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갈 채비를 했다. 처음에 저수지인 그곳을 봤을 때는 차로 북적이는 도로와 아파트 사이에서 녹지 조성을 위해 구색을 맞춘 공원이라고만 생각했다. 가서 볼수록 낮과 밤, 저녁의 풍경이 다르고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도도 낮춰서 소란스럽지 않고 분위기가 은은하다. 은은한 분위기 속에서 젊은 연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나만' 안다. 그 동안은 철봉에 매달리거나 공원을 한바퀴 도는게 다였지만 얼마 전부터는 에어로빅을 한다. 전에 한번씩 에어로빅을 하는 분이 지자체에서 지원을 받아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것 같다.


 어두운 조명은 야외 에어로빅에 생기를 준다. 유난히 빠른 음악에 맞춰 온몸을 흔들어대는 '아는 사람'을 보면 그게 누구라도 살짝 민망할 것이다. 모두들 누군가의 민망함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저 힘차고 절도 있게 강사분을 따라하면 되는 것이다. 희미한 가로등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격렬하게 흔들리는 엉덩이는 섹시하지 않다. 모처럼 공원에 왔거나 산책을 나온 연인들이 보기엔 생뚱맞다. 누군가 환호하지 않아도 묵묵히 동작들을 따라하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녀들은 그렇게 그 저녁의 어둠에 빠져있었다.


 중국에 갔을 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율동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렵지 않은 동작을 부지런히 따라하는 사람들 틈에서 눈꼽도 떼지 않고 나도 같이 한 적이 있다. 전문적이지 않은 동작은 내 안에 숨겨진 댄스본능을 일깨우는건 아니고 그냥 따라해보고 싶은 의욕을 줬다. 땀날 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히 몸을 움직이고 안 쓰던 근육을 늘리는게, 다른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는걸 보는게 말이다. 


 에어로빅을 따라하는 사람 중에 꼬마가 한명 있었다. 자기보다 큰 자전거를 타느라 춤 추는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지희가 아이랑 같이 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지희는 나에게 귓속말로 어린 애가 야무지단다. 5살 먹은 아이는 동작을 곧잘 따라했다. 언니처럼 한다고 자기도 언니 귀에 귓속말도 해가며 나를 가리키며 아줌마가 언니 엄마냐며 묻는다. 발그레한 볼과 건강해보이는 긴 머리를 찰랑이며 춤을 추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야무지다고 하는 지희와 저녁을 많이 먹었으니 더 가열차게 몸을 움직여야한다는 세속적 욕망에 휩싸인 내가 그렇게 한참동안 몸을 움직였다.


 몸이 쉬이 지치자 지희에게 가자고 했다. 으례 그렇듯 나는 아이에게 엄마랑 같이 왔느냐, 엄마도 같이 에어로빅을 하냐고 물었다. 아이는 저만치에서 호수 근처 난간에 기대어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 엄마랑 안 왔나보네. 집으로 돌아가는 횡단보도 앞. 아이를 안은 남자가 앞에 있다. 그 아이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지 얼마 안 돼 아이는 어두운 건물 속으로 들어간다. 5살이고 통통한 볼을 가진 아이였다.


 이삿집에서 다녀갔다. 포장이사를 할지 일반이사를 할지, 내가 알아본걸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화장기 없는 여자는 품이 큰 작업 바지를 입었다. 목에는 튀어나온 점이 몇개 있고 손가락은 부어 있었다. 설득적이지도 저자세로 계약할걸 사정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류의 감정이 낯설다. 더 이상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분과 계약을 했다. 정자체로 또박또박 써진 글씨와 이사를 할 때 준비해야할걸 말하는 정감있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여자는 나가면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맛있는걸 많이 해주지 못한게 아쉽다는 말을 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소홀했는데 지금은 다 커서 알아서 먹고 다니는게 서운하다고. 저녁마다 뭘 해먹어야할지 고민하던게 떠올랐다. 


 대부분의 저녁엔 그저 가만히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린다. 숙제를 끝낸 아이들이 다투지 않고 조용히 잠들기를, 나 역시 졸음이 스스르 몰려오길 말이다. 어떤 날은 10시만 지나도 잠이 쏟아지고 다른 날은 12시가 넘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어쨌든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잠이 든다. 엄마가 싸다고 산 편백나무 베개이다. 황토색 물이 들었고 베갯잇을 묶어서 속을 고정시키는 옛날식 베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2-10-3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서든 좋은 밤을 즐겁게 누리시기를 빌어요.
새 보금자리도 옛 보금자리도
모두 내 삶을 예쁘게 이끄는
아름다운 곳이겠지요.

Arch 2012-10-31 10: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맥거핀 2012-10-3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글이 참 좋아요.

Arch 2012-11-01 19:49   좋아요 0 | URL
다른 누구보다 맥거핀님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저는 완전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