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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ㅣ Mr. Know 세계문학 31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속 대화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간의 대화에는 작가의 사상이 드러난다. 모든 소설이 마찬가지지만 <서부 전선 이상 없다> 같은 반전 사상이 명확한 소설은 거리낌없이 그 사상이 드러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시선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군인에 대해, 군대 안의 권력 횡포와 허례허식, 사회의 교육과 군대, 전쟁에서의 생존, 전쟁을 겪은 이들의 희망없이 부숴진 미래, 끊없이 느끼는 죄 없는 죄책감, 전쟁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대화가 그것이다.
이데올로기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번역자 홍성광씨는 "반전문학이긴 하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나 거창한 정치적 주장이 들어있지 않다"고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의 체계라고 할 때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는 저자 레마르크의 반전 이데올로기가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통해 풍부하게 느껴지고 거리낌이 없다.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일개 병사가 공을 세워 진급하는 등의 영웅담같은 전쟁을 미화한 소설이나 다른 문학, 미술 작품과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의 부정적인면을 고려하면 반전 이데올로기같은 정직한 사실을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은 남긴 하지만 그런 개인적 감정은 배제하면 그만이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주인공 파울 보이머가 전쟁과 삶에 대해 끊임 없이 생각하는 것처럼 저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2차 세계 대전을 삶으로 겪어 전쟁이 인간의 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짓밟고 최소한의 인간성 마저 빼앗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보았을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으로 전쟁 중 군대에서 군인의 삶을 더욱 자세하게 그릴 수 있었고 삶을 지탱해주는 기댈 곳이라곤 긴밀하고 가장 가까운 '육체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본능'과 '전우애'라고 말한다.
한국의 청춘들
한국은 아직 징병제다. 20대 팔팔하고 진지한 청춘들은 원하지 않아도 어떤 이유에서든-최소한의 조건에 부합하면-군대에 가야한다. 군대를 다녀온-"군대는 다녀와야지"같은 쓸데없는 의미가 아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장인물간의 대화와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전쟁에 대한 묘사는 참전 경험이 없으니 정확히 알 수 있을리 없고 대부분 상급자-고참-의 권력 횡포나 사회와 군대의 계급과 권력, 교육의 차이와 그것들의 불연속성과 단절에 대한 내용이 공감의 대상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군인이란 끊임없이 감시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14p)와 "비바람이 몰아칠 때……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74p) 같은 내용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난 싫어!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반대하는 모습들을 보면 안타깝다. 대부분 태어난 국가가 자유를 보장해주니 그 자유를 위해 싸워야한다거나 나라가 없는데 무슨 내가 있냐는 식의 군국주의가 판을 친다. 논의를 발전시킨다던가 대화해야할 대상의 것들이 아니지만 그렇게 우둔하게 내버려두면 계속 머리는 한 쪽으로 쏠리게된다.
사회에 영향력있는-돈 있고 빽 있는-인사들과 그 자제들의 병역 비리, 기피엔 "돈 있고 능력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라고 흔히 있는 일처럼 넘어가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무섭고 양심으로 '생명을 해치지 않을 권리로서의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군국주의에 찌든 한국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안타깝고 고통스럽다. 의사나 박사가 사회에 영향력있는 지위와 능력을 차지하고 있으니 대체 복무가 가능하고 아무 능력 없이 양심적, 도덕적으로 거부하는-진심으로-사람들은 감옥살이를 해야하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사나 박사는 '할 일'이 있으니 대체복무가 가능하다고? 그럼 군대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어디에 데려다 쓰려는 건가. 관심 분야나 사회가 배려해 적절한 곳에 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울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 쓸데 없는 구타소동이 생기고 전역하고나면 허례허식을 위해(페인트를 다시 칠하거나 상급자를 위한) '작업'한 기억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항상 이런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논의가 한창 진행되면 갑작스럽다거나 아직은 이르다는 말을 한다. 이건 보수 우익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자주 거론되는 '분배는 아직 이르다'와 별반 차이가 없다. 도대체 그놈의 분배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이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장화하게 다른 곳으로 샜다. 결국 탁상에 앉아 이리저리 이권을 따지는 이들에게는 보상받고 보상하고, '나눠 갖고' 끝맺었지만 그들로 인해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은 고통으로 남아있다. 레마르크는 그걸 말하고 싶어한다.
문,어법이 맞지 않거나 오자가 꽤 있어 읽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상황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책 뒤의 번역자 홍성광씨의 레마르크의 삶과 문학에 대한 글은 좋았는데. 번역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