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설적 관계


도저히 속독할 엄두가 나지 않는 긴장을 가졌다. 장 도미니크 보비(저자)와 알파벳을 읊조린 클로드 망디빌. 기나긴 눈꺼풀의 인내와 노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빨리 읽을 수 없다. 그 삶의 애처로운 깊이로 인해 모음하나 자음하나 음미하고 싶어진다. 역설적으로 빨리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집중하게 되고 빨리 읽힌다. 잠수복과 나비는 물속에서의 자유로운 인간의 몸짓과 팔랑거리는 나비의 몸놀림. 꽉 죄는 잠수복의 답답함과 가벼운 날개 짓이라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더불어 감성적 소재의 역설적 관계가 깊이를 더한다.


감각의 상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깊은 잠을 자다 깨면 갑자기 한쪽 팔이 없다. 한 쪽 팔에 감각이 없다. 뭐지. 졸리고 따끔거리는 눈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재빨리 몸을 일으켜 한쪽 팔을 살핀다. 그대로 있다. 내 몸이 그 팔을 짓누르고 있어 술 취한 듯 몽롱해진 거다. 팔은 그대로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 몸 샅샅이 예민하게 퍼진 감각 어느 하나라도 마비된다면 비참하고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 중 가장 많이 떠오르는 괴로움은 앞이 보이지 않는 괴로움과 소리가 들리지 않는 괴로움. 캄캄하고 불꽃놀이처럼 잔상들만 아른아른 거리는 세상과 구석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기계음같이 멍한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차라리 죽고 싶다. 생각은 그런 내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치달아가고 죽고 싶은 내게 인륜과 선이라는 이름으로 감각이 마비된 삶의 고통을 오래오래 느끼게 만들 것이라는데 이른다. 나는 가끔 나이 들어 늙으면 할 일도 없고 재미도 없을 테니 빨리 죽겠다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 나름의 재미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감각이 마비된 삶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면 너무 잔인하다.


병간호와 환자를 대하는 태도


병간호를 가족이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비난받는 한국의 사회적 풍토는 잘못됐다.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가족이 그 아픔과 절망의 최대치까지 같이 공감해주려고 노력해야하는 건 말해봐야 당연한 일이지만 환자 곁에 붙어 가족 개개인의 일상까지 단절된다면 가족과 환자 모두에게 또 다른 일상의 고통이 되는 꼴이다.


예상치 못한 병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진 환자든 병을 받아들이고 삶을 체념 혹은 새로운 희망으로 살아가는 환자든 모든 환자를 대하는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게 환자를 괴롭게 한다. 환자의 아픔과 절망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정말적인 표정, 애써 쓴 웃음 지어보이는 어색함, 감정을 숨기려는 무안함은 오히려 환자를 괴롭게 한다. 분명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환자의 감정을 미리 예측하고 그 예측을 통해 나름의 대응을 한 것이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이 환자의 감정을 예측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환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병에 걸린 일반 사람이기 때문에 환자의 감정을 헤아리고 일반 사람과 다르게 대하는 것에서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 연민이 병 이외의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환자의 병에 대해 함부로 언급한다거나 가볍게 보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환자에 연민이나 걱정은 환자에게 보일 필요 없는 개인의 것이다.


내가 벗을 잠수복


얼마 전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서 흥미 검사 후 상담원과 상담을 했는데 그 상담원이 한 말은 충격적이면서 일상적이었다. “선생님(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과 대화하는 게 굉장히 편해요. 여기서 상담하다보면 굉장히 말이 안통하고 이해 못하는 사람을 많이 보거든요. 선생님은 안 그래요. 다른 사람 생각을 듣고 이해하시고 계세요. 대화가 통한다는 거죠. 다만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선생님은자기 자신을 틀 안에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아요. 행동하는 한계나 모든 것에 틀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고 있어서 넓고 다양하게 생각하기가 힘들죠. 다른 이에게는 안 그런데 자신에 한해서만 그런 것 같아요.” 모르지 않았던 부분이다. 내가 만든 틀—내 모든 행동을 비롯해 생각과 상상까지를 가두고 느끼는 것들을 걸러내는 틀—에서 허우적거리다 조금만 벗어나도 회의를 느끼고 자신에게 증오와 연민을 느끼는 게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상담원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럼 50% 이상은 문제를 고쳤다고 볼 수 있어요.” 아마도 문제를 아는 것 안에 있는 대안의 씨앗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물속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체온을 보호해주는 잠수복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갑갑하게 옥죄는 잠수복은 벗는 것이 좋겠다.



미치도록 어쩔 수 없는


20만 번 이상 깜빡거린 왼쪽 눈꺼풀로 만든 원고를 다시 읽고 또 확인했겠지만 클로드 망디빌이 잘못 작성한 부분은 없을까. 사소하지만 소설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실수가 없었을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 작지만 미치도록 어쩔 수 없는 실수는 도대체 어쩔 것인가.


인간은 도대체 어떤 것이든 소중함을 쉽게 망각하는 재주를 갖고 있고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하며 자위하는 삶이 인륜적이고 정당한지 생각하지 못하는 비열함을 가졌다. 삶은 유한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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