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정영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별기대없이 읽게된 작품이 뜻밖에 나름의 감동을 선물할 때만큼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정영희의 '낮술' 또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2006년 우수문학도서라는 이유로 우연히 읽게된 작품으로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할까.

작품마다 제각기 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아내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고, 또 가족관계에 대한 의미를 돌이켜보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시기가 결혼 14년차인 내게는 참으로 적절했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낮술]은 10편의 단편 모음집인 이 책의 대표작으로 정리해고를 당한 남편의 하릴없는 일상을, [억새꽃]은 초등학교적 첫사랑과 해후한 중년을, [집으로 가는 아주 먼 길]은 티베트로 애인을 떠나보내는 점순을, [봄날은 지나간다]는 바쁜 일상이 어느 날 문득 생경하게 느껴지는 영업사원을, [치자꽃 지기 전에]는 아트퀼트를 하는 여자와 그 아버지와 남편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마음이 백야]는 대학시절 사랑을 나눈 남자들과의 삶과 얽힌 두 여자를, [생은 다른 곳에]는 실직한 남편을 가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삶을, [피아골 가는 길]은 운동권이었던 오빠와 밀고자였던 오빠의 친구와 함께 사는 지숙을, [여름날, 어느 한식]은 가난뱅이었으나 지금은 신문기자인 그가 아버지의 산소를 찾기까지를, [해후]는 분단체제에서 생긴 복잡한 가족관계 속에서의 형제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작품 속 주인공 '너'는, 누구나 아버지, 어머니이며 또한 아내와 남편으로 살아가거나 또 그런 이름으로 묶여진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는 점에서 바로 '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술주정뱅이로 살아가던 아버지를 지독히 원망했던 내가 지금 직장을 잃고 대낮부터 낮술에 취해서 거리를 헤맬 수 있고,   우연히 만난 이혼한 첫사랑과의 만남을 이어가던 나는 첫사랑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컴플렉스를 가진 인간으로 살게 될 것 같았다는 눈물을 흘린다.

대화도 이해도 필요없이 단지 남편은 남편의 배를 타고 나는 나의 배를 타고 살아가는 삶의 비애를 접하는 나,  섹스파트너를 바꾸어가며 그러나 가정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친구에게 바람 피운 남편과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을 이야기하며 눈물 흘리는 나, 월급봉투 채 아내에게 맡긴 채 살아가는 나는 아이들에게도 아내에게도 이방인인듯 외톨이의 삶을 살아간다.

울부짖으며 부인했던 나의 아버지의 삶이, 또한 어머니의 삶이 어떤 힘이 있어 이렇게 유전자를 나누어 주듯 내 삶 구석구석에 움크리고 있는걸까. 절대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삶 모두 그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렇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어떤 '길'은 아닐까. 부모의 길도 부부라는 이름의 관계도 참으로 나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왜 이리도 많은지...

단편들 모두 하나가 되어 읽혀지는 이 책에서 특별히 [억새풀]과 [생은 다른 곳에]가 참으로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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