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서재분이 귀농귀촌 3종 세트 책을 권해주셨다. 이 책은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인데 인용한 곳은 ‘살구나무와 이웃들 그리고 신입생’ 부분이다. 표지가 명랑해서 자의식 과도한 귀농형 인간의 회고록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웬걸, 완전 괜찮은 책이었다. 도시에서도 고만고만 행복했으면서 시골에 가면 아주 많이 행복해질 것처럼 ‘시골을 낭만화’하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타자화하는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이 책은 그 지점을 잘 짚어준 귀농, 귀촌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사는 동네의 성실한 기록자이다. 때론 성실함이 지나쳐 적나라하기까지 하지만 시골에서 사무장을 한다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 수 있을까란 막연한 질문들을 곰곰이 되씹게 한다. 지리산 닷컴의 이장인 저자가 쓴 이 책은 내가 어렴풋이 꿈꿔온 기획이기도 했다. 벼의 사계를 담고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꼴리는대로 기록하고 알아가고 묻는 것 말이다. 지난해에는 마쓰모토 하지메를 닮고 싶었는데, 올해는 권산씨의 씩씩함을 닮고 싶어졌다. 몹쓸 변덕 같으니 



‘지정댁 방식’-시멘트 마당 때문에 오래된 살구나무를 베는 것-이 이곳 사람들 방식이고 그녀들로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이곳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영원히 이곳 주민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전한 이곳 사람이 되는 것은 농약과 화학비료르르 인정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날은 아닐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녀들이 살아왔던 더 많은 이야기들을 통째로 하나의 잣대로 규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자연이다, 생태다’ 도시에서는 책에서 읽은 글들을 보고, 또는 간혹 여행길에 만나는 돌담과 흙길의 소담함에 마음을 두었지만 막상 시골에서 돌담과 흙마당은 애물단지다. 사는 사람들에게 돌담은 매년 보수해야 하는 귀찮고 낙후한 어쩔 수 없는 담벼락이며, 흙마당은 고추 하나 내어 말리지 못하는 질척거리는 땅에 불과하다. 철이면 철마다 건조시켜야할 작물이 어디 한두 가진가? 도시 사람들은 자연건조 태양초에 유기농이다 뭐다를 더해서 원하지만, 막상 그들이 찾는 자연광 건조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시멘트 마당이 적격이다. 시멘트 마당이 없었다면 도시에서 먹는 고추의 구 할은 건조기에서 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돌담과 자연건조 태양초는 공존하기 힘든 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지정댁은 ‘보로꾸 담’을 원하고 도시 사람들은 ‘자연건조 태양초’를 원한다.

 

 내가 왜 농약을 하지 않는지 그녀들도 잘 안다. ‘뭔 말인지 알어. 한번 혀봐.’ 이것이 그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기본 시선일 것이다. 나는 그 ‘차이’를 인정하고 완강하게 저항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머물다보니 농약조차 그녀들 기준으로는 ‘작물들이 짠혀서’ 약을 주고 주사를 처방하는 일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들은 작물들을 사랑해서 화학비료와 농약을 정기적이고 습관적으로 뿌려준다.

 

 그렇게 뿌리고 남은 농약을 이른 새벽에 두어 번 나의 텃밭에 뿌린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무슨 인생철학이 손상된 것처럼 시비 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녀드르 방식으로 나를 도운 것이다. 무엇보다 나의 텃밭은 생계형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나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주장하지는 않겠다는 생각 또한 그녀들의 본심을 염두해 둔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녀들도 안다. 그래서 간혹 해거름에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고추 따갖고 가. 끝물이라 요즘은 약 안 흔께 걱정 말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농약 텃밭이 아니라 이런 일상의 신뢰와 배려다.


 일상적으로 나와 이웃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룰이 존재한다. 이곳 아주머니, 엄니, 할머니들은 지리산닷컴 사무실 문턱을 넘어서지 않는다. 용건이 있을 때면 가장 가까운 지정댁이나 운암댁, 대구댁, 대평댁은 각자의 방식으로 밖에서 나를 부르고 대꾸를 기다린다. 이제 창문이나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와 박자, 강도만으로 누가 나를 찾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절대 지리산닷컴 문턱 경계선을 넘지 않는다. 차 한잔 마시자는 나의 제안은 항상 거절당한다.


