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굴에서 꺼내줄게.‘ 옛날에 이런 말을 한 친구가 있었다. 누가 봐도 ‘너를 위해주고 있어‘라는불편한 말투. 선량한 친구를 자처했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내줄주먹만 한 자리조차 없는 정민에게는 곁을 내놓으라는 협박과도 같았다. "그런데 동굴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죠?"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 정민은 여자에게서 이유 모를안전함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으로는 여전히도자기를 감싸 쥔 채로, - P20
"매번 같은 시간에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 날씨와 계절에 따라 돌봐야 할 기물이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배우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요. - P115
중심 잡기라는 건, 어쩌면 가장자리부터 살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정민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쉽게손을 놓았고, 쉽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말 한마디에도 토라졌으며 깊은 굴속에서 나오지 않았고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했다. 타인에게 내어줄 주먹만 한 공간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촘촘히 걸어놓은 외딴 전시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시선을 받지도 못하고 팔리지도 않는 마음들은 정민의 전시실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 P130
그런데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맥락 없는 사건의 연장선과 같았다. 마치 점묘법으로 전혀 다른 색들을 마구잡이로 찍어냈지만, 작업을 다 마치고 열 발짝 뒤로 물러서 작품을 봤을때 하나의 고즈넉한 풍경이 나오는 것과 같았다. 때로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이 불가항력적인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원인과 결과로 사이좋게 짝을 이뤄 그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낙관‘과 ‘글‘처럼, - P178
기식은 자기가 가진 비슷한 무게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골롤히 생각했다. 상실세스푼과 죄책감 두스푼, 막막함 한꼬집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지긋지긋함 반 컵도. 이런 것들이 잘 버무려져 씹을수록 텁텁한 이야기가 기식에게도 있었다. - P182
그저 두려웠던 것이다. 난독증이 나으면, 다시 그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민은 자신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지극히 정상이 되는 것도 두려웠다. 병을붙들고 있는 것은 아직 조금 더 쉬어도 된다는 허가증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민은 ‘쉼‘에 대해 어떠한 허락도 필요치않았다. 언제까지 쉬고 언제부터 일어설지는 자신이 정할 일이었다. 자신의 속도를 헤아려 스스로 휴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야말로 사람은 진정 성숙해지는 걸지도 몰랐다. - P186
"저도 제가 선택하고 싶어요. 무엇이 됐든요." 준의 시선이 점점 땅으로 향했다. "내가 남들보다 길게 공부하고 헤매면서 깨달은 게 뭔 줄 알아? 길은 절대 한 번의 선택으로 좁혀지지 않는다는 거야. 지금의 입시는 어린 나이에 벌써 길을 확정 지으라는 게 아니야. 오히려 길을 넓혀 주는 시작일 수 있어. 넌 앞으로 더 많은 선택을 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의 선택을 섣불리 판단하지 마.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만 한다면 네가 원하는 샛길이 분명 나타날 거야. - P198
"그건 루저들의 자기합리화 아닌가." 지혜가 자조했다. "자기합리화라니! 내 경우만 봐도 그래. 나는 지금의 자리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적당히‘ 하기로 했어. 주변의 소중한 사람과 나 자신을 챙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바쁜 직장에서 일하고적당히 벌고, 적당히 즐기고………. 이런 날 보고 남들은 욕심없다고 해. 그런데 어쩌면 ‘적당히‘라는 게 가장 큰 욕심이지 않을까?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적당히‘라는 선을 지키기 위해서 힘껏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거든. 이건 선택의 문제야." - P206
"도자기를 굽는 건 마음을 굽는 것과 같아요. 뭉툭하고 못생긴 흙을 손으로 다듬고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수록 예뻐지고소중해지죠. 꺼내 보기도 싫은 못난 마음도 계속 시선을 주면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보이잖아요. 미움만 있는 줄 알았던 마음 안에 애정과 연민...……… 다양한 감정이 꾸깃꾸깃 숨어 있어요. 그러면 그 못난 마음도 소중해지는 순간이 와요." - P212
"주란아, 나는 이미 동굴에서 나오는 법을 알아 나오는 날을미루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닳을까 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 그러니 동굴에서는 내가 알아서 나올게. 혼자 나오는 건 아니니까이제 내 걱정 하지마. " - P218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머릿속으로 고작 세 계절 동안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들을 일렬로 나열했다. 그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가 불분명해서 일렬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정리되지 않았다. 깊은 생각은 잠시 넣어두고, 이 변화를 어떻게 하면 더 즐길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축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로 했다. 이 변화를 누리기만 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했다. - P220
유독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날이 있다. 지금쯤 머리를쥐어뜯으며 다른 신인 작가를 물색하고 있을 편집장도, 또 다른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을 구 작가도, 기식과 통화를 하는정민도, 말을 잔뜩 하고 싶은 날이었다. - P248
정민은 오랫동안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자신에게 매정하다고, 가끔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결국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심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에 자해하는 것만큼 매정한 것이 있을까.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칼질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이 있을까. 마음을 끄집어내어 구석구석에 말라붙은 악취 나는 땀을 말끔히 씻어낸 것 같았다. 그러자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삶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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