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 지호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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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문예적인 수사와 확고한 주장이 담겨있는 책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는 부재를 ‘공학에 대한 찬가’라 해도 될 정도로 ‘공학’이 인류 문명에 기여한 것들을 역사적인 맥락(기술사) 속에서 논리적이고 꼼꼼하게 보여준다. 주제는 다르지만 공학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묶인 이 책은 저자 헨리 페트로스키가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지에 실었던 칼럼들을 모은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말을 통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유추할 수 있고 과학과 구별되어 별개의 응용‧실천 학문으로서의 공학에 대해 살피는 글들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제가 공학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일에 흥미를 느낀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학과 과학, 공학과 일반 문명과의 관계에 대한 오해와 지금 세상에서 공학이 차지하는 고유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공학은 앞으로도 계속 과학과 확연히 구별될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그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공학은 우리가 가지고 싶어 하는 세상을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9p)

실제로 각 칼럼들은 핵심 주제인 과학과 공학의 차이와 공학의 인류 문명에 대한 기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선이든 무선이든 기술 발전은 언제나 사람들을 놀래 키고,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며, 특별한 비결을 제시해 주리라는 것이다.”(158p)라는 저자의 기술에 대한 낙관론이다. 과연 기술 발전이 ‘특별한 비결’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기술 발전이 언제나 낙관적일까? 저자는 역사적으로 이를 논증하려 하지만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순진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술사 자체에 취해 있다. 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으로 유발되는 부작용은 공학의 역사만큼이나 많았고(다이너마이트와 무기가 대표적) 그 부작용은 기술의 발전에 인문학적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에 모은 19개의 칼럼에서 공학은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고 그것이 공학의 설계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인문학적으로 첨예한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를 테면 “이 자부심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수사를 쓴다거나 후버 댐 건설 계획에 ‘황인종은 고용하지 말 것’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냥 지나친다. 공학 칼럼에 인문학적 성찰을 담아내는 것은 지면의 양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언급했어야하는 부분이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공학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문학적 성찰인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만화 <원더키디>같은 디스토피아 작품은 기술에 예속된 삶을 사는 인간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디스토피아적 삶이 아닌 유토피아적 삶을 원한다면 공학자들은 그들의 기술 개발에 열중하는 동시에 인문학자들의 사회적 연구 결과에도 관심을 보이고 검토해 보아야 한다.

어떤 한 분야에 대한 전문 적인 지식을 담고 있는 전문 서적이 그 대표적인 예지만 책의 내용과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에 사용한 낱말을 저자가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가령 4번 째 칼럼 <에디슨 시대의 버그와 20세기의 버그>를 이해하려면 버그란 낱말을 단순히 컴퓨터 인터넷을 타고 들어와 파일을 좀먹는 이름 그대로의 버그가 아니라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일을 예상하는 일’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는 공학자, 기술자, 엔지니어라는 낱말을 무분별하게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Engineer란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로 기술자, 공학자이다. 한 가지로 통일하면 독자를 배려하는 번역이 됐을 것이다. 또 각 칼럼에 칼럼이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지에 실린 날짜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요즘 아이들은”같은 표현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공학에 대한 찬가가 담긴 책을 읽으며 인문학의 목표와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공학과 인문학의 관계, 인문학의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가질 수 있었다. 공학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인문학적 의문에 대한 해답은 당연히 인문학자가 가지고 있고 인문학자는 공학자가 개발한 기술을 이용해 더 많은 인문학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편리한 삶을 영위한다. 인문학자가 ‘사유’만 가지고 한강 다리를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공생해야 한다.

