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의 허구적 상상력
소설은 그 허구적 상상력의 한계를 실험함과 동시에 현실을 쥐락펴락한 후 “이럴 수도 있으니 우린 어찌 해야겠는가”란 의문을 남겨놓은 채—물론 몇 가지 추측 가능한 힌트와 함께—홀연히 떠나버린다. 딱딱하고 고전적이지만 ‘마술적 리얼리즘’보다 ‘현실 기반 허구적 상상력’이란 표현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 어울리고 이해하기도 쉽다—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합성어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라고 해야 할까. <눈먼 자들의 도시>는 눈이 멀어버리는 상상의 ‘현상’으로 인한 인간 세상의 변화를 인간 본성이라는 영겁 회귀적이고 지난한 의문으로 그리고 있다. 그 세상은 읽는 동안은 물론이고 다시 읽기 거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가 생각날 정도로 후각을 자극하고 후각을 넘어 오감을 최악의 상황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눈이 멀었다는 중의적 표현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게 되는 상황에 정확한 공통적 특징은 없지만 ‘관계’를 통해 눈이 멀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로부터 아주 사소하게나마 관계한 모든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된다. 왜 저자는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리는 설정으로 소설을 썼을까.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 것처럼 무언가에 미쳐버리면 사람들은 흔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성마저 잃고 마는데 이렇게 눈이 멀어버리면 실제로 눈이 머는 것보다 더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눈이 머는 물리적인 실제는 정신적, 감정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을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바라는 환상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두려움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도 많다. 현실이 괴롭고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에 환상을 보고 싶어 하고 그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것에 열광한다. 그 극단적인 예는 황우석과 심형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현재 이명박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과연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공약과 정책이 자신들을 위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더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대선 후보들의 환상 공약 중에 가장 환상다운 환상이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환상이 아니라 가장 환상다운 환상을 믿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고 올바른 일일까. 바라는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환상에 취할 때 지독한 파시즘은 그 더러운 꽃을 피운다.
조직과 개인, 인간 본성에 대한 강한 의문
몇몇 엉뚱하고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인간 몸의 구조를 비유의 대상으로 타당성을 얻고자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철 지났지만 빌 게이츠의 디지털 신경망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 몸이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자체도 조직을 이루고 살아야한다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조직들은 조직을 이룬 그 인간의 본성에 의해 무너져 온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거라는 암시로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가 눈을 뜨자 의사 아내가 느낀 강렬한 외로움처럼 말이다. 기대하던 순간이 눈앞에 닥치자 공허함과 허탈감을 느끼는 인간. 조직 속에서 자유롭게 개인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조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난 어떤 인물로
내가 눈먼 도시의 시민이었다면, 나도 눈이 멀었다면, 수용소에 격리되었다면 난 어떤 병동에서 어떤 침대를 차지하고 어디에 배설하고 어디에서 그 조악한 음식들을 씹어 삼켰을까. 소설 밖으로 나와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과연 정신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 아닐까. 내가 믿고 살아가는 세상의 이념과 사상은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이 있을까.
-
술이 달큰하게 작용하는 밤에 지하철 안에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나는 눈이 멀었다. 나도 시간이 흐르면 내 앞에 있는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고 덤벼들게 될까.
누워서 생각해본다. 난 눈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