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 Free - 자기를 찾아 떠나는 젊음의 세계방랑기
다카하시 아유무 글, 사진, 차수연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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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는 기본적으로 어떤 구조를 가져야할까. 여행기라는 장르는 논외로 두고 책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책이라는 매체는 독자를 배려하는 것이 기본이다. 책을 구입하는 데 돈을 지불하는 건 독자고, 읽는 것도 독자다. 적어도 책은 이런 기본 의식과 의무를 갖추어야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Love&Free》는 전혀 독자를 배려하고 있지 않다. 그저 여행 중 노트에 감상적으로 끼적거린 몇 줄을 전혀 인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은 사진과 어이없이 배열해 놓았다. 과연 이런 개인적인 끼적거림이 어떤 독자에게 어떻게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초등학생이 읽고 이런 제멋대로인 사람도 있으니 나도 내 주관을 갖고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 기대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인다. 일기장인데 전혀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은, 어떤 사유의 깊이도 느낄 수 없는 일기장을 읽는 것처럼 가볍고 어떤 울림이 없다. 저자의 제멋대로인 삶이 이 책의 전부라고 할 때 이 책은 저자 소개의 특이한 삶을 사는 그것 이외의 가치를 볼 수 없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책 《스위스 디자인 여행》, 《박훈규의 언더그라운드 여행기》, 《On The Road》, 《에코토이, 지구를 인터뷰하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과 비교할 때 책값이 아까워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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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당나귀] 서평단 알림
황금당나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매직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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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의 서사시와 만화가 이미 폭넓게 자리한 탓일까요.《황금당나귀》의 내용은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를 접한 사람들에겐 이 책의 과장된 광고만큼 별다른 재미를 주거나 깊은 사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꽤 유명하고 이 책의 광고에도 항상 등장하는 프쉬케와 쿠피도의 사랑도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시대의 서사시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접하기 전이나 가볍게 읽고 싶은 분에게는 마지 못해 추천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관련해서는 아폴로도로스(지음), 천병희(옮김)의《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와 오비디우스(지음), 천병희(옮김)의《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그리고 그리스 신화를 읽고 궁금한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면 장영란(지음)의《장영란의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참고로 더 쉽고 다른 만화에 비해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사토나카 마치코(지음). 최은석(옮김)의《만화 그리스 신화 1 》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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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조이담.박태원 지음 / 바람구두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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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목의 단어 선택에 있어 ‘함께’나 ‘같이’가 아니라 ‘더불어’를 사용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함께’나 ‘같이’라고 써야 할 어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럼에도 ‘더불어’에 의문을 품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이 책 2부에 자리한 박태원의 원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구보씨의 개인주의적이고 무지를 혐오하는 이기적인 모습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보씨에 대한 이야기의 뒤에 논의하기로 하고 단어에 대해 이야기 했으니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양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전해질 때 20세기 초 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상품이나 지명 그러니까 말에서 그 왜곡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가루삐스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 단어의 어감과 생김새만 봐도 단 번에 초라함이 느껴진다. 말이 한 번 건너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왜곡되는 것처럼 문화나 자본 상품도 다른 나라를 거치면 이른바 짬뽕이 되어 왜곡되는 것 같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도 서양의 각종 문화가 왜곡되고 뒤섞인 풍경과 문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인의 삶이 역사적으로 왜곡되어 ‘키치’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각설하고 이 서평에서는 20세기 초 한국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의문과 박태원 소설의 의의 그리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참고로 구보씨(박태원)이란 인물에 대해 살펴보고 책의 형식 전반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1. 역사의 의의+박태원의 소설 의의

