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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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타인이라 하고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 고통이라 할 때, 타인의 고통은 다른 사람의 몸이나 마음이 괴롭거나 아픈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지만 더 이상 텔레비젼 뉴스나 신문, 잡지에서 고통스럽고 잔인한 사진을 보아도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것 이외에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하게 된지 오래고 사진들이 사람들의 감수성을 얼마나 무디게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진부해져버린 시대가 됐다. 여기서 말하는 무뎌진 감수성은 집안에서 조용히 책만 봐도 느낄 수 있다. 하루에 한 번쯤은 삐용삐용 구급차나 소방차가 싸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는데 그 소리에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대해 자각하는 감수성이 무뎌져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무뎌진 감수성에서 내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사진가와 대중의 반응과 사진을 쏘는 행위, 이 책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이 주장하는 바를 살펴보자.

종군 사진가는 전쟁 지역에서 전투하는 특정 군대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종군 사긴가가 찍은 사진 중에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되는 사진을 대개 우연히, 급하게 찍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이다(타일러 헉스의 [처형당하는 탈레반],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군 병사의 죽음], 에디 애덤스의 [처형 당하는 베트공 포로]). 이런 사진을 보면서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에 사진을 찍는 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란 의문을 품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 생각에 종군 사진가가 전쟁 지역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몇 가지 합의가 필요하다. 사진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양 진영 모두 죽이지 말자는(터무니없는) 합의와 전쟁을 미화시키려는 군대의 사진가 고용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터무니없고 후자는 역사적으로 빈번한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종군 사진가는 역사적 기록을 담당한 중립의 보호 대상이거나, 특정 군대의 소속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군 사진가는 전쟁 지역에서 실제 전투를 찍거나 전쟁의 주체인 양 진영 모두의 입장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종군 사진가도 목숨이 하나인 인간이기 때문에 한 쪽의 보호를 받으며 연출하거나 연출된 사진을 비교적 안전한 장소에서 찍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진가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사진가의 상충되는 이중심리와 인간으로서의 윤리에 대한 답이 모호해진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의 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 종군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찍는 일 뿐이다. 종군 사진가는 총에 맞는 사람을 총에 맞지 않게 구할 능력도, 자신이 대신 총에 맞을 능력도 없다. 다만 사진을 찍는 순간에 기록으로서의 고발과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욕망만이 종군 사진가의 머리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진가의 행동을 부추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학적인 수요와 공급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체를 보려는 욕망처럼 겪어보지 못한 처참한 상황을 타인의 고통으로, 스펙터클로 소비하고 싶은 것이 대중의 욕망이다. ‘나는 아니다’라는 안도감과 ‘나는 상관없다’는 무고함, ‘안타깝다’는 연민의 감정에서 자라나는 욕망이다. 그 대중의 욕망은 욕망의 갈증을 해갈해주는 언론기업을 먹여 살리고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하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언론기업과 정부에 고용된 사진가는 고통스런 사진을 접하면 접할 수록 엷어지는 대중의 감수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잔인하고 끔찍한 사진을 연출하게 되기도 한다.

“1930년 에른스트 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윙거는 이렇게 썼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사진을 ‘쏘는’ 행위는 정말 총을 쏘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가가 총을 쏘는 사람의 군대에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 총에 맞는 사람을 방관했기 때문에? 총에 맞은 사람을 사진으로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죽은 사람의 형제자매가 사진을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죽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진을 쏘는 행위와 총을 쏘는 행위는 편집증적인 생물학적 집착에서 비롯한 공통점이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실재로 총의 무력 앞에 불가항력인 사진가를 총 쏘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것은 틀렸다. 사진가와 총에 맞는 사람 사이엔 총알이 지나다니는 공간이 있다.

수전 손택은 이 책에서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담은 사진에 대해서부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의 주장이 명확하지는 못한 것 같다. 쉽게 와 닿지 않고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종군 사진가에 대한 입장이 그렇고 사진을 보는 대중의 행동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다. 현실을 진단하는 실증적 입장과 변화의 대안을 제시하는 규범적 입장 사이에 손택의 주장이 있다. 사진가의 불가항력처럼 손택의 주장도 어중간할 수밖에 없는 걸까?

