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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나’가 40년 전, 그러니까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하게 넘겼고, 신발은 28호였으며,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을 때의 이야기다. 대개의 유년 시절이 그렇듯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부터 학교라는 더 큰 사회까지 혼자 자라지 않고 사회 속에서 자라며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의 부조리와 함께 성장한다. 아버지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사전에 말도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부모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형에게만 자전거를 사준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개를 묶어 놓지 않는 하르트라웁 박사도 세상의 부조리에 일조한다.
어린 가슴에도 그런 세상의 부조리를 겪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까. 아니다. 최초의 충격은 그 충격을 접할 수록 충격의 층위가 엷어지는 것이다. 어릴 수록, 최초의 충격일수록, 고통은 더했을 것이다.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알지만 존재감이 없고 보통 인간의 생활과 다른 생활을 하는 좀머 씨의 살기 위한 본능을 몰래 지켜보며 자신의 고통이 세상의 부조리가 한 낯 코딱지로 인해 봇물처럼 터졌음을 자각하고 다시 부조리의 세상에서 부조리를 잊고 살기로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좀머 씨에 대해서는 전쟁 직후 마을에 정착 했다거나, ‘나’가 좋아하는 여자아이 카롤리나 퀴켈만과의 하교길에서 보여주려고 한 나무가 전쟁 직후 어느 늙은 나치가 목을 매달고 죽은 나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에서 <좀머 씨 이야기>의 배경이 2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고 좀머 씨의 걷기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숲 속에 사방을 살피며(적을 찾듯) 빵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은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파울 보이머가 전쟁 중에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느낀 이질감과 비슷한 감정의 집착일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좀머 씨의 보이지 않아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깊이와 굴곡이 숙연한 기분과 연민을 느끼게 한다. 좀머 씨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었지만 좀머 씨도 한 때 세상의 부조리를 잊고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부조리에 대항할 수 없게 되자 항상 해왔던 대로 호수로 ‘걸어들어 가’ 자살을 하고 ‘나’는 어린 시절의 부조리를 좀머 씨처럼 잊고 청년으로 성장한다. 결국 세상의 부조리는 반드시 존재하지만 그걸 잊고 살아가거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좀머 씨에 대한 “밀폐 공포증 환자다.” “항상 경련을 하기 때문에 걷는다”같은 추측은 실제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삶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에 대한 소개를 살펴보면 그가 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추측과 소문이 난무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추측과 소문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큰 소리로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하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