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조이담.박태원 지음 / 바람구두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제목의 단어 선택에 있어 ‘함께’나 ‘같이’가 아니라 ‘더불어’를 사용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함께’나 ‘같이’라고 써야 할 어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럼에도 ‘더불어’에 의문을 품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이 책 2부에 자리한 박태원의 원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구보씨의 개인주의적이고 무지를 혐오하는 이기적인 모습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보씨에 대한 이야기의 뒤에 논의하기로 하고 단어에 대해 이야기 했으니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양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전해질 때 20세기 초 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상품이나 지명 그러니까 말에서 그 왜곡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가루삐스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 단어의 어감과 생김새만 봐도 단 번에 초라함이 느껴진다. 말이 한 번 건너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왜곡되는 것처럼 문화나 자본 상품도 다른 나라를 거치면 이른바 짬뽕이 되어 왜곡되는 것 같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도 서양의 각종 문화가 왜곡되고 뒤섞인 풍경과 문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인의 삶이 역사적으로 왜곡되어 ‘키치’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각설하고 이 서평에서는 20세기 초 한국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의문과 박태원 소설의 의의 그리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참고로 구보씨(박태원)이란 인물에 대해 살펴보고 책의 형식 전반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1. 역사의 의의+박태원의 소설 의의
한 놀란의 소설 《소녀의 눈동자 1939》의 한국어판 표지에는 “기억하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어제, 대학로에서 가진 술자리에 내가 던진 화두는 “인간들한테 왜 근본적으로 능력의 차이가 있는 걸까?”였고 술자리에 있던 동갑내기 친구는 “《핀치의 부리》에서 배웠잖아. 인간의 능력이 다양하게 발전할 수록 인간이 자연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지. 배웠는데 왜 그래.” 이 말을 듣던 다른 친구가 “그럼 너무 잔인한데요.” 그래. 나도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종을 번식시키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우습고 허무하다. 인간을 자연세계의 다른 종과 구별하는 것은 이성인데 이성 또한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는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오히려 인간이 특별하지 않고 대자연의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분명히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경험했다. 인간이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데에는 진화론과 창조론처럼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고 싶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대사건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당한 이유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왜 20세기 초의 건축과 길 그리고 주목받지 못한 주변인을 볼 수 있는 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일까. 주목받지 못한 인간 사회의 주변인을 소재로 삼은 소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내용과 핵심 주제로 봤을 때 구보씨와 그의 삶을 둘러싼 고뇌에 집중하지 않고 그 주변에 집중하는 건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현상에 대해 노형석은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의 서문에 “안타깝게도 20세기 초 조선 사람들이 다기한 면모의 근대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며 생존했는지를 담은 체험의 기록들은 풍족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개화기부터 일제시대, 해방공간, 심지어 1950년대까지의 일상사 사료와 사진 등은 상당수가 전쟁과 1950~60년대 혼란기에 사라지거나 일본 등으로 흘러나갔다. 학계는 왜 근대기 생활사료 찾기에 열심이지 않았을까. 지난 날 우리의 일상사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짓눌린 패배자의 역사로 비친 탓은 아니었을까. 당대 장삼이사들은 땀내 묻은 일상을 민족해방투쟁사의 이면에 묻어놓았던 데는 근대 콤플렉스도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라는 잃었지만 민족정신은 살아 있었다는 ‘자존사관’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요는 자료가 그만큼 미비하다는 것이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같은 건축과 그다지 관련 없는 소설에서라도 20세기 초 한국의 건축에 대해 뽑아내지 않으면 어디서도 적합한 기록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2. 구보씨에 대해
구보씨는 20세기 초 지식인 청년의 한 단면을 상징한다. 당연하지만 결코 20세기 초 지식인 청년 모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없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구보씨 그러니까 구보씨의 현실형태인 박태원을 모더니스트 작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볼 때에도 박태원 또한 시대를 초월하지 못하고 당시 신분 계급 사회의 잔재와 키치한 문화의 틀 밖에서 사유하지 못하고 시대의 보편성에 갇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의 무지 혐오, 유대의 그리움과 갈등, 내적 고민의 정도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미래학자가 현실을 기반으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일이고, 말 그대로 초월이 아닌 예측일 뿐이다. 예측은 초월과 다르다. 예측은 당시에 볼 수 있지만 초월은 당시에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연성을 띄기도 한다. 이미 미래가 된 시점에서 볼 때의 미래 사회와 맞아 떨어지는 접점이 있을 때 그것을 초월이라 할 수 있다. 그 초월은 시대의 사건이라는 예측하지 못한 우연성도 갖지만 작가의 시대적 보편성을 깨는 시각도 큰 몫을 한다. 그렇게 본다면 한 가지 예로 역사학자나 역사 만화가 또한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 인식의 시대적 보편성을 넘어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그것으로 어떤 역사적 가치를 찾아내고 보여준다면 그것 또한 시대를 초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박태원은 시대를 초월했다기보다 박태원이 살던 당대를 보여준 것뿐이라 할 수 있다.
3. 이 책의 형식 전반과 신 박태원 전에 대해
이 책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거닐다》는 1부 「경성 만보객-신 박태원 전」과 2부 박태원의 원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나뉜다. 1부는 저자 조이담이 역사적 사실과 자료, 2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참고로 이야기의 전개를 다듬은 실명소설이고, 2부는 말 그대로 박태원의 원작 소설이다. 1부는 명쾌하고 2부는 씁쓸하다. 소설과 현실의 명확한 차이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2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20세기 초 경성의 갖가지 문화에 대한 저자 조이담의 자료집에서 모은 자료가 흩어져 있는데 이것은 박태원의 소설 핵심 내용과 자꾸 충돌해 소설에 집중하기 힘들게 만든다. 오히려 이러 자료는 각주를 붙여 책의 맨 뒤쪽으로 몰아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