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하는 건 쉽다. 낯선 어른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를 할 수 있다. 시골 어른들은 반갑게 인사하는걸 넘어서서 잘 알지 못하는 내게 안부를 묻고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설명을 해준다. 짐을 들어드리는 것도 쉽다. 평상시 비실거리기 일쑤지만 어른들 짐이 그.렇.게 무겁지 않으니 번쩍 들어올릴 수 있다. 가끔 너무 무거워서 대체 이걸 어떻게 집까지 들고갈지 걱정스러울 때도 있지만. 동네 개들과 일일히 인사하고 머리 한번씩 쓰다듬고 고원의 볕이 따갑긴 하지만 그럭저럭 자전거 타면서 출퇴근하는 것도 즐겁다. 그런데 그 다음.

 

 무시로 방을 열어본다거나 처음 본 내게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한다고 훈계를 한다거나 오지랖 넓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오랜 기간 묵혀둔 애증의 관계 사이에 섰을 때. 시골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 어디서나 있음직한 일들이 좀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벌어지는 곳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처신을 해야할지 어렵다.

 

 강아지들과도 마찬가지다. 나만 보면 짖어대고 분을 어쩌지 못해 한바퀴씩 빙빙 돌아대는 강아지가 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화내는 것마저 귀여운 강아지였다. 일미터도 안 되는 줄에 묶여 하루종일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짠해서 우리집 멍멍이한테 하듯이 얼르고 예뻐해주자 이젠 짖지 않는다. 손을 내밀면 귀를 내리고 다소곳히 있다가 손을 핥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요즘엔 무슨 일인지 대문이 잠겨있어 잘 지내는지 볼 수도 없다.

 

 길들이다. 나도 그들도 서로에게 길들여져간다. 대개는 내가 길들여져 간다.

 

 아침마다 서로 인사를 하는 아저씨는 '안녕하세요'란 인사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디를 이렇게 일찍 가요, 열심히 자전거 타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날마나 일하느라 힘들것어요. 등등. 얼마 전 동네 입구에서부터 아저씨를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아저씨의 검둥이와 흰둥이가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다, 검둥이는 복날에 만오천원에 팔렸다, 검둥이 사료값을 내기가 어려웠다. 눈 주위가 빨간 흰둥이는 폐자재로 만든 집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손가락만한 까만 새끼 강아지들이 쌕쌕 소리를 내며 엄마 젖을 찾는다. 인사만으로도 나는 아저씨가 좋은 사람인걸 안다. 그래서 흰둥이와 강아지들에게 괜찮은 깔개가 필요하고 검둥이는 그렇게 팔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큰 테두리의 이야기를 작게 쪼개면 작은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니라 복잡한 이야기가 된다.

 

 어른들은 직접적으로 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신 빙 돌려서 말한다. 눈치가 없는 나는 반박자 늦고 한박자 후에야 아차 싶다. 툭툭 뱉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화가 났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한테도 화가 났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추접스럽게 술자리에서 뒷말을 해서 정말 서럽고 화가 났다. 하지만 뒷말 말고는 내가 옳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참는다. 조금씩 참다보니 나중에는 그게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 싶은거다. 돋보이고 싶거나 분위기 전환이라는건데 과연 그 말이 그 순간 그런 기능을 했나 싶다. 독하거나 세지 못한 말로 남들을 당황시키며 티끌만한 자존감을 세우려고 했다는건데 대개는 안 먹혔다. 더 세고 독한 말에 찔끔할 뿐이었다.

 

 은유를 이해 못해서 소설이 어렵다고 하는 나는 어쩌면 너무 쉽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하고 혼자 흥분해서 볼을 붉히기 일쑤였다. 직관적인 것에 마음을 열고 자신이 믿는바대로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믿는 것을 의심하면서 남들처럼은 안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고 고집대로 끝까지 나아가지도 못했다.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가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젠 인사 정도로 끝나면 안 될 것 같다. 사회적 책임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이젠 좀 알겠으니까. 이건 내 서재의 주제 같은거였던가. 예전에도 느꼈던걸 다시 나답게 호들갑 떨면서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걸까. 

 

 

 

 

 

 

p.s 불량주부님 책 내신거 축하드려요. 불량주부님 글을 좋아했는데 한권의 책으로 묶여서 나온다니 무척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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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8-0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아치님.
:)

Arch 2013-08-07 15: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다락방님 ^^

네꼬 2013-08-0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이 보시는 강아지, 저도 보고 싶어요. 인사보다 조금 더 스며드신 다음에 또 얘기해주세요!

Arch 2013-08-07 15:08   좋아요 0 | URL
얘는 나를 보면 고민해요. 짖어야 하나, 꼬리를 흔들어야하나. 그 짧은 순간 이 애 맘이 읽힐 때면 이 아이가 참 사랑스러워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