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부진 옛날 사람 답잖게 참 명품을 좋아하십니다.
젊은 저는 명품이 판을 치는 21세기에도 아직 아는 게 달랑 <샤넬> 하나
뿐인데요(무식무식 ^^;; ) 아부지 서랍에는 옛날부터 <에스떼로더>니
<니나리치>니 하는 향수며, 로션, 분들이 늘 굴러 댕겼드랬습니다.
입맛도 엔간히 까다로우셔서 전복죽도 일반 일식집서 파는 건 몇 숟갈
드시지도 않고요 -_-. '고나다'라고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해삼 밸로 만들
젓갈(저두 잘 모르는데 하이간 10g에 15만원돈 하는 고가품임 -_- )을
계란 노른자, 들기름 살짝 넣어 싹싹 갓 지은 쌀밥에 비벼 드시곤 하셨지요.
또 친구, 술 좋아해서 어릴 때 저희 집은 주말 손님이 끊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어릴 때, 이런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부지와 친구분들 안방에서 한 상 잘 차려드시고 있을 때 엄마와 우리 형제들은
상차릴 요리를 튀겨내랴, 나르랴 발을 동동 구르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뭐 저희 아부지가 나쁜 사람였단 얘긴 아니구, 옛날 엄마 아부지들은
이러구들 많이 사셨지요. 외출할 때면 아부지는 허리꼿꼿 앞에서 걸어가시고
부인과 애들은 종종 잰걸음으루 우~ 아부지 뒤를 따라가는 뭐 그런 이야기 ^^;;;
그런데 어느 새 아부지는 종이 호랑이가 되어 버리셨어요.
천하에 무서울 것 없이 큰 소리 떵떵치던 양반이 이제는 자식들 반발에 별 큰 소리도
못 내시고 궁시렁궁시렁...혼잣말을 하시고요 (아유~ 그래두 또 노인네 고집이 지지는
않으셔요~ ), 아무리 향수로 가리려 해도 스멀스멀 피어나는 노인네 군냄새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한 겨울에 찬물로 등목 하던 객기는 사라지고 이제는 10월부터 내복을 입으셔야 하는데
그게 좀....챙피하신 모양이예요. 저한테 들키고는 좀 당황하시더라구요. 누가 뭐래나.. ^^;;
뿐인가요. 10시에서 10분만 넘어도 몽둥이 들고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던 천하의 호랑이는
이제 막내딸이 어쩌다 전화만 드려도 뭐가 그리 기쁘고 감사한지, 게다가 점심 시간인데도
회사 바쁘지 않냐, 전화비 많이 나온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자고 하세요. (완전 011 광고지요!!)
그런 아버지와 모처럼 가을 공원에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모래밭에서 노는 손주 딸내미가 잘 안 보인다며 안경을 꺼내 쓰시더군요.
옆에서 보니 어릴 때 경노당에서 자주 뵜던 노인들이 꼈던 바로 그 두꺼운 돋보기였습니다.
순간 두꺼운 돋보기 너머로 왜곡된 세상이 보이며 저도 모를 뭉클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보니 안경 너머 주름진 그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습니다.
그것이 먼저 가신 엄마를 생각하는 회한의 눈물인지, 손주 딸내미가 보이지 않는 서글픔인지,
아니면 늙은 개 마냥 그냥 눈가에 맺힌 눈물인지 저는 알 수가 없었어요.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
.
이 힘없는 늙은 개를...제가 어느 새 사랑하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는지도 모르는 일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