인문학이 그 목적으로 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학문이 되는 것을 인문학자 자신이 꾸준히 경계해야 한다. 공학자들의 노력처럼(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삶에 보탬이 되는 인문학적 응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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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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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역할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체계적 지식 구축을 통한 정확한 현상 파악과 그에 따른 해결책, 대안을 사회에 제시하는 것이다. 체계적인 구조로 지식을 구축해놓으면 우선 물에 뜨는 방법, 물의 흐름과 반응에 대해 몸으로 익힌 사람이 갖가지 영법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응용이 가능하다. 한 사람의 역량으로 세상의 많은 분야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모두 구출할 수 없기 때문에 각 분야 지식인들의 연대가 필요하고 그 연대를 통한 배움을 응용할 수 있는 체계적 지식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지식에 틈과 균열이 있을 때 어느 순간 응용이 불가능함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런 틈을 지속적으로 채워나가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지식인이라는 특정 계급에 대한 대중들의 지나친 숭배로 지식인들이 갈수록 오만방자해지고 자신보다 어리거나 학력이 낮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수치로 여기며 학생들에게 배우는 것을 기분 나빠하고 오히려 그 특유의 오만방자함으로 학생들을 억누름과 동시에 자신들의 기반인 대중들을 은연중에 무시한다.

생산적 담론이 담긴 책

지승호가 좌파, 좌파에 가깝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7인을 선정해 인터뷰를 하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판매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는 독자는 어떻게 이 책에 반응해야 할까? 아무래도 독자의 역할은(진보라는 단어와 의미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테니)“진보는 무엇일까?” “난 얼마나 진보적인가?” “진보는 필요할까?”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보적이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따라야하고 그 과정을 한 번 생각으로 더듬어 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이 책에서 7명의 지식인들의 생각을 하나하나 꼬집고 반론하는 것보다 이 책에 정확히 반응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7인의 같은 혹은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승호가 다시 이런 인터뷰를 엮은 책을 낼 때에는 좌파 지식인 3, 우파 지식인 3으로 인터뷰를 구성해 짜임새 있는 질문으로 서로 상반되는 의견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에서 7인의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 중 하나가 우파 보수 세력이 너무 연구하지 않고 멍청하다는 것인데 독자들로 하여금 실제로 우파 보수 세력이 멍청한지 아닌지 느낄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보수 세력이 멍청한데 진보 세력 너희는 왜 보수 세력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느냐? 마음의 사치에 만족하고 있는 것 아니냐?란 질문이 나올 것이다.

정치인들의 언어 사용

내가 보기에 2007년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이 가장 많이 쓴 영어 단어는 ‘네가티브(negative)’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명박에 대한 ‘네가티브 공세’가 아니라 ‘네가티브’라는 단어, 맥락 속에서의 그 말에 있다. ‘네가티브’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두 가지 명확한 이유와 몇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하나, 함축하기 위함이다. ‘왜 날 비방해’ ‘쓸데없는 거짓말 하지 마’같은 반격을 ‘저 후보가 내게 네가티브 공세를 편다’ ‘네가티브가 많다’라고 짧게 말하기 위함이다.
둘, 이렇게 짧게 말하는 데는 부정적인 말과 그 어감을 피하고자 하는 데 있다. ‘네가티브’라는 표현은 그 맥락 속에서 뭉뚱그려진 단어인 동시에 한국어의 자칫 강한 어조로 들리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 단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그 사항이 미묘한 갈들이라도 생기면 실패하기 쉬운 것일 때는 모든 사소한 것에 신중하기 마련인데 정치계에서의 말 한 마디, 단어 사용 하나는 노무현의 발언이 일파만파 퍼져 비난 받는 것처럼 신뢰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 특유의 조심성과 회피 차원에서 ‘네가티브’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영어를 쓰면 더 유식하게 여기고 못 알아듣더라도 고개 끄덕이고 넘어가는 대중들이 있기에 ‘네가티브’같은 단어의 사용이 더 잦아진다. 이명박 같은 경우는 글로벌 CEO 대통령이라는 덕지덕지 붙은 수식어를 더욱 단단히 하는데 도움이 됐으리라. 또, 보통 한국 정치인들은 미국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정치 용어를 많이 따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네가티브’도 그 하나가 아닐지.

