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
피터 드러커 지음, 권영설.전미옥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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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에 대한 단상


온오프라인에서 경영‧자기계발로 분류되어 있는 서적들은 무조건 무시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얄팍한 상술로 갈겨쓴 제목과 부제가 역겹고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이들과 성공가도를 달리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심리를 살살 건드려 쓸데없는 잔소리만 명령조로 반복하는 책을 하루 일당 5분의 1가격에 판매하는 게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서적은 자연을 자원으로 인간만이 발전하는 진보적인 생명으로 묘사되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불편하다.


우연한 기회로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을 얻었고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를 읽고 같은 부류의 책에서도 ‘취사선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싶어, 독서 시야를 넓혀보자고 읽게 됐다. 물론 읽은 후의 소감은 불편하지만 긍정적이다. 피터 드러커가 언급하는 기업을 개인인 나로 생각하고 읽으면 내 삶의 계획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원리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피터 드러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다는 입장이다. 비판적 수용이다.


정치, 사회, 경제적 입장과 사상을 배제하고 보려 노력했지만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은 중산층 가정에 백과사전을 판매한 윌리엄 벤튼 만큼이나 어리석고 역겨운 부분이 있다. 중산층에 대해 마음대로 정의내리고 그 ‘심리’를 노려 상품을 판매하는 행위는 실제로 그 심리—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꿈—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이고 일회적인 이기심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중산층 가정에서 공부하는 자녀에게 백과사전을 사준다고 중산층이 상류층이 되는 것도 아닌데다 만약 그 자녀가 출세했다하더라도 그 ‘백과사진’ 덕은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광고의 심한 과장을 소비자들이 알아서 걸러 듣고 봐야한다면 광고 자체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다.


한 온라인 서점 서평들을 살펴보면 모두 피터 드러커에 대한 칭찬 일색에 그의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하는데 과연 피터 드러커의 책을 그런 식으로 읽은 사람들이 후에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두렵다고 하면 이 시대의 무자비한 광고만큼이나 과장된 발상일까. 입장, 사상이 달라도 누구나 먼저 역지사지할 수 있다면 발전적인 대화와 실천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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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생각의 속도 - 디지털 신경망 비즈니스
빌 게이츠 지음, 안진환 옮김, 이규행 감역 / 청림출판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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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이렇다. 점차 가격이 낮아질 PC와 인터넷 기술을 중심으로 보다 빠르고 유연한 소통(커뮤니케이션)의 장을 만들고 그 장에서 신선한 정보들을 빠르게 모은다. 팔딱팔딱 뛰는 정보 또한 ‘빠르게’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간다. 이렇게 퍼진 정보를 ‘빠르게’ 다듬어—불필요한 과정을 생략—사용. 사용 후에도 빠른 피드백으로 빠르게 다듬어 다시 사용한다. 왜 빨라야 하는가는 ‘무한 경쟁’ ‘속도의 시대’라는 여러 광고나 기업 홍보의 표현으로 익숙하다.



탁월한 빌


빌 게이츠(이하 빌)도 책에서 수차례 간접적으로 언급했지만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의 주를 이루는 ‘디지털 신경망 비지니스’에 대한 ‘현실적 상상’은 어느 날 빌의 경험을 토대로 갑자기 생겼다기보다 역사와 현대 기술의 상황과 발전 가능성, 그 자신과 주변 기업인의 경험을 종합한 고찰일 것이다. 빌은 앞으로 정보를 얻고 소유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적인’ 정보를 실제 비지니스에 적용하는 과감하고 통찰력이 뒷받침되는 실천을 할 때 다른 기업—빌은 정부, 학교, 병원을 각기 다른 성질의 ‘기업’으로 보고 있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미디어는 맛사지다’라고 한 ‘마살 맥루한’의 말대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기 때문에 빌의 생각처럼 디지털은 인간이 해야 했던 반복된 업무나 잡무를 처리해주고 인간은 좀 더 중요한 일 이를테면 기업인이 정보를 관리하거나 고객과 면담하는 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일,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디지털 인프라아키텍쳐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프로세스는 디지털 신경망을 통해 정보를 빠르게 모으고 다듬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정보는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는 빌의 생각은 탁월하다.


