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역학에서는 다른 무엇인가에 부딪히지 않는 한 그무엇도 확실한 자기 거리를 갖지 못합니다. 어떤 상호 작용이있은 후 비행을 하다가 다음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위해 무엇인가에 부딪힌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적 함수, 즉 실재공간이 아닌 추상적인 수학 공간에 존재하는 함수가 사용됩니다.  - P35

양자역학과 입자이론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불안정하지만 끊임없이 나타나는 물질들이 떼를 지어 있는 곳, 하나가 나타나면 다른 것은 사라지는 일이 꾸준히 반복되는 곳임을 배웠습니다. 1960년대 히피들의 세상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세상, 사물이 주인인 세상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 사이에서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로 인해 좌우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 P62

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반대로, 변화가 편재하지만 그 기본적인 과정들이 평범한 시간[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될수는 없습니다. 아주 작은 규모의 공간양자들 속에서 자연은 단 한 명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단 하나의 시간의 흐름에 맞춰 리듬을 타 춤을 추지는 않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춤은 이웃해 있는 것들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리듬에 따라 진행됩니다. 시간의 흐름은 세상 안에 있고, 그 세상 안에서 그리고 양자들 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이 양자들 간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곧 이 세상이고 그 자체가 시간의 원천이지요. - P79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열이 있을 때만 발생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현상은 열이 뜨거운 곳에서차가운 곳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런데 왜 열은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만 이동하고 그 반대로는 이동하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찾아냈는데, 의외로 아주 간단합니다. 그저 경우에 따라 다른것이지요. 사실 볼츠만이 내놓은 개념은 확률이 적용되었을뿐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열이 어떤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이동하기는 하는데, 이것은 그저 확률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 P93

혼란에 대한 해결책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할 때 정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들이 우리 스스로의 내면과 뇌가제한하는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외부의 그 무엇인가에 의해 강요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롭다는 것이우리의 행동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제한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우리 뇌 안에서 작용하는자연의 법칙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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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K를 국가에 가두지 않고, 좀 더 열린 상태에서 새로운 인자를 수용하려는 마음을갖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의 사회 변화에 공명함으로써 새로운 K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해야 하는 일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을 갖추는 일입니다. 박제하듯 문화재처럼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새롭게 합의되고 확장되며 만들어지는 과정을 일상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기 - P40

 최근에 귀납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귀납이 바로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즉 기계 학습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기계학습은 발생하는 현상을 기반으로 패턴을 바라보고 규칙을탐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가 빅데이터와 AI덕분입니다. 다양성 시대에 맞는 인간의 태세를 정해야 합니다. ‘오리너구리‘를 수용하는 것뿐 아니라 본인이 ‘오리너구리‘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계를 버리고, 감각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 P64

넷플릭스 출신인 도반 L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L이 본 넷플릭스는 일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매니저들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끊임없이 ‘이게 진짜 필요한 일이야? 이게 정말 해야 되는 일이야?‘를 까다롭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시스템 자체가 관료화되어 있으면 의도적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본질에서 벗어난 프로세스에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 P172

건전한 부모 자식 관계는 무리한 요구는 거절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무엇보다 거절당한 후 상처받지 않는
‘상호 신뢰‘와 ‘막역함‘ 또한 이러한 관계의 선행조건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도를 자유롭게 누려볼 수 있을 정도로 가족의 신뢰를 얻고, 기후가 변화무쌍한 바깥의 삶을 누려볼 수있었기에 이슬아는 부모에게 관계의 재정립을 제안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가장‘의 탄생 설화는 그 부모의
‘억압 없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수 있습니다. - P220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서로 깔끔하게 주고받는 것입니다.
또는 주고받는 게 없는 관계이거나 말입니다. 받는 걸 당연히 여기거나 ‘나는 적어도 이만큼은 받아야 하는데‘라는 자세는 위험합니다. 어린아이도 용돈을 받으면 고마워할 줄 압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움직이는 일종의 ‘염치‘
라는 것입니다. - P236

 60세가 넘으면 귀가 순해지는 이순이라는데, 귀가 순해진 게 아니라 더 까탈스러워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약한 부분‘을 공유해야 ‘관계‘가 생기는데,
그 연습의 장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약점을 노출하면 무시당하고 손해보았던 상처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P258

륭한이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의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다들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내 존재의 의미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면충분하다‘라고 말입니다. - P261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소중하기에‘ 내 소중한 삶을 유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관계 속책무는 자신이 지켜나가야 할 ‘내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누군가를 부양하기 위한 도구로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양의 의무는 ‘내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일 뿐이지 그것이 ‘나의 모든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 P263

파키스탄 사람과 결혼한 도반 L의 경우처럼 핵개인들은
‘타자‘를 맞이할 때에 그 태도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들은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이타자가 될 수 있음을 겁내지 않고, 새로운 타자를 만났을 때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결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않습니다. 다양성이 생태계의 희망입니다. - P272