책 속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지만 ‘진보개혁세력’ ‘삼성공화국’ ‘부동산 공화국’ ‘부패 민주주의’같은 모순된 표현의 사용도 여배우들이 더 벗어야 좋아하는 자극처럼 더 자극적인 단어로 자신의 글이 주목받기를 원하는 기자, 지식인의 욕망이고 이들이 욕망이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
7인의 노무현, 황우석, 수구보수세력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서 곱씹어 보는 것도 재미있겠고, 젊은 층, 대학생을 비롯해서 사회 문제 의식을 갖기 시작한 ‘젊은 층들은 과연 역사의식을 담을 수 있는 신체인가? 아닌가?’에 대한 진중권과 손석춘의 이견을 조사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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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te! - 정보 중독에서 벗어나는 아주 특별한 비밀
전병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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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보의 노예

먼저 ‘정보 중독에서 벗어나는 아주 특별한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이 책이 정보라는 낱말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정보라는 낱말이 가진 원래 의미인 ‘생존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그를 둘러싼 정황에 관한 소식을 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책은 한 개인이 접하는 쉽게 말해 눈에 들어와 뇌로 전달되는 모든 것을 정보(개구리)로 정의하고 그 엄청난 양의 정보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어떻게 찾고, 찾은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에 대해 경험을 토대로 꽤 꼼꼼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100년 안팎인 인간의 수명과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에 비교하면 현대 매체 정보의 양은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것을 모두 공감할 수 있다.


“컴퓨터를 열면 정보가 우글거렸다. 거기에 멍하니 들여다 본 TV, 하루 종일 떠돈 인터넷, 선동하는 신문, 갑자기 끼어드는 휴대폰과 인스턴트 메신저, 중요한 순간에 걸려온 광고 전화까지 정보는 넘쳤고 시간은 모자랐다.”(14p)


컴퓨터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는 현대인은 자신이 그 모든 정보의 주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매체와 정보에 사로잡힌 노예가 있다. 정보를 다양한 경로로 ‘자유롭게’ 접할 수 있다고 해서 정보의 주인인 것은 아니다. 필요한 정보와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구분 없이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입장을 주인이라 하긴 어렵지 않은가.


“여배우의 스캔들, 신기한 해외 토픽을 뒤적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뭔가 시작하려고 마음먹고는 몇 시간 동안 웹서핑을 했다. 하지만 시작한 이유를 잊어버렸다. 점심 먹을 시간이다.”(44p)


소설 형식, 가상 인물

<Delete!>에서 저자 전병국은 소설 형식과 김인하라는 가상의 인물로 정보를 지배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는데 이런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 형식을 통한 재미, 부드럽지만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엔 날카로운 독설을 아끼지 않는 김인하를 통해 자칫 명령이나 훈계로 들려 기분 나쁠 수 있는 책 전체의 내용을 차분하면서 진지한 가르침으로 보일 수 있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조는 지루하지 않게 쓱쓱 읽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Delete!>의 서가 위치

요즘 서점가에서 대세인 처세/자기 계발 서적과 <Delete!>를 비교한다면 어떨까.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강자가 되어 약자를 통한 잉여 가치를 어떻게 많이 착취할 지, 어떻게 하면 착취당하는 약자가 아니라 착취하는 강자가 될지, 자신보다 강한 착취자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의 환상을 주입하고 잠시 성공의 꿈에 취하게 만드는 처세/자기 계발 서적은 개인 집단,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Delete!>는 개인과 정보의 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다르다. 그리고 다르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언급을 빼면 사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별다른 주의 없이 읽을 수 있고 현재, 정보에 시달려 피곤하거나 미래의 계획을 짜는데 불필요한 정보들이 거슬린다면 <Delete!>를 통해 불필요한 정보와 필요한 정보를 구분하고 활용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Delete!>도 불필요한 정보일 수 있다

<Delete!>에서 김인하 교수는 멈춤–목표 설정–몰입–위임의 네 단계를 ‘정보의 운명을 즉시 결정 한다’는 원칙으로 가르친다. 각 단계를 1주일씩 실행하며 변화하는 제자는 마침내 정보의 불안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책의 뒷부분엔 ‘한 순간의 번뜩임’에서 끝나지 않도록 실천 워크북을 담고 있다.

