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의 입체파(큐비즘) 화가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요소들>이 앞표지에서 금속의 표면에 반사된 빛으로 소설의 전반적인 전달 내용을 전달해주는 <멋진 신세계>는 독일의 파시즘 정당인 나치스가 정권을 잡기 1년 전인 1932에 출간된 책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어떤 면에서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과 전체주의의 밀착에 관한 소설을 썼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살던 시대의 미묘한 흐름을 통해 나치의 인종주의와 전체주의의 전조를 보았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균형을 잃은 시대의 미묘한 흐름


한 편의 공상 과학 영화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짜여진 <멋진 신세계>를 보면서 과학 문명의 상상력이 담긴 여러 가지 영상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그 중 인간이란 종이 스스로 만들고 발전시킨 과학 문명에 의해 존엄성을 잃고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모습은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원더키디가 가장 비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적으로 회의주의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지금 현실 사회는 과학에만 의존해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루어야하고 반찬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한데 과학만 너무 추켜세우고 좋은 옷 입혀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는 데는 문제가 다분하다. 분명 과학 과잉에 대한 부작용을 지적하는 예술은 많았지만 인문학의 과잉으로 생기는 부작용을 꼬집은 예술은 비교적 많지 않았다는 점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찍이 과학의 시대를 겪은, 겪고 있는 서양의 영국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가 이런 소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그의 주변에 갖추어져 있었다고 해야겠다.


갓길 없는 질문

현실 사회와 맞닿는 접점이 수도 없이 많은 <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가 살던 시대와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과연 사람들이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과학적 진보의 편리함을 뒤로하고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렇다면 ‘진보엔 항상 어떤 희생이 따른다’는 저자의 사상에 따라 최소한의 희생만은 감수하며 계속되는 진보를 이룩해야 하는 걸까. 거기에 등장인물 존이 대답한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과연 현대의 누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멋진 신세계>속에서 과학 문명인이 아닌 존만이 ‘공유, 균등, 안정’ 이라는 세계 국가 표어에 대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공유, 균등, 안정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진정성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포드 기원 632년 같은 시대는 누군가에겐 살만한 오히려 지금 보다 더 살고 싶은 시대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정말 살기 싫은 ‘인간의 진정성’이 결여된 불안한 사회일 수 있다. 인간의 진정성이란 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 느끼는 인간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절함’이 아닐까.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애절함이야말로 인간의 진정성이라고 할 때 주입되는 감정 이외의 감정은 갖지 못하는 제조된 인간은 진정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 의식에 굉장히 거슬린다. 노동에 대한 인간의 애절함을 기계가 대신하여 인간이 노동에서 물러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멋진 신세계>는 이렇게 인간의 존재 의식과 진정성을 거스르는 이야기 전개를 통해 과학—생물학의 발전에 치우쳐있지만—의 발전을 통한 인간의 진정성, 애절함의 결여를 보여줌으로써 시대를 돌아볼 수 있는 시선과 기회를 마련한다.


어른아이들의 검열

<멋진 신세계>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접점 중 하나를 꼽자면 어린아이들에 대한 어른아이들의 세상 검열과 인권 탄압이다. 세상 검열이라 말한 이유는 어른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모든 것을 싸잡아 검열하려하기 때문이다. 어른아이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어린아이들에게 해롭다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로막는다. 언젠가 어린아이들도 어른아이가 되어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데도. 현실의 추악함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본질적인 현실의 추악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분명 어른아이들의 이 같은 행동과 생각은 어린아이를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함이 어린아이들에게 긍정적일 수는 없다. 어르고 어르기만 해서 키운 아이는 자연스럽게 단체 속의 개인으로 살아가기 힘들고 남을 존경할 줄 모르듯이 어린아이들에 대한 어른아이들의 제멋대로 검열이 멈출 때 어린아이들이 제 지성에 맞게 그리고 올바른 지성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추악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성이 길러지는 때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또한 어른아이들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편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삶의 한계

<멋진 신세계>에 적용된 올더스 헉슬리의 과학의 진보에 대한 상상은 그가 상상한 미래에 그 보다 조금 더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분명히 둔탁한 데가 있을 것이다. 어휘에서 오는 둔탁함도 둔탁함이지만 현대는 뇌의 기억을 저장하여 신체에 이식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상황에다가 <멋진 신세계>와 그 제작 의미를 같이 하거나 흥미를 위한 개념 없이 제작된 SF 영화를 본다면 시대라는 것, 혹은 삶이라는 것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이겨내는 방법은.



그 밖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역사적 인물의 이름과 일치한다.


인디언은 인도 사람이고 지금 인디언이라고 불림을 당하고 예전엔 그들 삶의 터전에서 내쫓긴 사람들은 미국 원주민이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인디애나존스 같은 잔인한 현재 미국인들이 총칼로 몰아낸 미국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판적 견해와 성찰의 문학에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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