요원한 예상과 실천


빌이 예상하고 실천하고 있던 디지털 신경망의 구축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것은 활발하고 부족한 것은 아직도 요원하다. 인터넷 상거래, 수평적 인터넷 문화를 통한 거침없는 대화—도덕적 웹 사용을 떠나—와 정보의 공유는 활발하지만 아직도 서류가 없으면 진행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빌이 언급한 기업의 영수증 처리 과정이나 은행 업무가 그렇다.


웹 윤리, 개인 정보 보호


그러나 웹 생활양식과 웹 업무양식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데 너무 연연한 나머지 ‘웹 윤리’와 ‘개인 정보 보호’에는 몇 가지 방안을 내 놓고 있긴 하지만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 속도, 속도 하다 보니 잠시 뒤돌아봤다가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건 알겠지만 웹 윤리와 개인 정보 보호가 뒷받침 되지 않는 이상 디지털 신경망 구축은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신경망은 기업 사원과 고객의 개인 정보를 세세하게 관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신용카드나 인터넷 명의 도용 등의 문제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경망 구축 소프트웨어 개발도 중요하지만 개인 정보 보호는 그것에 앞서 고려해야할 중요한 관점이다.


독자@생각의 속도


각 기업 프로세스 보안상의 문제로 인해 제약이 따랐겠지만 빌이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를 읽는 ‘독자@생각의 속도’를 고려했다면 각종 소프트웨어의 사용 예의 이미지와 주석을 가지고 책의 내용을 쉽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영상 시대에 대해 텍스트로만 말하고 있으니 어렵기 마련이다.


대안의 기능


생각하면 전 세계를 연결하는 디지털 신경망은—정책을 통한 소유의 불평등과 개인 사생활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PC와 인터넷 보급이 확대된다는 가정 하에—전혀 다른 세계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한국의 경우 ‘웹 생활양식’이 고질적인 지역주의와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구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의 ‘기술적 상상력은’ 더욱 요원하고 세밀한 사고가 필요하다. 디지털 신경망 기술이 앞으로의 발전을 주도하다면 그 이후의 기술적 상상도 지금 가능할 것이고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기업이 인간의 신경망을 흉내 내 이익을 얻는다면 인간의 따뜻한 마음까지 흉내 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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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냇물아
최성각 지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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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진실

어느 사랑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슬프지만 진실. 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달려라 냇물아>와 ‘슬프지만 진실’은 이가 딱 맞아 떨어진다.(저자가 말하는 보수적인 자본가와 권력가에겐 엘 고어의 말처럼 ‘불편한 진실’이겠지만)녹색평론사에 대한 관심과 힘차고 유려한 제목 때문에 ‘건강한 내용’이 듬뿍 담겨있겠구나 싶었고 실제로—건강한 내용과 현실의 틈새가 얼마나 넓은지 느끼는 괴로움과 무관하게—그러했다.


인식과 행동의 절차

최성각은 몇몇 환경운동가처럼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다고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인식과 행동의 절차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에 대한 가르침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받치는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쓰레기 분리거나 전기 절약, 물 절약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려해도 양은 냄비처럼 금방 식어버린다. 아무리 자연보호에 대한 관심이 전에 비해 늘어났다 해도 아직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자연과 어울려 사는 올바른 의식’ 아니겠는가. 모순이지만 물론 의식과 행동은 함께한다.

사랑, 평화, 자연, 경제 성장의 한계에 대한 최성각의 생각을 읽으며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의식은 어디쯤에 있을까.


꾸역꾸역, 주먹구구

지금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보면 게을렀던 고등학생 때 내 방이 생각난다. 옷장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이 시체처럼 즐비하고 책상엔 그날그날 쌓아놓은 책들이 산을 이루었다. 그 산이 추워보였는지 옷을 덮어 주었고 하나하나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간혹 청소를 할라치면 중요한 물건만 서랍에 꾸역꾸역 넣어 두었는데 나중엔 그 서랍도 꽉 차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사하는 날에 맞춰 모두 박스에 담았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은 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가끔은 왜 버렸을까 아쉬운 물건들이 많다. 내 방이야 이사를 가면서 말끔해졌지만 지구에 이런 방심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어찌할 수 있을까. 자원의 한계를 어떻게 감당해야할까. 주먹구구식 ‘무신경한 대처’가 아니라 우리가 망쳐놓은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시급히 행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이다.