한 놀란의 소설 《소녀의 눈동자 1939》의 한국어판 표지에는 “기억하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어제, 대학로에서 가진 술자리에 내가 던진 화두는 “인간들한테 왜 근본적으로 능력의 차이가 있는 걸까?”였고 술자리에 있던 동갑내기 친구는 “《핀치의 부리》에서 배웠잖아. 인간의 능력이 다양하게 발전할 수록 인간이 자연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지. 배웠는데 왜 그래.” 이 말을 듣던 다른 친구가 “그럼 너무 잔인한데요.” 그래. 나도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종을 번식시키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우습고 허무하다. 인간을 자연세계의 다른 종과 구별하는 것은 이성인데 이성 또한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는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오히려 인간이 특별하지 않고 대자연의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분명히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경험했다. 인간이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데에는 진화론과 창조론처럼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고 싶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대사건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당한 이유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왜 20세기 초의 건축과 길 그리고 주목받지 못한 주변인을 볼 수 있는 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일까. 주목받지 못한 인간 사회의 주변인을 소재로 삼은 소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내용과 핵심 주제로 봤을 때 구보씨와 그의 삶을 둘러싼 고뇌에 집중하지 않고 그 주변에 집중하는 건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현상에 대해 노형석은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의 서문에 “안타깝게도 20세기 초 조선 사람들이 다기한 면모의 근대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며 생존했는지를 담은 체험의 기록들은 풍족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개화기부터 일제시대, 해방공간, 심지어 1950년대까지의 일상사 사료와 사진 등은 상당수가 전쟁과 1950~60년대 혼란기에 사라지거나 일본 등으로 흘러나갔다. 학계는 왜 근대기 생활사료 찾기에 열심이지 않았을까. 지난 날 우리의 일상사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짓눌린 패배자의 역사로 비친 탓은 아니었을까. 당대 장삼이사들은 땀내 묻은 일상을 민족해방투쟁사의 이면에 묻어놓았던 데는 근대 콤플렉스도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라는 잃었지만 민족정신은 살아 있었다는 ‘자존사관’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요는 자료가 그만큼 미비하다는 것이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같은 건축과 그다지 관련 없는 소설에서라도 20세기 초 한국의 건축에 대해 뽑아내지 않으면 어디서도 적합한 기록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2. 구보씨에 대해

구보씨는 20세기 초 지식인 청년의 한 단면을 상징한다. 당연하지만 결코 20세기 초 지식인 청년 모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없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구보씨 그러니까 구보씨의 현실형태인 박태원을 모더니스트 작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볼 때에도 박태원 또한 시대를 초월하지 못하고 당시 신분 계급 사회의 잔재와 키치한 문화의 틀 밖에서 사유하지 못하고 시대의 보편성에 갇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의 무지 혐오, 유대의 그리움과 갈등, 내적 고민의 정도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미래학자가 현실을 기반으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일이고, 말 그대로 초월이 아닌 예측일 뿐이다. 예측은 초월과 다르다. 예측은 당시에 볼 수 있지만 초월은 당시에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연성을 띄기도 한다. 이미 미래가 된 시점에서 볼 때의 미래 사회와 맞아 떨어지는 접점이 있을 때 그것을 초월이라 할 수 있다. 그 초월은 시대의 사건이라는 예측하지 못한 우연성도 갖지만 작가의 시대적 보편성을 깨는 시각도 큰 몫을 한다. 그렇게 본다면 한 가지 예로 역사학자나 역사 만화가 또한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 인식의 시대적 보편성을 넘어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그것으로 어떤 역사적 가치를 찾아내고 보여준다면 그것 또한 시대를 초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박태원은 시대를 초월했다기보다 박태원이 살던 당대를 보여준 것뿐이라 할 수 있다.