결론적으로 사진을 보는 대중은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진 속 처참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다”라고 수전 손택은 말한다. 일차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실재를 명확히 보고 행동하자는 비평가다운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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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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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가 40년 전, 그러니까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하게 넘겼고, 신발은 28호였으며,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을 때의 이야기다. 대개의 유년 시절이 그렇듯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부터 학교라는 더 큰 사회까지 혼자 자라지 않고 사회 속에서 자라며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의 부조리와 함께 성장한다. 아버지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사전에 말도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부모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형에게만 자전거를 사준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개를 묶어 놓지 않는 하르트라웁 박사도 세상의 부조리에 일조한다.

어린 가슴에도 그런 세상의 부조리를 겪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까. 아니다. 최초의 충격은 그 충격을 접할 수록 충격의 층위가 엷어지는 것이다. 어릴 수록, 최초의 충격일수록, 고통은 더했을 것이다.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알지만 존재감이 없고 보통 인간의 생활과 다른 생활을 하는 좀머 씨의 살기 위한 본능을 몰래 지켜보며 자신의 고통이 세상의 부조리가 한 낯 코딱지로 인해 봇물처럼 터졌음을 자각하고 다시 부조리의 세상에서 부조리를 잊고 살기로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좀머 씨에 대해서는 전쟁 직후 마을에 정착 했다거나, ‘나’가 좋아하는 여자아이 카롤리나 퀴켈만과의 하교길에서 보여주려고 한 나무가 전쟁 직후 어느 늙은 나치가 목을 매달고 죽은 나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에서 <좀머 씨 이야기>의 배경이 2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고 좀머 씨의 걷기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숲 속에 사방을 살피며(적을 찾듯) 빵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은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파울 보이머가 전쟁 중에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느낀 이질감과 비슷한 감정의 집착일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좀머 씨의 보이지 않아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깊이와 굴곡이 숙연한 기분과 연민을 느끼게 한다. 좀머 씨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었지만 좀머 씨도 한 때 세상의 부조리를 잊고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부조리에 대항할 수 없게 되자 항상 해왔던 대로 호수로 ‘걸어들어 가’ 자살을 하고 ‘나’는 어린 시절의 부조리를 좀머 씨처럼 잊고 청년으로 성장한다. 결국 세상의 부조리는 반드시 존재하지만 그걸 잊고 살아가거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좀머 씨에 대한 “밀폐 공포증 환자다.” “항상 경련을 하기 때문에 걷는다”같은 추측은 실제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삶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에 대한 소개를 살펴보면 그가 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추측과 소문이 난무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추측과 소문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큰 소리로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하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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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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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그 손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까지 오는 동안 너무 많은 성형 수술로 문드러진 것 같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딱 맞다. 애초에 불합리한 구조가 그 불합리한 구조에 편승한 권력의 수정에 의해 합리성을 갖긴 어렵다. 나는 그런 ‘문드러진 손’에 시장을 맡기는 신자유주의의 문제 중 초월적 거래 대상과 교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신자유주의는 누구에게 이득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특성상 자본가가 자본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자연이든 인간의 생명이든 거래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자연에 대한 자본가의 횡포에 대해 자주 접하고 있으니 인간에 대한 자본가의 횡포에 대해서 이 책의 세르비아군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의 횡포(94~95p)와 수단 카르툼의 이슬람 정권 지도자 하산 투라비의 횡포(95p), 이집트에 대한 미국의 식량 원조 협정(96p), 칠레 대통령이었던 아옌데와 스위스 다국적 기업 네슬레(99p)를 통해 굶주리는 기아를 무기로 내세우는 군벌이나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그 횡포를 뒤에서 돕는 미국 정부의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비난받아 마땅한 정책을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언론과 교육의 문제가 있지만 한국의 교육의 문제에 집중하자면 노동 교육 같은 기본 교육과 마찬가지로 다른 가치관, 다른 이들의 삶을 배려하고 관심 갖는 교육은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한국에서 필요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흐름에 남을 배려하는 삶에 대한 교육은 경쟁에 뒤쳐질 뿐이고 대학만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배우는 학생들은 경쟁에 뒤쳐져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삶이 두렵기 때문에 경쟁에 필요하지 않은 교육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게 됐다.

