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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ㅣ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1.
도덕이 본래 인간 본성의 자유의지에 따른 내적 강제라고 할 때 도덕교육은 교육 대상자의 마음에서 자유의지를 끌어내는 교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 김상봉이 보기에 한국의 도덕교육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끌어내 보편적인 선에 도달하는 것보다 지배와 권력 유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고 현재까지 도덕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의식을 잘못된 도덕적 사유의 주입을 통해 왜곡시키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어떻게 이런 도덕적이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 도덕교육의 현상 분석과 대안 제시를 통해 철학자의 입장에서 꼼꼼하고 도덕적으로 현 도덕교육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적 파시즘이란 표현으로 지식인들은 어떤 획일적이고 광란적이 현상에 대한 평가를 하며 파시즘이란 개념을 사용하는데 <도덕교육의 파시즘>에서 저자는 중,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의 국가 파시즘적 요소들을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고, 그것들을 통해 왜 책의 제목에 파시즘이라는 무시무시한 개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저자는 도덕의 당위에 대해 자유의지로 왜 당위인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도덕교육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당위를 주장하면서 그 까닭으로 한국 도덕교육의 수준이 저급하고 그 저급함은 현장에서 도덕 교사들이 도덕교육을 수행할 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도덕 교과서 집필자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 적고 있다. 이정도가 <도덕교육의 파시즘>의 개괄이다. 나는 이 서평에서 저자의 도덕교육에 대한 주장에 몇 가지 전제가 있다는 것에 집중해 그 전제의 당위성을 생각해보고 내가 겪고 있는 한국인의 의식과 경제, 정치적 상황을 앞으로 한국의 도덕교육은 진보할 수 있는지에 대입해 생각해 볼 것이다.
2.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도덕교육에 있어 또 하나의 당위이자 전제는 인간은 본래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전제에 물음을 던지고 왜 당위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도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 당위성을 인정하더라도 당위가 당위로 자리매김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난다는 전제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자유가 고통스럽고 복종과 굴복이 편안하다면 인간은 후천적으로라도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기는 한 걸까? 간단한 문제지만 한 번이라도 도덕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저자도 언급했다시피 복종에 의한 편안함은 그 편안함이 내가 복종하는 이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과 망각적 편안함이라는 역설을 갖는다. 언제라도 사라질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 편안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현재 한국인은 도덕교육의 왜곡과 자본의 요구로 미리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에 진정 불안함의 실체를 느낄 수 없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면 10년 넘게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로 키워진 사람이 노조 같은 기본 단체도 허용하지 않고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몰상식한 기업 삼성에 취직하지 못해 안달 난 것은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본래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실현 하는 존재라는 것이 타율적인 편안함의 예를 통해 드러났다면 자유의지를 갖기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명령도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그 방향만을 제시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도덕교육이다.
3.
“그러나 국가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우리를 성가시게 만드는 국가를 만들 이유도, 그런 국가의 지배를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삶에는 개인이 혼자서는 실현할 수 없는 어떤 일이나 가치들이 있다.” <도덕교육의 파시즘> 49페이지
저자는 개인의 국가에 대한 의무가 존재한다면 국가도 개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데 이 문장에서 인간은 국가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음을 주장의 전제로 하고 있다. 과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며 국가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먼저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원인으로 인간의 욕구가 등장한다.(이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구한다는 또 하나의 전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욕구할 때 자연적 한계로 인해 욕구들은 서로 충돌한다. 이런 충돌을 제어하기 위해 도덕이 탄생하고 국가가 탄생한다. 물론 국가는 충돌의 제어를 떠나 인간생활의 필요에 의한 집단이지만 국가에 법이 존재하는 한 이것은 도덕의 외적 강제이기 때문에 국가의 존재 이유로 욕구들의 제어를 들 수 있는 것이고 그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인간은 서로 합의와 결론을 도출해야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정치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이다. 인간 생활의 필요에 의한 존재로서의 국가는 간단한 예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혼자서 겨울이 오기 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여러 사람과 힘을 합쳐야 한다.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현실적으로 허무하고 불평등하지만 집단을 이룰 수 있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이로써 올바른 도덕교육을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 본능의 자유의지와 국가의 필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도덕은 탄생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전제할 때 도덕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도덕의 방법론 또한 도덕적이어야 한다.
4.
그럼 지금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잘 먹고 싶다는 막연함으로 경제 대통령을 표방하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로 이명박을 뽑았다고 하긴 어렵다. 그것은 논외로 하고 이 시점에서 한국의 경제 또한 저자가 주장하는 왜곡되지 않은 도덕의 원래 본성을 가르치는 도덕교육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 시장 무한 경제 체제인 신자유주의는 FTA를 통해 본격화 될 조짐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통해 일자리가 생기고 나는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건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경제 수준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단초다. 한 마디로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고 불릴 수 있는 기반을 가진 사람들이 그 기반을 더 단단히 할 수 있는 게 이른바 신자유주의다. 국가가 괴물이라고 했을 때 자본은 그 국가를 집어 삼킬 수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자본이 증식하고 불평등이 가속화되면 공동체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인의 이런 의식을 볼 때 경제체제가 한 순간에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여기서 필요한 건 도덕교육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기득권 세력에게 도덕적 사유를 기대할 수 없다면 앞으로 자라나 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할 학생들에게 도덕적으로 사유하는 자유의지를 가르침으로써 서서히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교육체제 또한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는 한국인의 과제로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다.
5.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현행 도덕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체를 요구하는 저자의 핵심 문제의식은 왜곡된 도덕교육으로 한국인의 관습에 왜곡이 생겼고, 그 왜곡은 잇따른 사회문제의 원인과 그것에 대한 무관심으로 드러나고 있음이다. 주체적인 의지나 실천이 없고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진 사회다. 돈 많이 벌어 잘 쓰고 대우받으며 한 평생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두가 잘 벌고 대우받을 수 있는 게 우리 사회인가? 이런 상황이 도덕교육을 혁신하는 것으로 모두 해결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 도덕교육의 왜곡을 수정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실행하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주체적으로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길러주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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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전두환 정권에 의해 신설된 국민윤리교육과의 도덕교육 독점은 1983년에 태어나 1990년대부터 근대식 학교에서 교육받은 내게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도덕교육의 파시즘>을 통해 내가 받은 도덕교육의 잔재가 내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펴보고 자기반성과 타인과의 만남, 대화를 통해 도덕적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내게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