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냇물아
최성각 지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슬프지만 진실

어느 사랑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슬프지만 진실. 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달려라 냇물아>와 ‘슬프지만 진실’은 이가 딱 맞아 떨어진다.(저자가 말하는 보수적인 자본가와 권력가에겐 엘 고어의 말처럼 ‘불편한 진실’이겠지만)녹색평론사에 대한 관심과 힘차고 유려한 제목 때문에 ‘건강한 내용’이 듬뿍 담겨있겠구나 싶었고 실제로—건강한 내용과 현실의 틈새가 얼마나 넓은지 느끼는 괴로움과 무관하게—그러했다.


인식과 행동의 절차

최성각은 몇몇 환경운동가처럼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다고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인식과 행동의 절차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에 대한 가르침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받치는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쓰레기 분리거나 전기 절약, 물 절약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려해도 양은 냄비처럼 금방 식어버린다. 아무리 자연보호에 대한 관심이 전에 비해 늘어났다 해도 아직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자연과 어울려 사는 올바른 의식’ 아니겠는가. 모순이지만 물론 의식과 행동은 함께한다.

사랑, 평화, 자연, 경제 성장의 한계에 대한 최성각의 생각을 읽으며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의식은 어디쯤에 있을까.


꾸역꾸역, 주먹구구

지금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보면 게을렀던 고등학생 때 내 방이 생각난다. 옷장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이 시체처럼 즐비하고 책상엔 그날그날 쌓아놓은 책들이 산을 이루었다. 그 산이 추워보였는지 옷을 덮어 주었고 하나하나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간혹 청소를 할라치면 중요한 물건만 서랍에 꾸역꾸역 넣어 두었는데 나중엔 그 서랍도 꽉 차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사하는 날에 맞춰 모두 박스에 담았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은 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가끔은 왜 버렸을까 아쉬운 물건들이 많다. 내 방이야 이사를 가면서 말끔해졌지만 지구에 이런 방심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어찌할 수 있을까. 자원의 한계를 어떻게 감당해야할까. 주먹구구식 ‘무신경한 대처’가 아니라 우리가 망쳐놓은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시급히 행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이다.


환경운동연합

성격과 습관대로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아 환경단체들을 검색해보고 ‘환경운동연합’을 찾아 방문했다. 내가 이렇게 무모하다. 막연히 무언가 만나겠지, 배움을 얻을 만한 것이 있겠지 싶었다. 붉게 익은 낙엽과 덜 익은 낙엽이 풍성하게 흩날리는 창경궁을 지나 경복궁 부근에 위치한 환경운동연합을 매연담배 피우는 버스에 앉아 가려니 불필요한 죄의식의 줄에 묶인 기분이었다. 환경운동연합 건물은 2,3층이 큰 창을 통해 시원하게 빛을 받고 있는 건물이었으며 그 창 안엔 초록식물들이 빛을 마시며 자라고 있었다. 실내는 환경관련 서적들로 찬 책장과 큰 고래 조형, 갖가지 물건들로 어지러웠다.

실내 입구에서 업무를 보는 직원에게 처음 방문이고 뭔가 배우고 싶어 막연히 왔다고 말하니 간사를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불쑥 부담스런 마음이 밀려왔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두 회의 준비로 바빠 시간을 내줄 수 없단다. 아쉽지만 실내를 둘러볼 수 있게 허락을 구하고 넓진 않지만 충분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책장에서 녹색평론사에서 출판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되 미래>를 실제로 만나보았는데 오래되어 종이가 바래고 귀퉁이가 삐뚤어졌다. 윤호섭이라는 반가운 이름도 있었다. 환경디자인을 몸으로 실천하고 전시를 열어 다른 이에게 알리는 데에 앞장 서는 분. 자전거로 출근하고 필요한 옷만 입고 주말이면 인사동길에서 친환경소재 페인트로 티셔츠에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분. 그 분의 자전거 도로 계획에 관한 서적을 한 권 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후 3시경이지만 창문과 떨어진 사무실은 다소 어두웠는데 형광등을 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역시나 싶어 믿음이 갔는데 한 팀이 MT 갔단다. “오후 4시쯤 올거에요.” 역시 꿈보다 해몽이다.


평택 대추리

한 해전, 하늘이 맑은 여름날에 인사미술공간의 워크샵을 통해 16비버와 ‘조용히’ 평택 대추리를 방문했던 일이 있다. 우연히 평택역에서 대추리 주민을 만나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당당하게 입구로 대추리에 들어가려 했지만 공권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대추리로 진입하는 입구엔—입구라기 보다는 그냥 길이지만—공권력이 부대 위병소 앞에나 있을 법한 진입 방지대를 지그재그로 세워 놓고 열 맞춰 정렬해 있었다. 전경 중에 짬이 되어 보이는 이가 우리가 탄 버스에 올라타 경례를 하고 외국인—16비버 멤버—에 대한 신원을 묻고 대추리 방문 허가를 상부에 받겠다고 했다. 대추리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한 번 나오면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신원을 확인한다는데 외지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생각하며 이해하려 했지만 공권력의 횡포, 보이지 않는 무신경한 강압과 억압에 치를 떨어야 했다. 결국 방문 불가. 외국인의 눈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이가 아니면 잇몸. 진입로 가장자리 숲에 앉아 대추리 주민 몇 분이 직접 나와 대화를 나누고 대추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어떤 이데올로기나 이득을 얻기 위한 왜곡 없이 전해주어 안타까움에 인상을 찌푸렸고 집으로 돌아가 웅크리고 자야했다. 대추리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자연과 삶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그것 자체로 대안의 하나이고 대안의 씨앗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인간 위주로 해석하는 사고를 넘어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 자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곧 인간과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최성각이 왜 환경운동을 하며 인권, 경제, 정치 등에 대해 부러 글을 썼겠는가. 그럼 다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끝없는 고민이지만 끝없이 고민하기엔 자연의 비명 소리가 너무 크다. 삶에서 자연을 위한 일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사랑하는 것이 지금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이후는 하나하나 배워가며 ‘실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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