신자유주의는 분명히 장점을 갖고 있다. 제약 없는 경제의 활성화로 자본의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고, 경쟁을 통해 성취욕을 자극하여 생산의 기능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은 더 많은 자본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이득일 뿐이다. 이 책 부록에서 주경복이 든 예처럼 헤비급 선수와 라이트급 선수를 섞어 놓고 알아서 싸우라고 하면 그건 자유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자본의 자유이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어떤 정책이나 정당을 지지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 정당의 정책이 내게 이로운지를 따져보는 것일 텐데 지금 한국 국민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에서 이득을 보는 입장이 아닌데도 신자유주의를 선동하는 정당을 다수 지지한다. 신자유주의가 누구에게 이득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고 경제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책을 읽고 몇 가지 의문에 시달리고 있다.
왜 먹을 것은 생산하는 사람들이 먹지 못해 굶어 죽을까?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맨큐가 말한 경제학의 10대 원래는 과연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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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서평단 알림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코스키 지음, 차익종 옮김 / 르네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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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평단 당첨 도서]

책을 즐겨 읽고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명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의 신작 초판을 살 때 ‘혹시 이 책이 100년쯤 후에 엄청난 가격에 팔리지는 않을까?’라고 상상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저자 릭 게코스키가 대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희귀본 서적 수집과 거래를 하면서 겪은 이야기와 책 제목 그대로 특별한 이력을 가진 책들의 뒷이야기를 잘 엮어 익살스러우면서 진지하게 들려주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실제로 이 책은 BBC 제4라디오에서 방송한 연속 강연 ‘희귀한 책, 기막힌 사람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 한다.)

저자가 좋아한다는 20세기 현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책의 핵심 내용은 서문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초판본 수집가들이 찾아낸 20세기 중요 저서들의 내력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책의 내력뿐만 아니라 희귀본 거래업자의 내력도 함께 다루었다. 우리 희귀본 거래업자들은 위대한 책을 다루는 재미와 특권을 누리는 덕택에 얘깃거리가 많다. 희귀본 한 권이 손에 들어왔다가 최종적으로 누구한테 어떤 곡절로 돌아갔는지 , 그리고 사람들이 제일 흥미 있어 하는 부분, 즉 금액이 얼마까지 올라갔는지 등등”

총 20권의 책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단연 첫 번째를 장식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릭 게코스키와 소설과 그레이엄 그린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직접 그레이엄 그린에게 헌사를 써서 보낸 <롤리타> 초판본을 통해 만나는 부분은 그 둘의 대화와 상황을 낄낄 웃으며 볼 정도로 익살스럽게 표현했고, 저자도 언급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뒷이야기와 <롤리타>를 통해 1950년대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새삼 느낄 수 있게 하는 내용 전개도 흥미로웠다.

이외에도 유명한 작품들은 호기심을 유발하긴 했지만 책의 유명세에 비해 뒷이야기는 흥미롭다거나 재미있지 않았다. 언젠가 읽고 감동을 느꼈거나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책에 대한 뒷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면 그 책에 대한 이야기만 찾아서 봐도 좋고, 들어는 봤는데 볼 엄두가 나지 않던 책의 뒷이야기를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발췌독서가 가능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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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러 갑니다
가쿠타 미쓰요 지음, 송현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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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러 갑니다>는 일상에 자리한 증오와 살의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총 7개의 단편에 학창시절 선생님, 남편, 헤어진 남자친구, 딸, 바람피운 남편, 배신한 여자친구,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학창시절의 증오가 차례로 담겨 있다.

왜 단편인가?

각 단편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일상에서 함께 생활하고 그렇기 때문에 빈번히 부딪히는 존재다. 그리고 한 번쯤 살의까지는 아니라도 “정말 짜증난다”거나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감정을 느낀 적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이런 감정들에 ‘왜 이 소설은 단편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이 있다. 일상에 자리한 증오와 살의를 보여주기 위해선 일상의 여러 상황이 주제가 되어야하고, 그 상황이 독자에게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누구나 증오와 살의를 안고 살아간다’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인물(실생활과 마찬가지로)이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의적 결말

7개의 단편 모두 회의적인 결말을 맺고 있다. 결국 증오와 살의도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 감정 자체가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고 실행에 옮긴다 해도 달라지거나 해결되는 건 없다는 가쿠타 미쓰요의 시각이다. 이런 회의를 느끼는 순간 다시 자기에 대한 연민과 증오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도망가고 싶은 것은 개가 아니라 그 소심함이며 코딱지만 한 선량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에 버리면 될까? 산 속에? 공원에? 빌딩 지하보도에?”

결말을 확실히 맺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구조와 가쿠타 미쓰요 자신의 소설에 대한 시각을 서문이나 인사말에 남기지 않은 것도 회의적인 감정을 배가를 위한 것이 아닐까? 결말은 독자에게 남겨두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독자에게 묻는 ‘소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두 가지 아쉬운 점은 일상의 소소하고 독특한 재미를 살리지 못했고 문체가 싱겁다는 것.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글의 구조나 수사를 파고드는 재미는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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