잉여 가치 착취’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현실에서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다. ‘시장’을 통해 형성된 계급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것에 대한 모든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은 현재 자본 소유의 정도와 그 자본 활용 능력으로 구분 가능하고 실제 그렇게 운영되는 ‘계급사회’다.


두 번째로 우리는 대량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 자본가에 '반'하는 입장에서 자본가들이 단순히 그들의 더 많은 이윤을 위해—노동자를 이용해—발전시킨 '수단들' 예컨대 더 많은 상품을 빨리 생산하고 더 많고 좋은 곡물을 재배하고 이것들을 빠르게 운반할 수 있는 수단들이 과연 그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로운 것인지에 대해 부정 또는 긍정의 확실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그 입장이 부정이든 긍정이든 간에 그렇게 입장을 가짐으로써 현실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와의 혹은 우리끼리의 건설적인 토론―대안이 생기는―이 시작된다. 그것은 곧 자기 사상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자유무역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유무역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무역을 통한 상생의 이념이 아닌 자본의 입장에서 ‘시장의 팽창’에 따른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고 더 많은 이윤의 추구다. 그것은 곧 시장의 독점에 대한 자본의 욕구가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필요를 넘어선 것은 필요로 하는 곳에 수출하고 필요한 것은 수입하는 자유무역이 그것을 관리하는 ‘정부의 특혜와 규제에 의해 쇠퇴 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에 일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자유로운 무역에 보태진—정부의 이권에 따른—어떤 특혜나 규제가 독점으로 나타나고 독점으로 인해 대중은 빈곤해지고 자본은 더욱 팽창한다.

한·미 FTA를 추진한 정부나 자유주의자들은 한·미 FTA를 통한 몇 가지 이득 중에 하나로 일자리가 늘어나 실업률을 줄이고 경제를 활성화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일자리는 먹고 살기 위해 시장의 팽창에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일자리다. 영국에서는 가장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나 그 팽창하는 산업을 자유무역으로 해소하려 했지만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보호무역을 실시했고 러시아는 1877년, 독일은 1879, 프랑스는 1881년에 각각 보호 관세가 시행됐다고 한다.(298p) 그런 미국이 왜 지금 관세장벽을 철폐하려 할까. 뻔하다. 경쟁이 안 되는 상대와 붙어 승리하기 위함이다. 경쟁에서 이겨 더 팽창하기 위해서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에 등장하는 가오나시를 보는 것 같다.


국가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개혁, 혁명, 전쟁의 주체와 그 이후의 주체에 대한 물음 등 많은 물음이 존재하지만 이상의 것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건설적인 대화 속 ‘대안’ 찾기는 이미 저 멀리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와서?


진중권씨와 누리꾼을 대표(?)한다는 몇 명의 누리꾼이 맞장 뜨는 토론을 본 기억이 난다. 한 누리꾼은 ‘몇 백 몇 천년 전의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고 곧바로 진중권씨는 ‘그럼 여러분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왜 배웁니까’라고 응수했다. 지금은 2007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936년에 리오 휴버먼이 쓴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시대적 의심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무얼 스마일즈의 인격론
사뮤엘 스마일즈 지음, 정준희 옮김, 공병호 해제 / 21세기북스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잔소리

'좋은' 말이 가득 담긴 책입니다. 좋은 말이지만 '좋은' 말도 한 두 번이지 옆에서 계속 조잘조잘대면 짜증나게 마련이지요. 길가다 만난 아무 연관없는 할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하는 것 같았습니다. 1871년에 출간된 책에 이제와서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해 논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는 알라딘 서평을 보고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인격론>은 총 12장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12장의 내용에서 핵심만 취합해 보면 모두 같은 말인데 단어만 다르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지요. 왜 12장씩이나 방대한(?) 양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각 장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보라'고 하는데 그럴바에야 500p의 책을 만들지말고 핵심만 간추러 더 얇은 책을 만드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요. 가격도 저렴해지고 휴대도 간편할 게 아닙니까. 그 많은 이름과 공감도 하지 못할 상황. 꼭 알지도 못하는-이름도 못들어 본-이들의 말이나 행동, 대화를 많이 담아내 설득하려고 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각 장마다 주제(?)에 맞추어 '수많은' 예시를 '풍부하게' 늘어놓는데, 정말 늘어놓습니다. 간간히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잔소리를 해댑니다. 은유와 비유를 통해 재미를 주며 자연스레 읽어나갈 수 있는 상상력과 문장력이 부족합니다.