다만 이미 정보에 시달리는 경험을 통해 자기 노하우를 가졌거나 확실한 목표를 갖고 그것만을 향해 몰입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Delete!>는 그 자체가 불필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시집처럼 자신의 상황에 맞게 읽어야 한다. 내 경우 몇 가지는 이미 알고 있던 ‘지혜’였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고 대부분 새롭게 배우는 지혜여서 그 지혜를 통해 앞으로의 계획을 짜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Delete!>의 오점 중 하나

저자 전병국씨는 <Delete!> 58페이지에서 얼마 전 <그리스 로마 신화 4권>을 출간한 번역가이자 신화학자인 이윤기씨의 “내 번역을 평가할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있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요. 이를 테면 <장미의 이름>을 분석해서 내 번역을 비판하려면 적어도 5개월은 걸릴 텐데, 우리나라엔 그런 노력을 들일 사람이 없어요.”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Delete!>가 출간되기 4년 전인 2000년 3월에 이미 철학자 강유원씨가 “<장미의 이름> 번역본 중 3백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 및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했고, 이에 번역자 이윤기는 <장미의 이름> 신판을 다시 준비하기도 했다.” 강유원씨의 원고는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으로 2004년 출간되었고 <장미의 이름> 3번 째 개정판 하권의 끝엔 이윤기씨가 강유원씨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있으며 강유원씨가 지적한 부분이 간략하게 나와 있다. <Delete!>도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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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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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에 대한 단평 및 단상


1.

끼리끼리. 한겨레출판에서 매 해 출간되는 교양, 상상력, 거짓말, 자존심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는 핵심 단어만 다를 뿐 다루는 내용과 그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적 지식인의 강연과 진보적 지식인을 흠모하거나 그 지식인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진보적 지식과 정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반론보다 동의, 토론보다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 정도로 고착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앞서 말한 것들도 중요하지만 생산적인 강연과 토론을 위해서는 기회와 시간이 허락한다면 모여 있는 이들과 전혀 반대의 사상과 입장을 가진 사람을 강연자로 부른다거나 그런 사람들과 함께 토론해 보는 것이 진보와 보수의 대화, 증오의 경쟁이 아닌 화합의 경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터놓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2.

강연자들 개개의 성향이 뚜렷하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하종강, 아노아르 후세인, 정희진, 박노자, 고미숙. 모두 자신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과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다. 정태인씨의 FTA에 대한 강연과 고미숙씨의 자존심에 대한 자기 철학이 인상적이고, 진중권씨의 극히 개인적이라 다소 과격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과격하지 않은 개인 차원의 자존심에 대한 강연과 문답이 유익했다. 한 대 맞으면 열 대 때려 줄 각오가 되어 있는 진중권씨는 과격해 보이지만 그 과격함이 욕망으로 분출되거나 혼자 동떨어져 행동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3.

책을 읽고 있자니 한국 사회에는 뭐 이리 근본에서부터 뒤틀린 문제가 많은지 모르겠다. 다양하게 퍼져 나간 사회 운동을 통해 하나하나 차근차근 진보해 나갈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갖고 사는 수밖에. 그리고 그 희망을 위해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4.

내 자존심은 진실함을 통해 의연할 수 있는 것. 복잡하게 비꼬고 어려운 수사로 해석할 필요 없이 직관적일 수 있는 것이면 충분. 정말 자존심을 지키는 건 내가 모르는 것을 남에게 교묘히 숨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을 드러내고 알 수 있게 노력하는 모습과 알았을 때의 쾌감이다.


5.

진중권씨가 몇몇 사건으로 유명해졌고 가장 먼저 강연했기 때문에 지은이가 진중권 외로 되어 있어 한겨레출판으로 고쳐 썼다.

