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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이 리뷰를 읽으려는 이들에게 먼저 솔직히 밝혀둬야 할 점이 있다. 내가 앨리스 먼로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09년에 프랜신 프로즈의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를 읽으면서였다. 거기서 인용된 대단한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앨리스 먼로의 단편 <덜스>의 첫 단락을 만났을때 나는 고작 몇 줄 만에 작가에게 반해버렸다. 그 후로 앨리스 먼로를 좇는 열성 팬이 되었고, 가장 최근에 번역된 [거지 소녀]의 출간에 또 한 번 환호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 리뷰는 전적으로 편애와 편견이 가득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인생을 한편의 소설 같다, 라고 말할 때 여기서 소설이란 매끄럽게 이어지는 장편보다는 단편들의 연작이 더 어울린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인생을 돌이켜볼 때 기억이란 불완전하고 불연속적이며 분절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설터도 말하지 않았던가.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 있을 뿐”이라고. 앨리스 먼로는 섬세한 필치로 “그 조각”들을 열편의 단편 소설로 복원하여 로즈라는 여성의 삶을 연작의 형태로 그려낸다. 내가 기대하던 형식의 소설로, 감탄에 마지않게.
작가는 책의 제목이자 단편 소설 중 하나인 '거지 소녀'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어린 시절부터 중년의 여인이 되기까지 로즈가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겪었던 경험과 자의든 타의든 선택과 결단이 필요했던 삶의 중요한 시기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어떤 플롯도 없고 기대와 호기심도 유발하지 않는다. 때때로 읽기 불편한 내용도 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재미라는 요소를 가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앨리스 먼로의 글은 소설을 끝까지 읽어 나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재미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소설을 읽고 난 감상을 즉각적으로 “재미있다”라는 가장 흔하고 단순한 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 재미의 층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소설들은 대체로 사건과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전혀 그려지지 않는 다른 종류의 소설도 우리는 “재미있다”라는 말로 평가할 때가 있다. 특정할 만한 사건도 없고 인상적인 장면도 없이 시종일관 밋밋한 소설인데도 그렇다. 이유는 소설에 보이지 않는 요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다. 다만 마음으로 만져질 뿐이다. 우리는 눈먼 사람처럼 점자를 읽듯 마음으로 문장을 찬찬히 더듬어 가야만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 문장들은 형상이 없는 마음의 결을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해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해준다. 삶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감동하고 전율하고 각성하게 만들면서. 이 책이,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내겐 그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염두에 둔 단어는 단편의 제목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거지 소녀’이다. 패트릭과 로즈의 대화에서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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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이 말했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누구?”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알잖아. 그림 말이야. 그 그림 몰라?”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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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는 아프리카의 민요에서 전래하고 시인 테니슨에 의해 시로 쓰였으며, 화가 번 존스의 회화로 유명하다. 거리를 지나가던 코페투아왕이 가련하고 헐벗은 거지 소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순간을 표현한 그림이다. 신분의 격차를 초월한 사랑을 그린 낭만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내게는 이 그림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문장을 빌어 이 그림을 다시 보면 그러하다. 존 버거는 그림 속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역시 이상적인 관객이 남성으로 가정되어 있어서 거지 소녀는 남성의 이상적인 여성향으로 묘파 되어 있다. 이는 패트릭과 로즈의 권력 관계로 상징되고, 가부장제 아래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확장된다. 이 그림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거지 소녀가 들고 있는 아네모네 꽃이다. 아네모네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속절없는 사랑, 비극적인 사랑’이다. 번 존스가 아네모네 꽃말을 염두에 두고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앨리스 먼로는 충분히 그것을 인지하고 소설을 썼다. 패트릭과 로즈의 사랑은 낭만적이지 않으며 아네모네의 꽃말과 같은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로즈가 그렇게 깨닫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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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세상을 지워버린다고, 사랑이 잘되어갈 때만이 아니라 망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놀라울 것도 없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중략)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이건, 빼앗기게 된다.(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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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로즈의 삶은 아네모네의 꽃말처럼 불행하기만 하고, 이 소설은 비극적이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로즈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담담한 문체가 불행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해주는 힘이 있으므로. 그 힘이 불행 이외의 것들을 로즈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해주므로.
[거지 소녀]의 많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러면 소설만큼 긴 리뷰를 써야 할 것 같다. 그중에 고르고 골라서 나는 이야기 중에 로즈가 소중한 십 달러를 몸속에 꽁꽁 간직한 채, 처음으로 토론토에 혼자 기차를 타고 가는 날에 대해서 짧게 적어본다. 로즈는 기차의 옆좌석에 앉은 선량하게 생긴 목사에게 교묘하게 성추행을 당한다. 플로의 경고와 주의에도 불구하고 로즈는 변장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친절하고 선한 사람과 친절을 가장한 악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 겪어보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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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목사였을까, 아니면 말로만 그런 것일까? 플로는 목사가 아니면서 목사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말했었다. 목사이면서 목사가 아닌 것처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혹은 더욱 이상하긴 하지만, 목사가 아닌데 목사인 척하면서 목사가 아닌 것처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태에 그토록 가까이 갔다는 사실은 유쾌하지 않았다. 로즈는 유니언 역을 통과해 걸어가며 십 달러가 든 조그만 주머니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꼈고, 계속 피부에 스치며 교훈을 상기시키는 그 주머니를 하루종일 느끼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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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소중한 십 달러가 든 주머니를 깊숙이 간직한 채,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타고 가는 경험과 다름없다. 나는 로즈의 십 달러가 든 주머니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듯 이 책이 마음 깊숙이 닿는 것을 느꼈고, 계속 마음에 스치며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질문을 상기시키는 이 책을 생의 순간마다 느끼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로즈의 삶을 읽는다는 것은 내 삶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사건'이고 '과정의 시작'이라는 것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