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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대학원 동기한테 물은 적 있다. 거긴 평균 한달 생활비가 어느정도 드냐고. 그때 동기녀석의 대답은... 수준(?)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난다..였다. 그땐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씀씀이에 따라 줄일 수 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왔다. 허나 막상 살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했던 그 질문이 참 대답하기 뭐했던 막연한 질문이었겠다는거다. 왜냐하면 그 녀석말 그대로 우리의 눈높이에 따라 생활비가 많이 절약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좀 더 나은 품질의 먹거리를 생각할 주머니의 여유가 있다면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흔히 말하는 '돈 좀 있는' 사람들이 간다는 유기농(organic)가게에서 계란한줄에 월마트보다 세배가 넘는 돈을 주고 사먹으면서 살수 있는 반면 우리처럼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헝그리(hungry) 유학생들은 그저 만만한게 월마트(WalMart)이다. 가격이 싼 것도 이유가 되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 안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원스톱(one-stop) 쇼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차가 없는 경우엔 그런 월마트은 더 없이 유용하다. 여기 저기 안 들리고 한 걸음에 일주일치 장을 다 볼 수 있으니까. 헌데 그런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잇점만 아니라면 기실 월마트보다 더 싸게 파는 곳들이 참 많다. 그 대부분은 월마트같은 대형 체인점이 아니라 동네(local) 가게들이다. 우리가 살던 그 동네에서는 먹거리를 주로 팔던 알디(ALD)라는 가게나, 동네 야채가게, 일반 공산품은 Dollar Tree, Dollar General (우리로 치면 천냥하우스)에 가면 아주 착한 가격의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다. 물론 품질에 대해 그닥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허나 그런 가게들이 몰려있는 것도 아니어서 싸는 이유로 그 가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기가 가난한 유학생들에겐 결코 쉽지 않다. 길에다 쓰는 시간이랑 기름값등을 따진다면 그닥 효율적인 장보기가 아닌 셈이다. 허니 한곳에서 대부분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월마트이 우리처럼 가난한 유학생들한테는 제일로 만만한 장터다. 지금도 우리는 월마트가 제일 편하다.  

어느 동네든지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아주 싼값에 파는 동네(local)가게는 다 있게 마련이다. 한국에서 챙겨온 총알이 다 떨어져서 남편이 일년동안 아르바이트 했던 곳도 그동네 자그마한 야채 과일가게였다. 거기서 알게 되었다. 좀 상한 야채나 채소를 한묶음으로 모아서 1불에 내다놓으면 가난해뵈는 흑인들이나 중국학생들이 거의 다 사간다는 것을. 그 가게는 학교랑 가까이 있는데다 2불이나 3불어치만 사도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제법 한봉지 사갈 수 있어 차없는 가난한 외국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자주 애용하곤 했었다. 짐작컨대 부자들이 잘 간다는 유기농가게의 가격과 비교해 보면 이런 작은 동네 가게를 이용하는 것도 생활비를 크게 절약하는 한 방법이다. 허니 동기녀석의 말대로 아주 저렴하게 살려고 작정만 한다면 크지 않은 금액이라도 식품비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 수 있다.

기실 가장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는 건 '집세'에서다. 남편과 나는 아들내미가 없고 우리둘만 있었다면 트레일러하우스(trailer house: 자동차모양의 이동식 주택)에서 살았을게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지만 한달 집세가 삼백불정도라니 몫돈을 절약할 수 있었을테니. 허나 정작 거기서 살아본 이들에 따르면 전기세가 장난이 아니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얘기도 들었고 아이들을 키우기에 주변환경이 그닥 좋지 않다 싶어..가끔은 우리 수준엔 좀 과하다 싶었던 학교 아파트에서 쭈욱 살았었다. 학교 아파트 (on-campus)는 외부 아파트에 비해 안전하고 무엇보다 학교 전기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기세같은 공과금(utiliity)이 아주 쌌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방 두 개짜리의 30 평 정도되는 평수였는데 집세는 작년에 550불 정도였고 여름에 트는 에어컨이랑 겨울에 히터등을 포함한 공과금은 전기세랑 전화세 인터넷과 케이블등을 포함해 150불정도였으니까 집세랑 공과금으로 한달에 최소 800불정도가 나갔다. 헌데 그 가족 아파트가 얼마나 널찍하고 무엇보다 아이들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었는지 다른 학교로 전학(?)을 와서야 알았다. 그러기 전까지 우린 학교 가족 아파트라면 다 그렇게 왠만하게 살만한 곳인 줄 알았으니까. 허나 지금 살고 있는 아랫동네로 이사와서야 알았다. 우리가 살았던 그 학교 아파트가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부족함이 없는 풀밭과 놀이터 그리고 안전한 동네였는지를.