2008년 한겨레에서 진행하는 키워드 강연은 꼭 참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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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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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자기 해석

시는 가까이하기 부담스러운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안팎으로 느끼는 감흥을 갈고 닦은 언어로 유려하게 표현한 것이다. 시를 쓰는 이는 인생의 갖가지 상황, 이를테면 광활한 자연에 대한 숭고함, 사랑하는 이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누군가의 죽음, 희생에 대한 감흥을 표현하면서 그 감흥의 정서를 추스르고 읽는 이는 이런 감흥을 공감하는 동시에 그 감흥을 통해 상황에 대한 정서를 추스를 수 있다.


그렇다고 소주의 쓴 맛에서 인생을 느낄 수 있는 정도쯤 돼야 시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시를 접할 때의 상황이 시에 대한 감흥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동시처럼 학급에서의 우스운 상황이나 연필과 지우개 같은 일상적으로 자주 접하는 사물을 의인화한 시도 존재하는 것이다.


보다 깊은 감흥

‘뱀’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로 유명한데 이 시를 접하려면 현대 예술을 접할 때처럼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뱀은 길다’가 이 시에 존재하는 물질로서 가시적 언어의 전부다. ‘뱀’이라는 시의 존재는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시에 대해 배우며 우스개로 “이런 시도 있다”고 말하는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았다. 졸업한 이후로도 이 시를 쓴 쥘 르나르는 안중에 없었고 오직 시를 생각하면 ‘뱀은 길다’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런 ‘뱀’이라는 시를 이해하려면 쥘 르나르의 생과 그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해는 앞서 말한 것처럼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감흥을 위한 개인적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 ‘뱀’보다 더 짧은 시를 알게 됐는데 이 시는 아예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시적 언어는 없지만 그 감흥은 시대 상황과 맞물리는 울림으로 존재한다. 황지우의 <묵념 5분 27초>가 그것이다. 이 시는 제목만 있다. 왜 제목만 존재하는지 제목 자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를 썼을 당시 시대 상황을 알면 그 감흥은 더 한다.


이렇게 시는 상황에 대한 감흥을 담아 언어로 노래한 것을 말한다.


치유와 쾌감

“시는 인간 영혼의 자연스런 목소리다. 그 영혼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노래한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다. 시는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그 상처와 깨달음을. 그것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138p)


“시를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139p)


시를 쓰고 읽는 과정을 통해 낱말 하나하나의 상황에서 감흥을 느끼며 정서를 추스르는 것이다. 치유와 함께 시를 접할 때 느끼는 쾌감의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쾌감은 시의 내용에 공감하고 언어 표현에 잠겨 짜릿하고 멍한 느낌이거나 세상 어떤 일도 해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일 수 있다. 이런 감흥의 쾌감은 기술적으로 갈고 닦은 언어의 표현과 시적 이야기 전개 속 반전, 상황의 애절함을 통해 전해진다. 이 세 가지가 잘 버무려진 시도 있고 한 가지만 느낄 수 있는 시도 있지만 모두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감흥도 시에서 느낄 수 없다.


보다 깊은 감흥을 위해 시의 낱말을 분석하거나 한용운의 ‘님’이 국가를 상징한다는 현학적인 해석은 할 필요 없다.


“교사들이 분석해 주는 시를 들으면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시를 곤충처럼 날개를 찢고, 더듬이를 잘게 부수고, 등껍질을 다 벗겨내 마침내 죽게 만드는 행위임을 느꼈다. 훗날 내 손으로 직접 시집을 사들고 와서 혼자만의 방에서 조용히 소리 내어 시를 읽었을 때, 비로소 시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시를 접하며 공감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시를 몇 번이고 소리 내 읽거나 쓴 시를 사랑하는 이에게 읽어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접하고 느끼는 것이 시다.


싫어하는 시

좋은 시와 나쁜 시를 나누는 문학적 기준과 무관하게 나는 명령조로 쓴 시와 사회성을 잃고 방황하는 시를 싫어하고 멀리한다. 감흥이라는 정서적 기제에 취해 사회성을 잃은 시는 싸구려 명상 서적 같은 한 순간의 잡음일 뿐이다. 깨달음을 주려고 명령조로 쓴 시 또한 관중을 자꾸 의식하는 가수나 연기자처럼 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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