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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그 손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까지 오는 동안 너무 많은 성형 수술로 문드러진 것 같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딱 맞다. 애초에 불합리한 구조가 그 불합리한 구조에 편승한 권력의 수정에 의해 합리성을 갖긴 어렵다. 나는 그런 ‘문드러진 손’에 시장을 맡기는 신자유주의의 문제 중 초월적 거래 대상과 교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신자유주의는 누구에게 이득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특성상 자본가가 자본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자연이든 인간의 생명이든 거래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자연에 대한 자본가의 횡포에 대해 자주 접하고 있으니 인간에 대한 자본가의 횡포에 대해서 이 책의 세르비아군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의 횡포(94~95p)와 수단 카르툼의 이슬람 정권 지도자 하산 투라비의 횡포(95p), 이집트에 대한 미국의 식량 원조 협정(96p), 칠레 대통령이었던 아옌데와 스위스 다국적 기업 네슬레(99p)를 통해 굶주리는 기아를 무기로 내세우는 군벌이나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그 횡포를 뒤에서 돕는 미국 정부의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비난받아 마땅한 정책을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언론과 교육의 문제가 있지만 한국의 교육의 문제에 집중하자면 노동 교육 같은 기본 교육과 마찬가지로 다른 가치관, 다른 이들의 삶을 배려하고 관심 갖는 교육은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한국에서 필요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흐름에 남을 배려하는 삶에 대한 교육은 경쟁에 뒤쳐질 뿐이고 대학만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배우는 학생들은 경쟁에 뒤쳐져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삶이 두렵기 때문에 경쟁에 필요하지 않은 교육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게 됐다.
신자유주의는 분명히 장점을 갖고 있다. 제약 없는 경제의 활성화로 자본의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고, 경쟁을 통해 성취욕을 자극하여 생산의 기능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은 더 많은 자본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이득일 뿐이다. 이 책 부록에서 주경복이 든 예처럼 헤비급 선수와 라이트급 선수를 섞어 놓고 알아서 싸우라고 하면 그건 자유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자본의 자유이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어떤 정책이나 정당을 지지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 정당의 정책이 내게 이로운지를 따져보는 것일 텐데 지금 한국 국민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에서 이득을 보는 입장이 아닌데도 신자유주의를 선동하는 정당을 다수 지지한다. 신자유주의가 누구에게 이득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고 경제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책을 읽고 몇 가지 의문에 시달리고 있다.
왜 먹을 것은 생산하는 사람들이 먹지 못해 굶어 죽을까?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맨큐가 말한 경제학의 10대 원래는 과연 옳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