3. 이 책의 형식 전반과 신 박태원 전에 대해

이 책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거닐다》는 1부 「경성 만보객-신 박태원 전」과 2부 박태원의 원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나뉜다. 1부는 저자 조이담이 역사적 사실과 자료, 2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참고로 이야기의 전개를 다듬은 실명소설이고, 2부는 말 그대로 박태원의 원작 소설이다. 1부는 명쾌하고 2부는 씁쓸하다. 소설과 현실의 명확한 차이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2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20세기 초 경성의 갖가지 문화에 대한 저자 조이담의 자료집에서 모은 자료가 흩어져 있는데 이것은 박태원의 소설 핵심 내용과 자꾸 충돌해 소설에 집중하기 힘들게 만든다. 오히려 이러 자료는 각주를 붙여 책의 맨 뒤쪽으로 몰아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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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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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덕이 본래 인간 본성의 자유의지에 따른 내적 강제라고 할 때 도덕교육은 교육 대상자의 마음에서 자유의지를 끌어내는 교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 김상봉이 보기에 한국의 도덕교육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끌어내 보편적인 선에 도달하는 것보다 지배와 권력 유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고 현재까지 도덕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의식을 잘못된 도덕적 사유의 주입을 통해 왜곡시키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어떻게 이런 도덕적이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 도덕교육의 현상 분석과 대안 제시를 통해 철학자의 입장에서 꼼꼼하고 도덕적으로 현 도덕교육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적 파시즘이란 표현으로 지식인들은 어떤 획일적이고 광란적이 현상에 대한 평가를 하며 파시즘이란 개념을 사용하는데 <도덕교육의 파시즘>에서 저자는 중,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의 국가 파시즘적 요소들을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고, 그것들을 통해 왜 책의 제목에 파시즘이라는 무시무시한 개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저자는 도덕의 당위에 대해 자유의지로 왜 당위인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도덕교육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당위를 주장하면서 그 까닭으로 한국 도덕교육의 수준이 저급하고 그 저급함은 현장에서 도덕 교사들이 도덕교육을 수행할 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도덕 교과서 집필자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 적고 있다. 이정도가 <도덕교육의 파시즘>의 개괄이다. 나는 이 서평에서 저자의 도덕교육에 대한 주장에 몇 가지 전제가 있다는 것에 집중해 그 전제의 당위성을 생각해보고 내가 겪고 있는 한국인의 의식과 경제, 정치적 상황을 앞으로 한국의 도덕교육은 진보할 수 있는지에 대입해 생각해 볼 것이다.


2.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도덕교육에 있어 또 하나의 당위이자 전제는 인간은 본래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전제에 물음을 던지고 왜 당위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도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 당위성을 인정하더라도 당위가 당위로 자리매김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난다는 전제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자유가 고통스럽고 복종과 굴복이 편안하다면 인간은 후천적으로라도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기는 한 걸까? 간단한 문제지만 한 번이라도 도덕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저자도 언급했다시피 복종에 의한 편안함은 그 편안함이 내가 복종하는 이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과 망각적 편안함이라는 역설을 갖는다. 언제라도 사라질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 편안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현재 한국인은 도덕교육의 왜곡과 자본의 요구로 미리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에 진정 불안함의 실체를 느낄 수 없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면 10년 넘게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로 키워진 사람이 노조 같은 기본 단체도 허용하지 않고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몰상식한 기업 삼성에 취직하지 못해 안달 난 것은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본래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실현 하는 존재라는 것이 타율적인 편안함의 예를 통해 드러났다면 자유의지를 갖기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명령도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그 방향만을 제시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도덕교육이다.


3.
“그러나 국가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우리를 성가시게 만드는 국가를 만들 이유도, 그런 국가의 지배를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삶에는 개인이 혼자서는 실현할 수 없는 어떤 일이나 가치들이 있다.” <도덕교육의 파시즘> 49페이지