환경운동연합

성격과 습관대로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아 환경단체들을 검색해보고 ‘환경운동연합’을 찾아 방문했다. 내가 이렇게 무모하다. 막연히 무언가 만나겠지, 배움을 얻을 만한 것이 있겠지 싶었다. 붉게 익은 낙엽과 덜 익은 낙엽이 풍성하게 흩날리는 창경궁을 지나 경복궁 부근에 위치한 환경운동연합을 매연담배 피우는 버스에 앉아 가려니 불필요한 죄의식의 줄에 묶인 기분이었다. 환경운동연합 건물은 2,3층이 큰 창을 통해 시원하게 빛을 받고 있는 건물이었으며 그 창 안엔 초록식물들이 빛을 마시며 자라고 있었다. 실내는 환경관련 서적들로 찬 책장과 큰 고래 조형, 갖가지 물건들로 어지러웠다.

실내 입구에서 업무를 보는 직원에게 처음 방문이고 뭔가 배우고 싶어 막연히 왔다고 말하니 간사를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불쑥 부담스런 마음이 밀려왔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두 회의 준비로 바빠 시간을 내줄 수 없단다. 아쉽지만 실내를 둘러볼 수 있게 허락을 구하고 넓진 않지만 충분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책장에서 녹색평론사에서 출판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되 미래>를 실제로 만나보았는데 오래되어 종이가 바래고 귀퉁이가 삐뚤어졌다. 윤호섭이라는 반가운 이름도 있었다. 환경디자인을 몸으로 실천하고 전시를 열어 다른 이에게 알리는 데에 앞장 서는 분. 자전거로 출근하고 필요한 옷만 입고 주말이면 인사동길에서 친환경소재 페인트로 티셔츠에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분. 그 분의 자전거 도로 계획에 관한 서적을 한 권 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후 3시경이지만 창문과 떨어진 사무실은 다소 어두웠는데 형광등을 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역시나 싶어 믿음이 갔는데 한 팀이 MT 갔단다. “오후 4시쯤 올거에요.” 역시 꿈보다 해몽이다.


평택 대추리

한 해전, 하늘이 맑은 여름날에 인사미술공간의 워크샵을 통해 16비버와 ‘조용히’ 평택 대추리를 방문했던 일이 있다. 우연히 평택역에서 대추리 주민을 만나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당당하게 입구로 대추리에 들어가려 했지만 공권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대추리로 진입하는 입구엔—입구라기 보다는 그냥 길이지만—공권력이 부대 위병소 앞에나 있을 법한 진입 방지대를 지그재그로 세워 놓고 열 맞춰 정렬해 있었다. 전경 중에 짬이 되어 보이는 이가 우리가 탄 버스에 올라타 경례를 하고 외국인—16비버 멤버—에 대한 신원을 묻고 대추리 방문 허가를 상부에 받겠다고 했다. 대추리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한 번 나오면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신원을 확인한다는데 외지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생각하며 이해하려 했지만 공권력의 횡포, 보이지 않는 무신경한 강압과 억압에 치를 떨어야 했다. 결국 방문 불가. 외국인의 눈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이가 아니면 잇몸. 진입로 가장자리 숲에 앉아 대추리 주민 몇 분이 직접 나와 대화를 나누고 대추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어떤 이데올로기나 이득을 얻기 위한 왜곡 없이 전해주어 안타까움에 인상을 찌푸렸고 집으로 돌아가 웅크리고 자야했다. 대추리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자연과 삶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그것 자체로 대안의 하나이고 대안의 씨앗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인간 위주로 해석하는 사고를 넘어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 자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곧 인간과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최성각이 왜 환경운동을 하며 인권, 경제, 정치 등에 대해 부러 글을 썼겠는가. 그럼 다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끝없는 고민이지만 끝없이 고민하기엔 자연의 비명 소리가 너무 크다. 삶에서 자연을 위한 일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사랑하는 것이 지금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이후는 하나하나 배워가며 ‘실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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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벨로의 마녀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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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찾기의 대중성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공통된 질문을 이야기하는데 제 책이 도움을 줍니다.”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를 비롯한 자신의 저서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에 대답한 내용 중 일부다. 과연 그렇다. <포르토벨로의 마녀>한 권만 보더라도 배움, 가르침, 사랑, 행복, 외로움, 움직임, 믿음 같은 일상에 대한 성찰과 질문이 담겨 있다. 셰린 칼릴(아테나)이라는 ‘소설 속 현실’엔 등장하지 않는 인물과 함께 의문을 품고 하나하나 배워간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파울로 코엘료의 대중성이자 매력이다.


