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그리스 신화 8
사토나카 마치코 지음, 최은석 옮김, 이윤기 감수 / 황금가지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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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화란

신화는 영어로 Myth, 그 어원은 그리스어 Mythos, Mythos란 ‘입에서 나온 소리’ ‘말’이란 뜻에서 나아가 ‘이야기’란 뜻이다. 신화는 본디 ‘말해지는’ 것인데 말은 상당히 바뀌기 쉽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는 그 유래가 천차만별이다. 시대가 흐르며 서서히 변화하거나 이야기가 첨삭되는 과정이 몇 세기에 걸쳐 여기저기서 일어난 것이다. 판소리와 전래동화가 ‘말로 전해졌’기 때문에 그 내용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과 같다.


신화는 그 민족의 성립과 인간관 가치관을 반영한다. <만화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가부장제 남존여비 사상’이다. <만화 그리스 신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이 그리스 여성이 남성의 성적, 사회적인 강요에 거의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는데 실제 그리스는 민주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투표권은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만 가졌고, 혼인한 부부의 경우 남성이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해버리는 것이었다.(6권, 107p) 총 8권인 <만화 그리스 신화>의 각 권 말미에 해설을 맡은 니시무라 요시코는 젠더의 시점으로 읽는 신화를 통해 신화의 성차별을 명확하게 밝히고 신화 속에 도사린 편향적인 시각을 파헤친 후 신화라는 대상을 더 깊고 건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8권, 229p)


유명한 영화 <Troy, 트로이>에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인 스파르타의 미녀 헬레네도 그리스 신화의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샘인데 실제 트로이 전설 이전의 헬레네는 수목 숭배와 깊은 연관을 가진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여신이다.


이렇게 신화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 사회 조직의 도덕적 가치관, 인간관을 농후하게 반영하는 관념의 산물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읽은 이유

서양 미술사와 철학사를 접하면 그리스 신화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미술관에서 그림 하나를 봐도 그리스 신화를 알아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 영화 <Troy, 트로이>도 그리스 신화를 알고 보면 보다 재미있고 트로이가 멸망한 뒤 로마 제국의 건설에 대해 알고 있으면 그 재미는 더한다. 그리스 신화는 현대에 이미 철학과 예술을 이해하는 배경 지식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학문을 이해하는데 수월하기 때문에 읽었고 많은 책 중 만화를 개인적인 입문서로 선택한 까닭은 관심 전공 서적을 읽어가면서 그리스 신화의 그리스 신화 텍스트의 방대한 양을 감당하기 위함이었다. 만화를 택하면 쉽지 않겠냐는 자만도 한 몫 했는데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만화 그리스 신화>의 내용 덕에 그럭저럭 통했다. 이제 그리스 신화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으니 전보다 방대한 텍스트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말하는 것

<만화 그리스 신화>에서 해설 니시무라 요시코는 그리스 신화가 현대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 했고 자신은 젠더의 시점에서 그리스 신화를 파악했다. 난 그리스 신화를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사회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려 한다. 먼저 다른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다른 민족, 집단의 가치관, 미의식, 철학에 따라 전해져 온 이야기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 신화는 말로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갈래가 천차만별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는 일깨움이다.


다른 하나, 사회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한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은 그 권위에 정도에 따라 억압과 계몽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 권위와 계몽이 그리스인들이 신화를 만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데 그리스의 지배 체제는 신화라는 선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사회 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주입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다. 절대적 선을 강요하는 한국 전래 동화처럼 신에 저항하는 말을 하거나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면 돌이킬 수 없는 벌을 받고 신에 순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거나 그들의 은총을 받는다. 신탁을 받는 지배체제는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그것에 저항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려는 의도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위의 두 가지 그리스 신화에 대한 개인적 해석은 그리스 신화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수반된 후 명확하게 정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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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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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입체파(큐비즘) 화가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요소들>이 앞표지에서 금속의 표면에 반사된 빛으로 소설의 전반적인 전달 내용을 전달해주는 <멋진 신세계>는 독일의 파시즘 정당인 나치스가 정권을 잡기 1년 전인 1932에 출간된 책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어떤 면에서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과 전체주의의 밀착에 관한 소설을 썼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살던 시대의 미묘한 흐름을 통해 나치의 인종주의와 전체주의의 전조를 보았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균형을 잃은 시대의 미묘한 흐름


한 편의 공상 과학 영화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짜여진 <멋진 신세계>를 보면서 과학 문명의 상상력이 담긴 여러 가지 영상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그 중 인간이란 종이 스스로 만들고 발전시킨 과학 문명에 의해 존엄성을 잃고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모습은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원더키디가 가장 비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적으로 회의주의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지금 현실 사회는 과학에만 의존해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루어야하고 반찬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한데 과학만 너무 추켜세우고 좋은 옷 입혀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는 데는 문제가 다분하다. 분명 과학 과잉에 대한 부작용을 지적하는 예술은 많았지만 인문학의 과잉으로 생기는 부작용을 꼬집은 예술은 비교적 많지 않았다는 점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찍이 과학의 시대를 겪은, 겪고 있는 서양의 영국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가 이런 소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그의 주변에 갖추어져 있었다고 해야겠다.