개인-국가

책에 대한 내 '잔소리'도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하겠지요. '처세 서적'이라는 단어는 단어에 대한 그리고 쓸데 없이 비싸고 쓸데 없는 생각만 전해주는 처세 서적에 대한 얼마간의 피해의식 때문에 불편하게 들립니다. <인격론>은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처세 서적'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을 돌아보고 '인간답게 살아라'고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자꾸 끌어와 다른 사람의 시선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인격적인 사람으로 말입니다. '처세의 고전'이라고 해야할까요. 

처세 서적처럼 개인의 이데올로기가 '풍부하게' 담긴 책도 없습니다. 저자가 권하는 삶에 묻어납니다. 그래서 '사실' 자체를 망각하거나 숨기려는 경우가 있는데 <인격론>의 경우 의도적이라기 보다 저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사실의 부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면을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경우입니다. <인격론>의 내용에 '황우석'의 인격을 빗대어 개인의 인격이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있다고 말하는 서평을 보았습니다. 황우석의 경우 황우석의 인격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그를 따르는 대중의 '선전'과 '맹종'이 사회 문제, 대중의 문제가 된 것인데 국가의 문제랍니다. 당황스러웠지요. 이런 사상은 <인격론>에 자주 등장합니다. 개인-국가에 대한 저자의 사상말입니다. 개인의 능력의 국가의 능력, 개인의 잘못은 국가의 오점. 개인과 국가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겠지요. 제 생각을 '가라타니 고진'의 도움을 빌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해줌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 결과 국가는 수탈의 기관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농민이 영주의 보호에 대한 답례로 연공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면적으로 국가는 초계급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표상된다..." (철학 삶을 말하다. 146p)

그렇기 때문에 한국같은 천민 자본주의 사회에선 국가와의 교환 가치가 떨어지는 이들은 철저히 소외되게 마련입니다. 이런 한국의 상황에 <인격론>의 내용처럼 진지해보이지만 한가한 이야기와 저자의 개인-국가 사상은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인격론>을 해제한 공병호씨는 비슷한 류의 책을 계속해서 출간합니다. 인기도 많다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책이라는 매체의 신뢰성과 이상성을 매우 잘 이용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도 인격자가 될테야." "<인격론>을 읽어보세요."


그 밖에

좋은 말, 가끔 생각나게 하는 말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영웅적인 삶은 없고 노동자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실제 예시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 철학적, 사회과학적 분석이나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 '신뢰할 수 없는' 사실들의 열거로 인한 지루함. 촘촘하지 못하고 너덜너덜한 책의 구조가 거슬리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부 전선 이상 없다 Mr. Know 세계문학 31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속 대화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간의 대화에는 작가의 사상이 드러난다. 모든 소설이 마찬가지지만 <서부 전선 이상 없다> 같은 반전 사상이 명확한 소설은 거리낌없이 그 사상이 드러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시선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군인에 대해, 군대 안의 권력 횡포와 허례허식, 사회의 교육과 군대, 전쟁에서의 생존, 전쟁을 겪은 이들의 희망없이 부숴진 미래, 끊없이 느끼는 죄 없는 죄책감, 전쟁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대화가 그것이다.


이데올로기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번역자 홍성광씨는 "반전문학이긴 하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나 거창한 정치적 주장이 들어있지 않다"고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의 체계라고 할 때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는 저자 레마르크의 반전 이데올로기가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통해 풍부하게 느껴지고 거리낌이 없다.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일개 병사가 공을 세워 진급하는 등의 영웅담같은 전쟁을 미화한 소설이나 다른 문학, 미술 작품과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의 부정적인면을 고려하면 반전 이데올로기같은 정직한 사실을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은 남긴 하지만 그런 개인적 감정은 배제하면 그만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주인공 파울 보이머가 전쟁과 삶에 대해 끊임 없이 생각하는 것처럼 저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2차 세계 대전을 삶으로 겪어 전쟁이 인간의 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짓밟고 최소한의 인간성 마저 빼앗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보았을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으로 전쟁 중 군대에서 군인의 삶을 더욱 자세하게 그릴 수 있었고 삶을 지탱해주는 기댈 곳이라곤 긴밀하고 가장 가까운 '육체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본능'과 '전우애'라고 말한다.