세계의 누구도 하지 않은 고민을 계속하면 적어도 그누구보다 앞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맨 앞에있다면, 먼저 최대한 많이 고민해 본 것이라면, 그때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오는 것은 산의 정상에 오른 뒤에야 산의 높이를 나타내는 숫자가 목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밖으로부터의 인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고‘라는 상댓값이 아니라, 가장 잎에 선 자가 맛보는 ‘최선‘이라는 절댓값입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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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비가 차분하게 공을 돌리는 영상을 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 걸까? 삶의 바깥에서만 볼수 있는 장면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은 나를일상으로부터 분리해줄 것이고, 비로소 한 걸음 뒤에서 나를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뒤로 여행을 몇 번 더 했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았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이 여행이 끝나면 정답을 찾을 수있을까? 종착지에 원하는 모양이 아닌 내가 서 있을지도모른다. 여행의 미묘한 매력도 거기에 있다고 느낀다. 기대하지 못한 것들을 마주하는 일. 위기의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주는 긴박감. 벼랑끝에 몰려야만 드러나는 가장 나다운 행동들. 어쩌면 나는 나를 관찰하기 위해 배낭을 다시 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P57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규칙에 균열을 내보고 싶었던 거다. 틈을 벌리고 그 속에 들어가 구경한다. 내가 너의 곁에 있고 싶어서 지키고 있는.
언의 약속은 무엇이었나. 혹은 감추고 있는 본성은 어떤 것이었나. 때로 스스로 낸 균열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곤 한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서 버려야 했던 행동이나말, 감정이 쌓여 무겁게 삶을 짓누를 때 배낭을 싸는 이유다. - P106

"이제 돌아서면 나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 말아요. 모 두 내가 자처한 일이에요. 대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잘해주세요. 공항에서 지내는 동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보세요. 세상은 알아서 돌아갈 테지만, 그 안에서 변하는 건 늙어가고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들뿐이니까요. 당신은 후회하지 않기를바라요. 신이 늘 그대와 함께하기를." - P227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출국장을 지나며 작은 인생을 살기로 마음 먹었다. 선택이란 건 오묘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 같지만,
주변 환경이나 시대의 흐름에 영향 받기 마련이다. 온전한의지와 선택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단지그 순간에 최선의 선택을 고려할 뿐이다. 그러니 언젠가 삶을 돌아보며 나에게 물을 때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때 그래야만 했나?
그래야만 했다. - P230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일은 이곳에 올라오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은 잊을 수 있지만, 그리움은차곡차곡 쌓인다. 언덕에서 내려오며 무언가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봐야 몇 개의 문장과 단어로 하루를 쉽게 함축해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늘너머에 있는, 시선이 닿지 않을 곳을 평생 바라봐야 할 운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바라봐야 할 하늘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더 가까운 그리움이 가장 멀리 있는 그리움부터 잡아먹을 테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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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하라 씨, 당신은 지금 ‘어딘가로 가고 싶어하고 있어요. 지금 이곳‘에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이곳‘을 떠날수 없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상처를 안고 사는 거죠. 다리가 아프면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 데도 안 보내려고 안 가도 된다고, 뇌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 P167

아무리 소중해도 어차피 사라지고 없는 것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어째서 지금 내게 없는지를 원망하는 것과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제 놓아버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와 누군가를 원망해도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곳에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기때문이다. - P179

"이번 일로 깨달았지요.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걸 내가 노인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손자 놈이 다 커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때까지는 팔팔하게 살아 있을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맥없이 쓰러질줄은 전혀 몰랐다오." - P191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삶이라는 여행은, 가족이라는 여행은, 영원하다.
비록 잡은 손을 놓고 작별을 고하더라도 우리들은 분명 같은 하늘을 여행하는 여행자, 한 무리의 물고기인 것이다. 눈을 감는 날, 나의 눈은 아이들의 눈을 통해 같은 시선으로 지평선에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볼 것이기에 - P206

마지막 순간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찾아온다. 이 소설-그 마지막 순간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언젠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세상에 사는 모든 이를 위한, 평범한속에 반짝이는 순간을 그린 이야기였다.
- P208

고양이잖아요. 어느 날 사라지고 없더라고요. 저한테 츠키하라 잇세이는 그 길고양이였어요. 가끔 겹쳐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잇세이가 그만두고서야 생각했어요. 먼저 말할걸 그랬구나, 하고요. 제가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말을 걸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고요."
후회는 먼저 오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다며 츠카모토가 웃었다.
"먼저 말을 걸었어야 했다………" - P214

아마 자신도 누군가가 지켜주길 바랐던 것 같다. 커다랗고 따스한 손을 가진 누군가가. 이젠 괜찮아, 내가 지켜줄 테니 울지 마, 그렇게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주변에는 그런 ‘누군가‘도 ‘영웅‘도 없었다. 잇세이도 고양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이제 괜찮아." - P237