갓길 없는 질문

현실 사회와 맞닿는 접점이 수도 없이 많은 <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가 살던 시대와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과연 사람들이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과학적 진보의 편리함을 뒤로하고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렇다면 ‘진보엔 항상 어떤 희생이 따른다’는 저자의 사상에 따라 최소한의 희생만은 감수하며 계속되는 진보를 이룩해야 하는 걸까. 거기에 등장인물 존이 대답한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과연 현대의 누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멋진 신세계>속에서 과학 문명인이 아닌 존만이 ‘공유, 균등, 안정’ 이라는 세계 국가 표어에 대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공유, 균등, 안정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진정성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포드 기원 632년 같은 시대는 누군가에겐 살만한 오히려 지금 보다 더 살고 싶은 시대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정말 살기 싫은 ‘인간의 진정성’이 결여된 불안한 사회일 수 있다. 인간의 진정성이란 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 느끼는 인간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절함’이 아닐까.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애절함이야말로 인간의 진정성이라고 할 때 주입되는 감정 이외의 감정은 갖지 못하는 제조된 인간은 진정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 의식에 굉장히 거슬린다. 노동에 대한 인간의 애절함을 기계가 대신하여 인간이 노동에서 물러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멋진 신세계>는 이렇게 인간의 존재 의식과 진정성을 거스르는 이야기 전개를 통해 과학—생물학의 발전에 치우쳐있지만—의 발전을 통한 인간의 진정성, 애절함의 결여를 보여줌으로써 시대를 돌아볼 수 있는 시선과 기회를 마련한다.


어른아이들의 검열

<멋진 신세계>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접점 중 하나를 꼽자면 어린아이들에 대한 어른아이들의 세상 검열과 인권 탄압이다. 세상 검열이라 말한 이유는 어른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모든 것을 싸잡아 검열하려하기 때문이다. 어른아이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어린아이들에게 해롭다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로막는다. 언젠가 어린아이들도 어른아이가 되어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데도. 현실의 추악함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본질적인 현실의 추악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분명 어른아이들의 이 같은 행동과 생각은 어린아이를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함이 어린아이들에게 긍정적일 수는 없다. 어르고 어르기만 해서 키운 아이는 자연스럽게 단체 속의 개인으로 살아가기 힘들고 남을 존경할 줄 모르듯이 어린아이들에 대한 어른아이들의 제멋대로 검열이 멈출 때 어린아이들이 제 지성에 맞게 그리고 올바른 지성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추악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성이 길러지는 때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또한 어른아이들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편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삶의 한계

<멋진 신세계>에 적용된 올더스 헉슬리의 과학의 진보에 대한 상상은 그가 상상한 미래에 그 보다 조금 더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분명히 둔탁한 데가 있을 것이다. 어휘에서 오는 둔탁함도 둔탁함이지만 현대는 뇌의 기억을 저장하여 신체에 이식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상황에다가 <멋진 신세계>와 그 제작 의미를 같이 하거나 흥미를 위한 개념 없이 제작된 SF 영화를 본다면 시대라는 것, 혹은 삶이라는 것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이겨내는 방법은.



그 밖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역사적 인물의 이름과 일치한다.


인디언은 인도 사람이고 지금 인디언이라고 불림을 당하고 예전엔 그들 삶의 터전에서 내쫓긴 사람들은 미국 원주민이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인디애나존스 같은 잔인한 현재 미국인들이 총칼로 몰아낸 미국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판적 견해와 성찰의 문학에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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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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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글로 그리는 능력

글을 쓰면서 느끼는 답답함은 무지와 함께 글을 그리는 실력이 부족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간 내면의 흉악함이나 비열함에 대한 현실 사물 혹은 현상과의 비유적 표현은 웬만한 철학적 사유를 평소에 갈고 닦지 않으면 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가졌다고 해야겠다. 책을 읽다보면 잠시 몽상에 잠기게 하는 과도한 비유적 표현이 거슬리긴 하지만 분명 사라마구식 비유는 비유적 상상력의 사유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보수의 폐단

우익정당이 발휘하는 극명한 보수성이 비인간적이고 비타협적인 연쇄적 폐단을 부른다. 자신들이 재정한 틀에서 벗어나는 현상이나 개인성은 우익정당 그들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언제 깨질지 모를 그들 정당의 집권에 매달려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불행이 연속된다.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자 하는데 어차피 그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 있다. 그들은 그들의 틀과 보수성을 자신들도 절감하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현 집권 상태와 안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자위하며 계속 빙글빙글 제자리를 맴돈다. 그로 인해 피해 입는 희생양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까지도 포함된다.