한국의 청춘들

한국은 아직 징병제다. 20대 팔팔하고 진지한 청춘들은 원하지 않아도 어떤 이유에서든-최소한의 조건에 부합하면-군대에 가야한다. 군대를 다녀온-"군대는 다녀와야지"같은 쓸데없는 의미가 아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장인물간의 대화와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전쟁에 대한 묘사는 참전 경험이 없으니 정확히 알 수 있을리 없고 대부분 상급자-고참-의 권력 횡포나 사회와 군대의 계급과 권력, 교육의 차이와 그것들의 불연속성과 단절에 대한 내용이 공감의 대상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군인이란 끊임없이 감시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14p)와 "비바람이 몰아칠 때……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74p) 같은 내용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난 싫어!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반대하는 모습들을 보면 안타깝다. 대부분 태어난 국가가 자유를 보장해주니 그 자유를 위해 싸워야한다거나 나라가 없는데 무슨 내가 있냐는 식의 군국주의가 판을 친다. 논의를 발전시킨다던가 대화해야할 대상의 것들이 아니지만 그렇게 우둔하게 내버려두면 계속 머리는 한 쪽으로 쏠리게된다.

사회에 영향력있는-돈 있고 빽 있는-인사들과 그 자제들의 병역 비리, 기피엔 "돈 있고 능력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라고 흔히 있는 일처럼 넘어가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무섭고 양심으로 '생명을 해치지 않을 권리로서의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군국주의에 찌든 한국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안타깝고 고통스럽다. 의사나 박사가 사회에 영향력있는 지위와 능력을 차지하고 있으니 대체 복무가 가능하고 아무 능력 없이 양심적, 도덕적으로 거부하는-진심으로-사람들은 감옥살이를 해야하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사나 박사는 '할 일'이 있으니 대체복무가 가능하다고? 그럼 군대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어디에 데려다 쓰려는 건가. 관심 분야나 사회가 배려해 적절한 곳에 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울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 쓸데 없는 구타소동이 생기고 전역하고나면 허례허식을 위해(페인트를 다시 칠하거나 상급자를 위한) '작업'한 기억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항상 이런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논의가 한창 진행되면 갑작스럽다거나 아직은 이르다는 말을 한다. 이건 보수 우익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자주 거론되는 '분배는 아직 이르다'와 별반 차이가 없다. 도대체 그놈의 분배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이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장화하게 다른 곳으로 샜다. 결국 탁상에 앉아 이리저리 이권을 따지는 이들에게는 보상받고 보상하고, '나눠 갖고' 끝맺었지만 그들로 인해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은 고통으로 남아있다. 레마르크는 그걸 말하고 싶어한다.

문,어법이 맞지 않거나 오자가 꽤 있어 읽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상황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책 뒤의 번역자 홍성광씨의 레마르크의 삶과 문학에 대한 글은 좋았는데. 번역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 알약 - 증보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이즈의 실체

매머드가 과학적 영감의 산물이라면 에이즈는 인간적 두려움의 산물이랄까. 에이즈의 실체에 비해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은 굉장히 크다. 나만해도 그렇고 한국의 경우 에이즈 환자가 주변에 흔히 살고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 거부감과 경멸은 더하다. 에이즈 외에도 실체를 모르고 두려워하는 것들이 많지만. 세상은 실체를 정확히 알고 바로 대처할 때 부당한 차별과 차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관계

<푸른알약>은 에이즈에 대한 진심어린 고찰과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페테르스의 심리와 행동, 카티와 그녀의 아들과의 관계, 의사와의 관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카티와의 성관계, 의사-환자 사이의 피해의식과 권위의식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그래. 에이즈의 실체를 문서상으로 알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에이즈 환자였다면. 과연 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속될 수 있을까. 아마 <푸른알약>의 페테르스처럼 뛰어들어 사랑하지 않았을 거다. 세상에 정상적이고 나와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내가 이런 사랑에 고통스러워 해야되는 거냐고 생각했을 거다.

만화 <푸른알약>

금방 끓여 내 온 따끈따끈한 김치찌개나 갖 잡은 싱싱한 회를 얹은 스시처럼 즉흥적이고 신선한 선, 서사적 흐름과 조화로운 장면 전환이 인상적이고 쉽게 눈에 들어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배경이나 사물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아쉬운 점은 제목 선정이다. 푸른 알약이 <푸른알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고 내용 전체를 꿰뚫고 있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