그렇다고 지금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가 그리 형편없는 건 아니다. 경제적인 면으로 치면 아주 저렴하니까. 건물이 워낙 오래되어 낡고 넓은 놀이터나 같은 쉼터가 없어 좀 삭막해 보이는 주변환경에 적응하는데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한달 집세(550불)에 전기세뿐만 아니라 전화세, 인터넷이랑 케이블 비용까지 다 포함되어 있으니 너무 착한거다. 그거 하나보고 참는다..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디선가 출몰한 바퀴벌레들의 흔적도.. 오래되고 낡은 문들도...처음엔 영 적응이 안 되더니 점점 익숙해져서 그냥 저냥 저렴한 맛에 살아지는 기숙사다. 만일 전화세, 인터넷, 케이블등 공과금을 있는 그대로 다 내야한다면 당분간 내 공부때문에 윗동네에서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남편이랑 나랑 사는 데 드는 한달 생활비에 허리가 휘청했을게다.

이런 가난한 우리보다 더 심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학생들이다. 그전에 살던 가족 아파트 기숙사는 평수도 제법 넉넉한 덕에 중국학생들은 그 한 집에서 두세가구가 모여 살면서 생활비를 절약한다고 했다. 물론 걸리면 쫓겨날 감인데 일단 입주를 하고 나면 그런 호구 조사는 안 하는 동네였으니 다들 눈감아 주는게다. 중국학생들 대부분은  학부생이 아니라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들이 많았는데...그럼에도 몸에 배인 절약정신에 집세랑 먹거리에서 절약한 돈을 중국 본토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낸다는 말에 우리는 외쳤다. 졌다 (you win)라고. 그런 중국학생들의 무서운 헝그리 정신은 잘 살고 넉넉한 이들한테는 찌질한 모습이었겠지만 늘 주머니가 가벼웠던 우리한테는 적잖은 위로가 되었던게 사실이다. 우린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잖냐..는 그 어줍잖은 안심같은거 말이다..

옷사는 데 드는 돈도 여기선 눈높이에 따라 충분히 절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정상가를 주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유학생들중엔 드물다. 태어날 때 은수저물고 나온 있는 집 자제들이야 논외로 치고... 대부분이 거침없이 싸게 파는 세일을 기다린다. 남편과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옷들을 십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아직도 입고 있으니 그 상태가 좋을리가 없지만 일단 편안한게 제일인고로. 그리고 여기서 산 대부분의 옷들은 한 시즌 끝무렵 거하게 하는 할인세일에서 장만하거나 그도 아니면 중고품을 파는 굿윌(goodwill)에서 대충 사서 입곤 했다. 우린 굿윌의 꾸준한 단골이었다. 더군다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들내미 옷들은 세일을 할 때 다음 해에 맞을 만한 칫수의 옷을 미리 사두었다가 입히곤 한다. 여기서 세일이란 그냥 50% 세일 정도가 아니라 얘네들 표현으로 clearance or crazy sale을 할 때를 말한다. 정상가로 40불넘게 했던 겨울 점퍼를 7불에, 한 여름에 20,30불하던 여름 샌달이 겨울 초입게 가면 5불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누가 정상가를 주고 사겠는가. 그런 겁나게 착한 수준의 할인들은 우리같은 가난한 유학생들한테 아주 요긴함은 물론이다. 헌데 그런 세일을 수시로 광고도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아 쇼핑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도 가끔 백화점(mall)을 한번 돌아보곤 했었다. 혹시 아이들 옷파는 가게들이 그런 세일을 하지 않나 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에 또래 아이들이 있는 가까운 한국이웃들끼리 서로 입던 옷들을 물려주는게 유학생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따뜻한 모습이다. 우리아들내미도 자기가 입던 옷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자기도 이웃 한국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으면서 자랐으니까. 해서 가끔 아들 옷을 입은 동네 꼬마가 아들인 줄 알고 연신 불러댄 적이 한두번이랴. 그렇게 서로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아이들의 옷문제를 해결하는게 유학생 가족 사이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우리의 단골 가게는 앞에서 잠깐 얘기했던 굿윌(Goodwill)이었다. 굿윌은 주민들이 기부(donation)한 옷이나 물건들을 받아서 파는 중고품가게다. 여러 주에 지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 상태가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여기 남부에 내려와서 찾았던 굿윌가게에서 알게 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중서부 우리가 살던 동네의 그 굿윌가게 물건들은 여기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가격 또한 저렴했다. 그곳은 옷들뿐만 아니라 그릇이나 생활용품들도 판다. 만일 우리도 처음부터 여길 알아서 정착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굿윌에서 샀다면 좋은 물건들을 훨씬 싼 가격에 살 수 있었을게다. 해서 처음 온 유학생들한테 굿윌을 추천한다.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중고품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인식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그리 즐기지 않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래 저래 우린 굿윌 덕을 많이 봤다. 특히 아들이 책을 한창 읽을 무렵..도서관과 함께 굿윌에서 많은 책들을 샀다. 정상가로는 5불 넘는 책들을 깨끗한 상태로 1불도 안되는 60전에 살 수 있었으니까. 그곳에서 아들의 장난감도 솔찮이 많이 샀다. 대신 굿윌역시 필요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수시로 방문을 해줘야 한다.  