혁명의 향기

70퍼센트 이상의 백지투표 이후 재선거에서 83퍼센트의 백지투표라는 개표 결과는 어떤 혁명의 향기를 풍긴다. 흔한 말로 요즘 시대에 어떤 단체나 집단을 통한 운동이라 해도 이런 혁명은 기대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다수가 환상에서 깨어나다니. 이런 환상이 어디 있을까. 좌익, 우익, 중도 정당도 아닌 그 무엇을 바라는 혁명. 아무런 혼잡과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의 백지투표 혁명은 지난 광주민주화운동 혹은 6월 항쟁의 분위기와 어떤 접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비해 모르는 단어와 지명, 생소한 표현이 많아서인지 술술 읽히지 않고 띄엄띄엄 스타카토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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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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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허구적 상상력


소설은 그 허구적 상상력의 한계를 실험함과 동시에 현실을 쥐락펴락한 후 “이럴 수도 있으니 우린 어찌 해야겠는가”란 의문을 남겨놓은 채—물론 몇 가지 추측 가능한 힌트와 함께—홀연히 떠나버린다. 딱딱하고 고전적이지만 ‘마술적 리얼리즘’보다 ‘현실 기반 허구적 상상력’이란 표현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 어울리고 이해하기도 쉽다—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합성어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라고 해야 할까. <눈먼 자들의 도시>는 눈이 멀어버리는 상상의 ‘현상’으로 인한 인간 세상의 변화를 인간 본성이라는 영겁 회귀적이고 지난한 의문으로 그리고 있다. 그 세상은 읽는 동안은 물론이고 다시 읽기 거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가 생각날 정도로 후각을 자극하고 후각을 넘어 오감을 최악의 상황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눈이 멀었다는 중의적 표현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게 되는 상황에 정확한 공통적 특징은 없지만 ‘관계’를 통해 눈이 멀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로부터 아주 사소하게나마 관계한 모든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된다. 왜 저자는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리는 설정으로 소설을 썼을까.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 것처럼 무언가에 미쳐버리면 사람들은 흔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성마저 잃고 마는데 이렇게 눈이 멀어버리면 실제로 눈이 머는 것보다 더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눈이 머는 물리적인 실제는 정신적, 감정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을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바라는 환상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두려움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도 많다. 현실이 괴롭고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에 환상을 보고 싶어 하고 그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것에 열광한다. 그 극단적인 예는 황우석과 심형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현재 이명박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과연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공약과 정책이 자신들을 위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더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대선 후보들의 환상 공약 중에 가장 환상다운 환상이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환상이 아니라 가장 환상다운 환상을 믿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고 올바른 일일까. 바라는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환상에 취할 때 지독한 파시즘은 그 더러운 꽃을 피운다.


조직과 개인, 인간 본성에 대한 강한 의문

몇몇 엉뚱하고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인간 몸의 구조를 비유의 대상으로 타당성을 얻고자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철 지났지만 빌 게이츠의 디지털 신경망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 몸이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자체도 조직을 이루고 살아야한다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조직들은 조직을 이룬 그 인간의 본성에 의해 무너져 온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거라는 암시로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가 눈을 뜨자 의사 아내가 느낀 강렬한 외로움처럼 말이다. 기대하던 순간이 눈앞에 닥치자 공허함과 허탈감을 느끼는 인간. 조직 속에서 자유롭게 개인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조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난 어떤 인물로

내가 눈먼 도시의 시민이었다면, 나도 눈이 멀었다면, 수용소에 격리되었다면 난 어떤 병동에서 어떤 침대를 차지하고 어디에 배설하고 어디에서 그 조악한 음식들을 씹어 삼켰을까. 소설 밖으로 나와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과연 정신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 아닐까. 내가 믿고 살아가는 세상의 이념과 사상은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이 있을까.


-
술이 달큰하게 작용하는 밤에 지하철 안에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나는 눈이 멀었다. 나도 시간이 흐르면 내 앞에 있는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고 덤벼들게 될까.
누워서 생각해본다. 난 눈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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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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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관계


도저히 속독할 엄두가 나지 않는 긴장을 가졌다. 장 도미니크 보비(저자)와 알파벳을 읊조린 클로드 망디빌. 기나긴 눈꺼풀의 인내와 노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빨리 읽을 수 없다. 그 삶의 애처로운 깊이로 인해 모음하나 자음하나 음미하고 싶어진다. 역설적으로 빨리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집중하게 되고 빨리 읽힌다. 잠수복과 나비는 물속에서의 자유로운 인간의 몸짓과 팔랑거리는 나비의 몸놀림. 꽉 죄는 잠수복의 답답함과 가벼운 날개 짓이라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더불어 감성적 소재의 역설적 관계가 깊이를 더한다.


