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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평점 :
이 책을 무어라 규정해야 할까. ‘에세이’라는 하나의 장르에 예속시킬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소설’로 읽는 기분도 맛보았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사를, 내면의 고백을, 치부를, 상처를, 고통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 할 수도 있었다. 묘사와 문체, 문장력과 구성 모두 소설의 그것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에세이를 택했을까. 그것은 ‘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허구라는 소설의 형식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아니다. 어쩌면 상상력이 소설가보다 부족해서 에세이를 택했을 수도 있다. 딱 에세이를 쓸만큼의 상상력은 발휘할 수 있었으나 소설을 쓸만큼의 상상력에는 못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소설가보다 용감하기에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내용과 소설같은 문학성을 지닌 책이다.
내가 리베카 솔닛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병권의 [철학자와 하녀]를 읽은 후였다. [철학자와 하녀]를 펼치자마자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병권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읽으며 철학의 거처랄까 사명 같은 것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것은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을 말하는 것이며, 깨달음은 천국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리하여 천국에는 철학이 없으며 철학은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고병권의 글을 읽은 이후로 리베카 솔닛은 내가 주목하는 한 명의 저자가 되었고,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라는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인 키워드로 절묘하게 이루어진 이 책을 만났다.
우선 목차에 주목하자.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배열한 목차는 13개의 챕터<1.살구/ 2.거울/ 3.얼음/ 4.비행/ 5.숨/ 6.감다/ 7.매듭/ 8.풀다/ 9.숨/ 10.비행/ 11.얼음/ 12.거울/ 13.살구>로 구성되어 있고, 정확하게 가운데 7번째의 챕터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7번째 챕터의 제목은 ‘매듭’이다. 그 앞에 ‘감다’가 있고 그 뒤에 ‘풀다’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대칭이나 ‘매듭’이 내용의 전환점임을 알 수 있다. 목차는 조형적으로 아름다우면서 의미까지 긴밀하게 본문과 연결되어 있다. (감탄)
저자는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마음을 뒤흔드는 질문으로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녀의 이야기는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도착한 후, 침실의 바닥을 차지하면서 떠올리게 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 때문에 빚어졌던 갈등은 동화의 본질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지다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불러오기도 하며 중국의 3대 현자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당나라의 화가 우다오쯔와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체 게바라와 나병 환자, 프로이켄의 책 [북극 모험]에 실린 아타구타룩의 일화, 우물에 빠진 맥클루어라는 아이의 실화 등 풍성한 이야기를 불러온다. 여기에 저자가 겪은 유방암의 치유 과정이 덧입혀지면서 이야기는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진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느질의 한 땀 한 땀인 것처럼, 마치 내가 바늘이 되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내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세상이 꿰매지고 있는 것 같은 상상. 다른 이들이 만들어 내는 길과 교차하기도 하면서, 비록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방식으로 그 모든 길이 누비이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로 엮인다. 꾸불꾸불한 선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하나로 합쳐 나가는 것이, 마치 그 걸음이 바느질이고, 바느질은 곧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며, 그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삶인 것 같다.(p193)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제각각 퀼트의 조각보처럼 다른 무늬와 색을 가지고 있지만, 솜씨 있게 꿰매어 놓아 하나의 의미 있는 그림을 가진 누비이불이 되어 읽는 이의 마음을 감싸준다. 언젠가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풀어 놓아야 한다면 나도 리베카 솔닛의 이 책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에 치우쳐서 더 슬퍼하고 더 미워하고 더 분노하는 대신, 나와 나의 이야기 사이에 풍성한 사유를 끌어들여서 감정의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며 내 삶의 본질을 발견하게 해주는 글쓰기.
셰에라자드가 풀어 놓은 이야기는 기대로 가득한 고치처럼 술탄을 감싸고, 결국 그 안에서 그는 조금은 덜 잔혹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p14)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이 말하는 방식으로 ‘감정이입’을 이해한다는 것은 셰에라자드가 해주는 이야기처럼 우리 안의 술탄이 조금은 덜 난폭해지고 더 치유되어 나오게 하는 일이다. 멀고도 가까운 당신께 이 책을, 나는 마음을 다하여 권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