해서 우리는 월마트에 장보러 가는 길목에 있는 그곳을 장보러 갈 때마다 수시로 들려 둘러보면서 아들의 책들이랑 장난감들, 아들의 옷들이랑 우리의 옷등을 비롯 여러가지 생활용품을 해결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굿윌 사랑에 주위 친구들은 고개를 젓는다. 자기네도 한두번 둘러봤는데 우리처럼 재미를 못 봤다면서. 그때마다 우리가 해주는 얘기는..우리처럼 수시로 일상적으로 둘러봐야지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사올 때 아들이 커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책이나 옷, 장난감같은 물건들을 모은 서너 박스를 굿윌에 기부하고 왔다. 기부할 때 알았다. 기부한다고 해서 굿윌이 어떤 영수증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박스만 건네주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것을 받은 그곳 직원들이 옷을 세탁하고 정리한 깨끗한 상태로 매장에다 내다 놓는다. 지금도 기억난다. 굿윌에 들어서면 맡을 수 있는 굿윌 특유의 냄새를. 그건 아주 특유의 상쾌한 세제 냄새였는데 언젠가 굿윌에서 산 옷을 입던 아들이 옷에서 맡아지는 냄새만으로 "엄마..굿윌에서 산 옷이지요..."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 사는 동네의 굿윌은 거의 찾지 않고 있다. 굿윌 물건의 수준은 그 동네의 사는 수준과 비례한다 싶다. 왜나하면 이전의 그 잘 사는 동네의 굿윌과 너무 다른 이동네의 이곳 굿윌을 처음 한두번 걸음해본 우리는 그 이후로 거의 찾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주민들의 기부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니 당연한 지도 모른다.

그렇다..우린 그렇게 눈높이를 내려서...물론 그전에도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긴 했지만..아주 저렴하게...알뜰하게 공부하는 사오년 길게는 육칠년 동안을 그런대로 해낼 수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학비는 제외하고 말이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 내지는 조교일자리를 받기만 한다면 여기서 생활하는데 드는 생활비는 어떻게든 절약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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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의 나라에 떨어진 우리 세식구를 구원해주러 온 이들은 먼저 와서 터를 잡고 공부하고 있던 대학원 동생이랑 남편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넉넉한 밴까지 빌려 공항으로 마중을 와 주었다..고맙게도. 목적지로 향하는 차창으로 처음 보게 된 도시는 미국 중서부에 있는 세인트루이스라는 도시였다. 왕년엔 10대 도시로 꼽힐만큼 번창했다는 그 도시였다는. 허나 첫 느낌은 오래된 건물들탓일까 기울어져가는 듯한 회색이었다고 기억된다. 비행기에서 얌전하게 와주었던 두살배기 아들이 한번 터뜨린 울음은 그런 낯선 느낌 탓인지 오는 내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우리의 진땀을 빼게 했었다. 대학원 동생이야 우리를 그곳 학교로 정하게 된 이유중에 하나였을 만큼 서로 다 아는 처지니 굳이 인사를 챙기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남편 일년 고등학교 후배의 존재를 알았기에 고맙다고 했을 때 그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되요...하던. 왜냐하면 그곳에 살다보면 처음에 이렇게 지게 된 신세들은 도움을 받은 이들한테 갚는 게 아니라 앞으로 새로 올 누군가를 마중하러 공항 나가거나 그네들한테 이런 저런 도움을 주면서 갚게 되더라는. 우리의 첫날밤은 대학원 동생집에서 묵었다. 너무 울어대서 피곤했을 아들은 곯아 떨어졌지만 시차가 적응이 덜 된 남편과 나는 새벽에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우리가 맞이하는 첫날 아침을 기억하기 위해.  

