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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다가오는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해이다. 벌써부터 내년에 벌어질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선제적 이슈들이 정당 혹은 정치인을 중심으로 하나씩 제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차기 대권주자로 누가 유력한지에 대한 하마평과 그에 따른 갈등과 줄서기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정권을 유지 혹은 탈환하기 위해 각종 정치 세력 및 정당 간의 연합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예측과 논쟁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아무리 정치 혐오증이 만연해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2년 동안 좋건 싫건, 혹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 사회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소용돌이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정치의 발견>의 저자는 책 제목 그대로 정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재발견’도 아니고 ‘발견’이라니,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정치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인가.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주지하다시피 자생적 갈등과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정착시킨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별다른 갈등 없이 민주주의가 이식되었고, 그로 인해 “분명 제도로는 민주주의인데 그 안에 아무런 사회적 내용도 정치적 갈등의 흔적도 각인되지 않았다.” 이 위에 분단과 전쟁의 효과가 덧붙여지면서 남한과 북한은 자연스럽게 권위주의 사회로 퇴행하게 되었고,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내용을 이념의 틀 안에서 발전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이 실천”되면서 바람직한 정치적 가치들은 모두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여지는 일종의 “신화로서의 민주주의”가 성립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듣기 좋은 공허한 담론 내지 우리를 잘못된 실천으로 이끄는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이는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상화된 민주주의가 곧잘 얘기하곤 하는 직접 민주주의와 같은 체제는 극히 제한된 조건, 즉 고대 아테네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소규모 지역이나 타인의 잉여 노동력이 충분히 제공될 때에야 비로소 성립 가능한 체제이지 현대 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스위스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접 민주주의의 가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바람직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도 아니다. 현대 국가와 같은 대규모 사회 하에서 민주주의란 ‘인민의 직접 지배’ 체제가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 체제, 즉 대의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인식한다면, “대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가 영향력 있는 정치과정으로 자리 잡는 것이며, 그때의 핵심은 좋은 정당을 만드는 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정당이 필요하고, 좋은 정당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를 인용하며 정당이란 사회 갈등을 적절히 사회화하는 역할의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입만 열면 화해와 통합을 부르짖는 우리 정치사를 생각한다면 다소 낯선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건 지역·종교·소득·직업·성·고용형태 등에서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차이가 자연스럽게 갈등을 형성하게 된다. “갈등 없이는 그 누구도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 자체가 이러한 갈등 때문에 성립된 정치체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의 전개와 해소가 직접적인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다시 말해 갈등이 개별적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갈등을 야기하는 사회적 제도에 영향력을 끼치기 힘들고, 더 나아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상층에 유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할 수 있도록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당이다.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그래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 정당이 바로 좋은 정당이다.
그렇다면 좋은 정당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저자는 무엇보다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현재 우리의 정치가들, 특히 진보적 정치가들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 있다. 하나는 정치에 고고한 도덕적 이상만을 투영하는 있는 경우다. 베버가 지적했듯이 “선한 목적과 도덕적으로 의심될 만한 수단을 결합”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운명이다. 정치가란 이러한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고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을 통해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정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정치가로서의 책임 윤리를 방기하는 일일 뿐이다.
정치가들이 보이고 있는 다른 오류는 시민들의 의식 수준을 탓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되길 요구하거나 자신을 그들과 다르게 여기며 진보적 이론에 자족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태도는 정치가들이 자신의 무기력 혹은 소극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잘못은 현 체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다”는 알린스키의 지적을 깊이 새기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기초해 사회 갈등을 조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려 노력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 가치를 수혈하거나 계몽하려 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의 경험의 세계에 기초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야만 대중들이 자존감을 가지고 정치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의 발견”이란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에서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로의 회복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정당 정치 체제의 정착과 정치가들의 각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연으로 진행된 내용을 담은 짧은 책이기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밀한 논증이나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에 대한 꼼꼼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저자의 출판 의도 또한 앞으로 벌어질 정치적 소용돌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키잡이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를 위한 고민과 논쟁을 촉발하는 역할로 한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식의 정치 팜플렛이 대개 그러하듯이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논의는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이러한 원론을 구체적 차원에 접목할 때 생겨난다. 저자는 무엇보다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이라는 정치적 책임 윤리를 자각하고 이를 담대하게 이끌어나갈 리더십의 출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일종의 엘리트주의로 치부해버리고 무시하는 것은 저자가 비판하는 관념론이나 추상론에 머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가로서의 책임 윤리를 자각하고 있는 정치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뛰어난 개인이 혜성같이 등장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당원이 지도부에게, 시민들이 정치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해야 하는가? 전자라면 (저자 스스로 비판했던) 혁명의 상황이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상황의 악화를 방기하는 무책임한 혁명가들의 상황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후자라고 한다면 구성원들이 이미 바람직한 정치의 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저자가 지적하듯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충분히 정착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결국 바람직한 정치가가 등장하기 위해선 시민의 의식이 성숙해야 하고, 시민의 의식이 성숙하기 위해선 바람직한 정치가가 필요한 일종의 순환 논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며 발전해 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정치를 하려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기에 상대적으로 정치가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리다. 그러나 대중 서적으로 출판을 할 땐 이에 대한 충분한 부연 설명이 덧붙여졌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삼김시대 같은 카리스마 있는 명망가 중심의 권위주의적 정당 정치와는 다른 저자가 바라는 바람직한 정당 정치의 변별력이 어디에서 생겨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