저자는 개인의 국가에 대한 의무가 존재한다면 국가도 개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데 이 문장에서 인간은 국가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음을 주장의 전제로 하고 있다. 과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며 국가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먼저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원인으로 인간의 욕구가 등장한다.(이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구한다는 또 하나의 전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욕구할 때 자연적 한계로 인해 욕구들은 서로 충돌한다. 이런 충돌을 제어하기 위해 도덕이 탄생하고 국가가 탄생한다. 물론 국가는 충돌의 제어를 떠나 인간생활의 필요에 의한 집단이지만 국가에 법이 존재하는 한 이것은 도덕의 외적 강제이기 때문에 국가의 존재 이유로 욕구들의 제어를 들 수 있는 것이고 그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인간은 서로 합의와 결론을 도출해야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정치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이다. 인간 생활의 필요에 의한 존재로서의 국가는 간단한 예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혼자서 겨울이 오기 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여러 사람과 힘을 합쳐야 한다.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현실적으로 허무하고 불평등하지만 집단을 이룰 수 있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이로써 올바른 도덕교육을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 본능의 자유의지와 국가의 필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도덕은 탄생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전제할 때 도덕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도덕의 방법론 또한 도덕적이어야 한다.


4.
그럼 지금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잘 먹고 싶다는 막연함으로 경제 대통령을 표방하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로 이명박을 뽑았다고 하긴 어렵다. 그것은 논외로 하고 이 시점에서 한국의 경제 또한 저자가 주장하는 왜곡되지 않은 도덕의 원래 본성을 가르치는 도덕교육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 시장 무한 경제 체제인 신자유주의는 FTA를 통해 본격화 될 조짐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통해 일자리가 생기고 나는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건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경제 수준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단초다. 한 마디로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고 불릴 수 있는 기반을 가진 사람들이 그 기반을 더 단단히 할 수 있는 게 이른바 신자유주의다. 국가가 괴물이라고 했을 때 자본은 그 국가를 집어 삼킬 수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자본이 증식하고 불평등이 가속화되면 공동체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인의 이런 의식을 볼 때 경제체제가 한 순간에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여기서 필요한 건 도덕교육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기득권 세력에게 도덕적 사유를 기대할 수 없다면 앞으로 자라나 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할 학생들에게 도덕적으로 사유하는 자유의지를 가르침으로써 서서히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교육체제 또한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는 한국인의 과제로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다.


5.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현행 도덕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체를 요구하는 저자의 핵심 문제의식은 왜곡된 도덕교육으로 한국인의 관습에 왜곡이 생겼고, 그 왜곡은 잇따른 사회문제의 원인과 그것에 대한 무관심으로 드러나고 있음이다. 주체적인 의지나 실천이 없고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진 사회다. 돈 많이 벌어 잘 쓰고 대우받으며 한 평생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두가 잘 벌고 대우받을 수 있는 게 우리 사회인가? 이런 상황이 도덕교육을 혁신하는 것으로 모두 해결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 도덕교육의 왜곡을 수정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실행하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주체적으로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길러주자는 것이다.


**
1981년에 전두환 정권에 의해 신설된 국민윤리교육과의 도덕교육 독점은 1983년에 태어나 1990년대부터 근대식 학교에서 교육받은 내게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도덕교육의 파시즘>을 통해 내가 받은 도덕교육의 잔재가 내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펴보고 자기반성과 타인과의 만남, 대화를 통해 도덕적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내게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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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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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구의 모든 생물은 매일 매시간 자연선택에 노출되어 있으며, 한 세대 한 세대를 거치면서 진화한다(그랜트 부부는 갈라파고스핀치를 통해 자연선택, 변이, 진화의 문제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다. 핵심 주제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반드시 진화, 자연선택, 성 선택, 변이, 생물의 융합, 분열 같은 낱말에 대한 개념을 각론으로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2. 자연선택설이 다른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화론과 창조론이 존재하고 연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물음이 남는다.


3. 일반 명칭과 학명이 엇갈려 내용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됐다.
번역에 비문이 많다. 예를 들어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는다.’ 같은 끝맺음 문장이 많다.
이미지로 설명하거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사용한 이미지는 빈약한 것들뿐이다. 이해를 돕기 보다는 볼거리 정도의 이미지만 들어있다.

4.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토대로 진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진화론을 이해하는 독서의 시작으로 추천할 만 하지만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는 책 안에 없고 개인의 몫이라는 점이 단점이다.

5. 참고 정리 : http://oosung.egloos.com/143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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