다음날 우리는 동생이 미리 등록을 해놓았다는 가족 기숙사에서 짐을 풀었다. 결혼한 기혼 학생가족들만 살수 있다는 그 곳은 학교에서 십여분 떨어져 있었다. 스무 다섯평 남짓한 크기에 두개 혹은 세개짜리 방에다, 거실 그리고 냉장고랑 오븐이 갖춰져있는 부엌을 갖추고 있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 이상의 넓은 공간이었다. 지은 지 아주 오래 되어 낡았다고는 하지만 관리를 잘 한 탓인지 비교적 깨끗했고, 무엇보다 우리 셋을 들뜨게 했던 베란다 문만 열면 볼 수 있는 넓은 초록색 잔디 공간이었다. 시멘트바닥에 익숙해 그런 녹지공간에 목말라 있던 서울토박이 우리가족은 도착한 며칠 동안 한껏 들떠 주변의 잔디를 밟고 다녔다. 아들과 남편은 해질 무렵 여기 저기 빛을 발하면서 풀밭을 뒤덮는 반딧불 꽁무니의 불빛을 따라 다녔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칠 생각을 안 하는 간 큰 다람쥐를 쫓아다니면서 우리는 그렇게 틈만나면 아들내미의 손을 잡고 기숙사 근처를 어슬렁 거리며 배회(!)하고 다녔다. 제일 맘에 들었던 건 기숙사 오분거리에 서울 같았으면 적어도 한두시간은 꼬박 차로 밟아야 볼 수 있음직한 제법 큰 호수를 끼고 있는 공원이었다. 거기에 가면 광릉수목원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쭉쭉 뻣은 나무들로 눈이 시원했고 아이들 놀이터도 있어 처음 한동안은 저녁만 먹으면 아들내미의 손을 잡고 그 공원을 몇바퀴 돌면서 만나게 되는 다람쥐나 오리, 운좋은 날 만나게 되는 사슴등을 구경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맘껏 들이켜댔었다. 허나 그렇게 여유부리며 산책을 하는 횟수는 바쁘게 돌아가는 학교 생활로 인해 점점 줄어들었고 요즘 같아선 마지막으로 거길 걸었던게 언제였나 싶을 만큼 발길이 뜸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여기도 사람살이라...아무리 대충산다고 해도 필요한 살림들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 비용을 최소화하겠다고 한국에서 부터 압력밥솥이랑 밥그릇 두개, 수저두쌍, 당분간 먹을 쌀, 거기다 친정엄마 가 챙겨주신 통마늘꾸러미까지...무게가 되는 한 꾸역 꾸역 담아 온 살림들은 초반에 살림장만하는데 드는 돈을 줄일 수 있어 아주 요긴했으며 결혼할 때 장만했던 압력밥솥은 이제 십년이 넘어 낡긴 했지만 여전히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생각난다. 가족 기숙사 집을 지정받아 들어온 첫 날...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서 우린 밥상 대신 라면 박스를 엎어 놓고 그 위에서 밥이랑 간단한 저녁을 먹었고 침대가 없어 맨바닥에 후배가 챙겨다 준 이불을 깔고 잤던게. 남편말대로 MT라도 온 그런 기분으로. 그랬던 텅빈 공간이 이제는 들고 나는 지인들이 주고 간 가구들로 꽉차있다. 언젠가 여기다 끄적거린 적이 있듯이 그런 가구들은 여기서 맺은 인연을 떠올리는 매개이기도 하다. 컴퓨터 책상을 보면 일본으로 돌아간 나나라는 친구를 떠올리게 하고 식탁테이블은 루지애나로 간 남편 선배 부부를 떠올리게 하고 책꽂이는 한국으로 돌아간 친하게 지낸 머슴아를, 티브이장식장은 대전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은 한 커플을.....그렇게 가구를 한번 훑는 것만으로도 8년동안 맺은 인연들과 같이 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으니 새로 산 가구들보다 훨씬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우리집에서 여기 와서 처음으로 거금(!)을 주고 장만한 유일한 물건이 침대다.  여기서 만난 남편 고등학교 후배가 침대만은 허리건강을 위해 제대로 된 것을 써야 한다고 하기에 침대를 400불넘게 장만했고 그 나머지 살림들은 아주 다양한 경로로 구해져서 우리집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때 마침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가시는 한국분들한테 티브이랑 소파를 물려받거나, 가을에 자주 열린다는 야드세일(yard sale)을 쫓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 하나 장만했다. 허니 내 생각엔 유학자금이 빠듯하다면 굳이 처음부터 가구들을 다 들여놓을려고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 싶다. 살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필요한 물건을 얻거나 싸게 장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쓰던 거라고 하긴 하지만 아주 쓸만한 수준의 물건들을 얻을 수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말이다.  우리가 살림을 장만한 방법중에 가장 재밌었던 것은 여기 가족 기숙사 쓰레기통옆에 나와있는 물건들을 주워 오는 거였다. 여기 학교 가족 기숙사에서 사는 대부분이 우리처럼 살림이 빠듯한 외국학생들이 많은지라 이사갈 때 혹은 살림을 업데이트할 때 그들은 자기네가 쓰던 가구나 물건들을 무빙세일(moving sale)을 통해 아주 헐값으로 처분하기도 하고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쓰레기통 옆에다 얌전히 내다 놓곤 해서 우린 그 이름모를 이웃들덕을 톡톡히 봤고 우리 역시 쓰던 물건들을 쓰레기통옆에다 내다놓으면 얼마 안 있어 필요한 누군가가 그 물건들을 가져간다. 그 누군가가 대부분이 중국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우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해가 질 무렵 저녁 산책길에 오며 갈라치면 남의 쓰레통 근처를 탐사(?)하는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인가...건너편 쓰레기통에 누군가 내다놓은 멀쩡한 식탁이 지금 우리 뒷마당에 놓여져 아주 확실하게 재활용되고 있다.  누구말에 의하면 이동네에서 우리처럼 '야드세일'에 성공한 집도 없다고 한다. 우리돈 시세로 하면 천원 이천원에 제법 물건같은 물건들을 집어오는 재주가 남다르고 해서 그러는게다. 기실 야드세일은 우리가 뭘 사고 싶어 찾는 경우고 있지만 미국사람들이 쓰다가 내놓은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게 아니다. 물론 진짜 새 물건들을 아주 헐값에 내놓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주 가끔이긴 해도 새것을 사는게 차라리 나을 성싶을 만큼 턱도 안되는 가격을 요구하는 얌체들도 있다.