타인의 시각

소설의 구조와 그 구조를 뒷받침하는 성찰의 문장이 눈에 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낼 최상의 방법은 타인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실제로 <포르토벨로의 마녀>엔 아테나가 직접 등장하지 않고 아테나의 주변 인물들이 아테나에 대해 털어놓는 구조로 전개된다.


아테나는 무당?

정작 저자가 책을 통해 탐구하고자 했던—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소설이 탐구 소설은 아니라고 밝혔지만—`신의 여성성’의 탐구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고 낯설어 읽기 힘들었다. 굳이 느낀 바가 있다면 아테나와 아야 소피아 같이 춤을 통해 망아경속으로—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엑스타시’—들어가는 무당의 공통점 정도다. 저자 파울로 코엘료가 무당을 알고 있을까? 모르더라도 무당은 얼마든지 다른 언어로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니 상관없지만. 이야기 속 아야 소피아의 모습은 무당과 너무 닮아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다른 저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등장하는 인상 깊은 구절이 <포르토벨로의 마녀>에 다시 등장했다. “정상적인 게 뭐죠?” 정상적인 건 정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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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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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박노자


박노자씨(이하 존칭 생략) 혹은 그의 저서에 대한 언급에 빠지지 않는 전제가 있다. 바로 ‘귀화한 한국인’이라는 것.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유려한 문체와 어려운 어휘를 골라 쓰고 우리 역사에 박학다식하다는 것. 이런 전제 또한 박노자가 느낌표를 연발해서 언급하는 ‘낡은 민족주의 관념’의 일환이다. 국가라는 그들이 만든 경계를 부정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상과 행동의 완성을 위해 한국인이 되었는데 굳이 그것을 다시 상기해 전제로 하는 것은 쓸데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가 한국학을 전공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박식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대안이 없다면


[소녀의 눈동자 1939]의 저자 ‘한 놀란’이 말한 것처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많은 저서들이 서양의 역사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재해석하려고 하는데 비해 박노자의 저서는 항상 한국과 서양의 역사를 골고루 섞어 비교 분석하고 배울 점을 찾는다. 이것이 그의 저서를 찾게 되는 갈증의 해소다. 갈증의 해소에 머무르지 않고 이후의 갈증이 날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끝까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현상 파악에 그치지 않고 적절한―이견은 존재하지만―대안과 그 절차적 실행방법을 내놓으니 그럴 수밖에. [당신들의 대한민국] 거의 모든 장에서 삶의 긍정적 풍요로움을 위해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면의 분석과 인간애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보면 그의 ‘항상 이면을 보고자 하는’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잊어버린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소수 자본가와 그 외에 어용적인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박노자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인간애에서 비롯되는데 인간애가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다시―많은 배움을 안고― 현재 사회로의 대안으로 복귀한다. 인간이 그저 인간답기 위해 인간 이상이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간애는 필연이다. 그래서 박노자의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언급처럼 인간애에 대한 호소가 절실하다.


한반도의 중립화


사회 각층에서 박노자가 그의 저서 [하얀 가면의 제국]에 언급한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북한과 미국이 연대하지 못하고 중국이 미국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주둔지를 재배치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미국의 침략전쟁에 희생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한반도의 중립화가 아니라도 갖가지 대안으로 머지않아 보이는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진보 운동의 폐단


소위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그런 폐단에 대해 박노자는 “사립대학들의 족벌 집단들이나 공립대학의 학벌 집단들이 내주는 직함이 대중적으로 진정한 권위로 인정되는 한, 대중을 대표하는 진보운동마저도 연고주의, 권위주의의 늪을 벗어나기가 힘들 것이다. 서로 똑같은 사람과 사람의 평등한 연대가 아닌, 직함이 높은 자의 직함이 없는 자에 대한 계몽과 지도는, 언어가 수입된 진보 담론으로 메워진다 해도, 그다운 실천이 따를 리가 만무하다.”고 말한다.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행태가 진보에서도 행해진다면 그것이 어떻게 진보겠는가.


끝으로 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 각 장에 제시하는 대안들이 흔히 말하는 ‘너무 이상적이기만 하다’는 것에서 ‘현실’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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