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듬지는 나무의 꼭대기 줄기이다. 우듬지란 말을 두권의 책에서 본적이 있다.


밤은 노래한다에 나온 구절은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 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 이다. 어떤 경지 혹은 이면을 봐버린 사람은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김연수는 소설 속에서 이 구절을 여러번 불러낸다. 하라 켄야는 '포스터를 훔쳐라'에서 우듬지에 올라가 본 사람은 그곳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줄 필요가 있다면서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라 켄야는 디자이너라는 본업만큼 에세이스트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그의 글은 에세이 탐독 전문 독자인(누구?) 내가 봐도 참 좋아 두장 건너 한장은 꼭 책 귀퉁이를 접어놓을 정도였다.
김연수의 우듬지에 대한 얘기는 멋진 말이긴 한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버릇이나 습관을 기껏 바꿔놓고도 무심결에 그래버리는 것처럼 이면의 충격이나 감동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까마귀는 다시 뜰을 거닐고 가끔 우듬지를 바라보는걸 낙으로 삼지는 않을까. 아니면 우듬지에 올라가본 적이 없어 우듬지라는 이면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치니님의 사루비아 다방 선정 도서 추천책을 읽다가 오오, 하다가 아차 싶은 구절을 만났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에 관한 부분인데 다음과 같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가 뭐야?” 보스는 선우에게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캐묻는다.
보스의 믿음은 원인-결과로 확인되는 부하의 객관적 충실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객관성을 비집고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부하의 주관성은 단지 배신의 시늉이 아니다. 말하자면, 보스는 그가 조직의 세계에서 ‘돌이킬 수 없이’(이것은 이 영화의 채택되지 못한 제목이기도 했다.)어긋난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직감했던 것이다. 사과의 맛을 본 아담이 돌이킬 수 없이 낙원에서 멀어진 것처럼, 소크라테스를 만난 플라톤이, 혹은 예수를 만난 바울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해간 것처럼, 그 여자의 어떤 이미지를 접한 그는 이미 객관성(인과의 충실성) 속에 붙잡아둘 수 있는 조직의 단말기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스의 과도한 반응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선우는 늘 자신의 소임을 오차 없이 수행하는 해결사로서 ‘체계의 노동’에 완벽했지만, 스쳐 지나가야만 했던 그 여자의 인상에 밟힌 그는 실없는 ‘정서의 노동’을 자임하며 보스의 체계와 치명적으로 대치한다. (‘체계의 노동’이나 ‘정서의 노동’과 더불어 삼발이를 이루는 ‘인식의 노동’은, 선우가 자신이 몸 바쳐온 그 체계와 치명적으로 대치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행적으로,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다.)
우듬지는 버릇이나 습관보다는 좀 더 관념적이다. 예컨대 관습은 도덕의 이름을 빌려 제도에 얹혀있는 것 뿐이라던가, 여성우위나 남성비하가 아닌 진짜 페미니즘은 뭘까, 지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란 의식을 하면서 사람의 행동이나 말은 예전과는 좀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을 습관이나 버릇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조금 달라진' 것일 뿐이니 뜰로 내려앉는건 순간일 뿐이다.
이런 면만 놓고 보면 나는 사람의 변화나 진보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뭔가를 권하고 나에게 강박적으로 주문을 외우거나 자책하고 속상해하는건 왜일까. 자기계발와 위안의 덫 사이에서 헤매는걸까. 여전히 내게 뭔가 남았다는 희망이 있는걸까. 느즈막한 저녁에 배불리 밥을 먹고 '성균관 스캔들'을 보는 정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는데서 왜 불안한 만족을 느끼는걸까.
'포스터를 훔쳐라'를 읽으며 모두가 모두의 이야기를 한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농심은 과자의 뒷부분에 나온대로 과자를 만드는걸까? 회사 컴퓨터로는 아무리해도 안 되는 양면 인쇄를 같은걸 제본소에서는 어떤 식으로 척척 해내는걸까.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기자, 소설가처럼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다면 어떨까. 물론 인터넷 매체에 자기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기술적이거나 단도직입적인 것 말고 문화인류학자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듯이 촘촘하고 삶의 결을 따라 이야기를 한다면 어떨까.
이런 방면에서 가장 뛰어난건 하라 켄야가 아닐까 싶다. 디자이너로서 철학은 물론 일을 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까지. 그의 글쓰기처럼 나도 나의 일에 대해 쓰려 했으나-피아노는 어떻게 닦아야할까(가 그 시도)-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상황을 시트콤처럼 보고 무리해서 웃기려고 한다.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소재나 전문적인 내용도 과도한 의욕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어쩌면 일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듬지에 올라가보지도 못했는데 우듬지 얘기를 한다니, 아니될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