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 지호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제목에 문예적인 수사와 확고한 주장이 담겨있는 책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는 부재를 ‘공학에 대한 찬가’라 해도 될 정도로 ‘공학’이 인류 문명에 기여한 것들을 역사적인 맥락(기술사) 속에서 논리적이고 꼼꼼하게 보여준다. 주제는 다르지만 공학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묶인 이 책은 저자 헨리 페트로스키가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지에 실었던 칼럼들을 모은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말을 통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유추할 수 있고 과학과 구별되어 별개의 응용‧실천 학문으로서의 공학에 대해 살피는 글들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제가 공학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일에 흥미를 느낀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학과 과학, 공학과 일반 문명과의 관계에 대한 오해와 지금 세상에서 공학이 차지하는 고유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공학은 앞으로도 계속 과학과 확연히 구별될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그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공학은 우리가 가지고 싶어 하는 세상을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9p)
실제로 각 칼럼들은 핵심 주제인 과학과 공학의 차이와 공학의 인류 문명에 대한 기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선이든 무선이든 기술 발전은 언제나 사람들을 놀래 키고,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며, 특별한 비결을 제시해 주리라는 것이다.”(158p)라는 저자의 기술에 대한 낙관론이다. 과연 기술 발전이 ‘특별한 비결’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기술 발전이 언제나 낙관적일까? 저자는 역사적으로 이를 논증하려 하지만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순진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술사 자체에 취해 있다. 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으로 유발되는 부작용은 공학의 역사만큼이나 많았고(다이너마이트와 무기가 대표적) 그 부작용은 기술의 발전에 인문학적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에 모은 19개의 칼럼에서 공학은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고 그것이 공학의 설계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인문학적으로 첨예한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를 테면 “이 자부심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수사를 쓴다거나 후버 댐 건설 계획에 ‘황인종은 고용하지 말 것’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냥 지나친다. 공학 칼럼에 인문학적 성찰을 담아내는 것은 지면의 양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언급했어야하는 부분이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공학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문학적 성찰인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만화 <원더키디>같은 디스토피아 작품은 기술에 예속된 삶을 사는 인간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디스토피아적 삶이 아닌 유토피아적 삶을 원한다면 공학자들은 그들의 기술 개발에 열중하는 동시에 인문학자들의 사회적 연구 결과에도 관심을 보이고 검토해 보아야 한다.
어떤 한 분야에 대한 전문 적인 지식을 담고 있는 전문 서적이 그 대표적인 예지만 책의 내용과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에 사용한 낱말을 저자가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가령 4번 째 칼럼 <에디슨 시대의 버그와 20세기의 버그>를 이해하려면 버그란 낱말을 단순히 컴퓨터 인터넷을 타고 들어와 파일을 좀먹는 이름 그대로의 버그가 아니라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일을 예상하는 일’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는 공학자, 기술자, 엔지니어라는 낱말을 무분별하게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Engineer란 단어는 사전적인 의미로 기술자, 공학자이다. 한 가지로 통일하면 독자를 배려하는 번역이 됐을 것이다. 또 각 칼럼에 칼럼이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지에 실린 날짜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요즘 아이들은”같은 표현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공학에 대한 찬가가 담긴 책을 읽으며 인문학의 목표와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공학과 인문학의 관계, 인문학의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가질 수 있었다. 공학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인문학적 의문에 대한 해답은 당연히 인문학자가 가지고 있고 인문학자는 공학자가 개발한 기술을 이용해 더 많은 인문학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편리한 삶을 영위한다. 인문학자가 ‘사유’만 가지고 한강 다리를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공생해야 한다.
인문학이 그 목적으로 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학문이 되는 것을 인문학자 자신이 꾸준히 경계해야 한다. 공학자들의 노력처럼(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삶에 보탬이 되는 인문학적 응용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