감각의 상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깊은 잠을 자다 깨면 갑자기 한쪽 팔이 없다. 한 쪽 팔에 감각이 없다. 뭐지. 졸리고 따끔거리는 눈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재빨리 몸을 일으켜 한쪽 팔을 살핀다. 그대로 있다. 내 몸이 그 팔을 짓누르고 있어 술 취한 듯 몽롱해진 거다. 팔은 그대로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 몸 샅샅이 예민하게 퍼진 감각 어느 하나라도 마비된다면 비참하고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 중 가장 많이 떠오르는 괴로움은 앞이 보이지 않는 괴로움과 소리가 들리지 않는 괴로움. 캄캄하고 불꽃놀이처럼 잔상들만 아른아른 거리는 세상과 구석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기계음같이 멍한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차라리 죽고 싶다. 생각은 그런 내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치달아가고 죽고 싶은 내게 인륜과 선이라는 이름으로 감각이 마비된 삶의 고통을 오래오래 느끼게 만들 것이라는데 이른다. 나는 가끔 나이 들어 늙으면 할 일도 없고 재미도 없을 테니 빨리 죽겠다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 나름의 재미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감각이 마비된 삶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면 너무 잔인하다.


병간호와 환자를 대하는 태도


병간호를 가족이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비난받는 한국의 사회적 풍토는 잘못됐다.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가족이 그 아픔과 절망의 최대치까지 같이 공감해주려고 노력해야하는 건 말해봐야 당연한 일이지만 환자 곁에 붙어 가족 개개인의 일상까지 단절된다면 가족과 환자 모두에게 또 다른 일상의 고통이 되는 꼴이다.


예상치 못한 병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진 환자든 병을 받아들이고 삶을 체념 혹은 새로운 희망으로 살아가는 환자든 모든 환자를 대하는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게 환자를 괴롭게 한다. 환자의 아픔과 절망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정말적인 표정, 애써 쓴 웃음 지어보이는 어색함, 감정을 숨기려는 무안함은 오히려 환자를 괴롭게 한다. 분명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환자의 감정을 미리 예측하고 그 예측을 통해 나름의 대응을 한 것이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이 환자의 감정을 예측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환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병에 걸린 일반 사람이기 때문에 환자의 감정을 헤아리고 일반 사람과 다르게 대하는 것에서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 연민이 병 이외의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환자의 병에 대해 함부로 언급한다거나 가볍게 보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환자에 연민이나 걱정은 환자에게 보일 필요 없는 개인의 것이다.


내가 벗을 잠수복


얼마 전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서 흥미 검사 후 상담원과 상담을 했는데 그 상담원이 한 말은 충격적이면서 일상적이었다. “선생님(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과 대화하는 게 굉장히 편해요. 여기서 상담하다보면 굉장히 말이 안통하고 이해 못하는 사람을 많이 보거든요. 선생님은 안 그래요. 다른 사람 생각을 듣고 이해하시고 계세요. 대화가 통한다는 거죠. 다만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선생님은자기 자신을 틀 안에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아요. 행동하는 한계나 모든 것에 틀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고 있어서 넓고 다양하게 생각하기가 힘들죠. 다른 이에게는 안 그런데 자신에 한해서만 그런 것 같아요.” 모르지 않았던 부분이다. 내가 만든 틀—내 모든 행동을 비롯해 생각과 상상까지를 가두고 느끼는 것들을 걸러내는 틀—에서 허우적거리다 조금만 벗어나도 회의를 느끼고 자신에게 증오와 연민을 느끼는 게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상담원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럼 50% 이상은 문제를 고쳤다고 볼 수 있어요.” 아마도 문제를 아는 것 안에 있는 대안의 씨앗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물속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체온을 보호해주는 잠수복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갑갑하게 옥죄는 잠수복은 벗는 것이 좋겠다.



미치도록 어쩔 수 없는


20만 번 이상 깜빡거린 왼쪽 눈꺼풀로 만든 원고를 다시 읽고 또 확인했겠지만 클로드 망디빌이 잘못 작성한 부분은 없을까. 사소하지만 소설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실수가 없었을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 작지만 미치도록 어쩔 수 없는 실수는 도대체 어쩔 것인가.


인간은 도대체 어떤 것이든 소중함을 쉽게 망각하는 재주를 갖고 있고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하며 자위하는 삶이 인륜적이고 정당한지 생각하지 못하는 비열함을 가졌다. 삶은 유한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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