미국에 오면 필수품이라는 자동차 얘기를 해볼까. 미국사정을 모르는 시어른께서 그러셨단다. 장보고 쇼핑하는데 무슨 자가용이 필요하냐고..말이다. 차없이도 학교는 다닐 수 있다. 한시간에 두번씩 있는 학교 캠퍼스를 도는 셔틀버스가 있으니까. 허나 장을 보고 쇼핑을 하는 경우에 월마트나 크로거등 다운타운을 도는 한시간에 한번 있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장을 보는데 두 세시간을 써야했고 무거운 것들을 들고 버스를 오르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차없이 일년반을 버텼다. 달랑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살배기 아들내미를 데리고 그렇게 차 없이 버틸 수 있다는게 여기 사람들은 안다...쉽지 않다는 것을. 해서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다. 누구보다 여기 먼저 와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학교 동기랑 여기서 만나게 된 남편의 고등학교 후배가 필요할 때마다 차를 태워줬다. 제일 많이 도움을 받았던 건 처음 여기 저기서 살림장만을 할 때도 그렇고 은행구좌열고 전화신청하고 학교 등록같은 볼일을 볼 때마다 우리를 도와줬다. 그렇게 받았던 도움들이 너무 고마워서 사는게 조금씩 여유가 있어지면서 우린 가급적이면  이곳에 처음 정착하는 분들한테 도움을 드릴려고 한다. 우리만 그럴까...다들 처음 와서 받은 은혜들을 그렇게 갚는다..우리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처음 오는 분들한테 차를 태워드리고 쓰던 물건들을 드리고 하면서. 남편 후배가 고마워하는 우리한테 그랬었다. 자기도 처음에 도움 많이 받았다고...다음에 우리도 처음 오는 분들을 자기처럼 도와주게 될거라고..여기서는 그렇게 서로 도와주고 도움받고 하면서 살게 된다고 말이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리라...배짱을 부려 떠나오긴 했지만 부딪혀보기전에 갖었던 새로운 생활과 학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거리들이 여기서 하루 하루를 보낼수록 조금씩 조금씩 무게가 덜해져갔고..궁하면 통한다...는 말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살기 마련이라는 걸 새삼 남의 나라 땅 살이에서 절감 또 절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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