가족과 촬영 현장 식구들에게 속으로는 늘 고마워하고 있었어요. 모두를 사랑했고 신뢰했거든요. 혼자 각본을 쓰면서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릴 정도로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표현할 줄 몰랐어요 아니, 그냥 게을렀던 거예요. 누군가를 위해 말을 하는, 자신의 수고와 시간을 아끼고있었던 거예요."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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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굴에서 꺼내줄게.‘ 옛날에 이런 말을 한 친구가 있었다. 누가 봐도 ‘너를 위해주고 있어‘라는불편한 말투. 선량한 친구를 자처했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내줄주먹만 한 자리조차 없는 정민에게는 곁을 내놓으라는 협박과도 같았다.
"그런데 동굴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죠?"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 정민은 여자에게서 이유 모를안전함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으로는 여전히도자기를 감싸 쥔 채로, - P20

"매번 같은 시간에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 날씨와 계절에 따라 돌봐야 할 기물이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배우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요.  - P115

중심 잡기라는 건, 어쩌면 가장자리부터 살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정민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쉽게손을 놓았고, 쉽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말 한마디에도 토라졌으며 깊은 굴속에서 나오지 않았고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했다. 타인에게 내어줄 주먹만 한 공간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촘촘히 걸어놓은 외딴 전시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시선을 받지도 못하고 팔리지도 않는 마음들은 정민의 전시실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 P130

그런데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맥락 없는 사건의 연장선과 같았다. 마치 점묘법으로 전혀 다른 색들을 마구잡이로 찍어냈지만, 작업을 다 마치고 열 발짝 뒤로 물러서 작품을 봤을때 하나의 고즈넉한 풍경이 나오는 것과 같았다. 때로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이 불가항력적인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원인과 결과로 사이좋게 짝을 이뤄 그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낙관‘과 ‘글‘처럼, - P178

기식은 자기가 가진 비슷한 무게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골롤히 생각했다. 상실세스푼과 죄책감 두스푼, 막막함 한꼬집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지긋지긋함 반 컵도. 이런 것들이 잘 버무려져 씹을수록 텁텁한 이야기가 기식에게도 있었다. - P182

그저 두려웠던 것이다. 난독증이 나으면, 다시 그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민은 자신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지극히 정상이 되는 것도 두려웠다. 병을붙들고 있는 것은 아직 조금 더 쉬어도 된다는 허가증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민은 ‘쉼‘에 대해 어떠한 허락도 필요치않았다. 언제까지 쉬고 언제부터 일어설지는 자신이 정할 일이었다. 자신의 속도를 헤아려 스스로 휴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야말로 사람은 진정 성숙해지는 걸지도 몰랐다. - P186

"저도 제가 선택하고 싶어요. 무엇이 됐든요."
준의 시선이 점점 땅으로 향했다.
"내가 남들보다 길게 공부하고 헤매면서 깨달은 게 뭔 줄 알아? 길은 절대 한 번의 선택으로 좁혀지지 않는다는 거야. 지금의 입시는 어린 나이에 벌써 길을 확정 지으라는 게 아니야. 오히려 길을 넓혀 주는 시작일 수 있어. 넌 앞으로 더 많은 선택을 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의 선택을 섣불리 판단하지 마.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만 한다면 네가 원하는 샛길이 분명 나타날 거야. - P198

"그건 루저들의 자기합리화 아닌가."
지혜가 자조했다.
"자기합리화라니! 내 경우만 봐도 그래. 나는 지금의 자리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적당히‘ 하기로 했어. 주변의 소중한 사람과 나 자신을 챙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바쁜 직장에서 일하고적당히 벌고, 적당히 즐기고………. 이런 날 보고 남들은 욕심없다고 해. 그런데 어쩌면 ‘적당히‘라는 게 가장 큰 욕심이지 않을까?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적당히‘라는 선을 지키기 위해서 힘껏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거든. 이건 선택의 문제야."
- P206

"도자기를 굽는 건 마음을 굽는 것과 같아요. 뭉툭하고 못생긴 흙을 손으로 다듬고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수록 예뻐지고소중해지죠. 꺼내 보기도 싫은 못난 마음도 계속 시선을 주면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보이잖아요. 미움만 있는 줄 알았던 마음 안에 애정과 연민...……… 다양한 감정이 꾸깃꾸깃 숨어 있어요. 그러면 그 못난 마음도 소중해지는 순간이 와요." - P212

"주란아, 나는 이미 동굴에서 나오는 법을 알아 나오는 날을미루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닳을까 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 그러니 동굴에서는 내가 알아서 나올게. 혼자 나오는 건 아니니까이제 내 걱정 하지마. " - P218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머릿속으로 고작 세 계절 동안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들을 일렬로 나열했다. 그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가 불분명해서 일렬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정리되지 않았다. 깊은 생각은 잠시 넣어두고, 이 변화를 어떻게 하면 더 즐길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축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로 했다.
이 변화를 누리기만 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했다.  - P220

유독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날이 있다. 지금쯤 머리를쥐어뜯으며 다른 신인 작가를 물색하고 있을 편집장도, 또 다른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을 구 작가도, 기식과 통화를 하는정민도, 말을 잔뜩 하고 싶은 날이었다. - P248

정민은 오랫동안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자신에게 매정하다고, 가끔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결국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심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에 자해하는 것만큼 매정한 것이 있을까.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칼질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이 있을까. 마음을 끄집어내어 구석구석에 말라붙은 악취 나는 땀을 말끔히 씻어낸 것 같았다. 그러자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삶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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