 나의 초청을 거절하는 그녀들의 이유는 다양하다. 그리고 불쑥 창문을 두드리고 나의 인기척을 확인하면 밖에서 창문을 열고 감자나 옥수수 접시를 넣어주고 간다. 그녀들에게는 한가로이 앉아 커피를 나누며 방담을 나누는 문화가 없다. 그것은 사치다. 시간낭비며 그 시간에 ‘깨나 털겠다’라는 것이 살아온 이력이 남긴 유전적 문신이다.


 시골은 태생적으로, 구조적으로 도시와 다른 방식의 번잡스러움과 간섭이 많은 곳이다. 말이 나의 입술을 빠져나가기도 전인데 내가 하려 했던 말은 이미 마을 입구에 도착한 경우가 허다하다. 도시는 익명을 보장하지만 이곳은 익명이 존재할 수 없다. 마을에 외지 사람이 등장하면 금세 마을로 소리 없이 전해진다. 이를테면 ‘요즘 젊은 것들은 어른 앞에서 담배를 펴쌓더만’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불만이, ‘그 컨테이너 박스 있자녀? 아 그 즐믄 놈이 길 가상에 따악 하니 서서 담배를 펴쌓네’와 같은 구체적 대상을 향한 비난으로 진화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귀찮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을과 담을 쌓는 경우이다. 그러면 마을의 그녀들은 친절을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어버린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방식과 문화가 다른 것이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사생활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하고 이곳의 그녀들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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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1-02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부터 가을까지는 바쁘시고, 겨울 한 철은 모두들
그야말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면서 지내셔요.
겨울에 초대를 하시면 즐거이 오시지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좋은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면 좋겠어요.

Arch 2012-01-03 12:46   좋아요 0 | URL
된장님 반갑습니다. 서재에 한번 들른적 있었는데^^ 아이들이 참 예쁘더라구요.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간혹 이렇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촘촘하게 보듬는 이야기는 좋아요.

nada 2012-01-0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약을 치네 안 치네, 원주민들과의 실랑이는 어느 귀촌일기에나 나오더라구요.
근본적으로는 나라가 농업을 버렸기 때문일 텐데, 무조건 농민들 탓만 할 수도 없고..
참 어려운 문제예요.

길을 내든 뭘 하든, 어떻게든 나무 서 있는 자리를 피해볼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베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안타까워요.
그 자리를 몇 십 년 지킨 나무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ㅠㅠㅠ

Arch 2012-01-04 14:32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 말미에 국밥집 얘기 한 부분이 찡했다는거죠~ 저도 그랬어요.

농약도 유전자변형도 실시간으로 인체실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농사를 짓는 분들이 문제가 아니라 예쁘고 윤기나고 단 야채나 과일을 사려고 하는 소비자들 문제 같단 생각도 들고. 생산지와 멀리 떨어져있다보니 농약에 대한 걱정도 별로 안 하는 것 같고. 걱정을 하는 맘을 돈벌이로 보고 유기농 마케팅에 열 올리는건 또 싫고. 정말, 그래서 어쩌라고...인 것 같아요.

끝부분에 왜 자기는 농촌에 와서 사람들을 바꾸려했는지 모르겠다며 도시 사람들을 바꾸려고 해보진 않았다는 얘기를 하는데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나온 얘기가 생각났어요. 스리랑카에서 쓰나미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 서양 의료인들이 대거 투입되거든요. 물적 지원을 넘어서서 좀 과도할 정도로. 그렇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 굿을 하거나 민간 치료법을 알려준다면 어땠을까요. 앞엣건 있을 법한 일인데 뒷 상황은 좀 뜬금없게 느껴지잖아요. 그 차이를 세밀하게 기술하고 느끼고 싶은데 잘 안 돼요.

나무 입장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자의 심경변화나 농촌 적응기가 더 흥미로워서. 살구나무가 있는 마당을 시멘트 바닥으로 만들려고 베어낸거라 태양초 얘기가 나온 것 같은데.

2012-01-05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