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괜찮은줄 알았다. 나에 대한 말이 왜곡돼서 외부로까지 흘러나간걸 굳이 전해주는 다른 사람만 아니었다면. 그 다른 사람이 조직이란 이런 것이다, 조직이 나를 밀어내면 내가 바뀌어야한다는 열변을 들을때만 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 사람들한테 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례적인 관계와 뻔한 수작만 부리는 것에 동조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일하기 싫은건 둘째치고 대체 언제부터 밥벌어 먹고 사는 일이 가혹한 육체적인 마모를 겪거나 정신적으로 고도의 인내를 해야하고 훼손을 감당하는 일이 되었는지 짜증나 죽겠는거다. 게다가 조직 어법에 맞지 않은 언행과 존재 자체가 늘상 부인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참기 힘들다. 쪼잔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역겹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이런 모든걸 감당할 정도로 어른이 되지 못했거나 혼자 고고한척 놀이를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고고한척이 아니라 사실 왕따, 아니 은따가 된 것도 모르고.
아침에 도시락을 싸다가 a에게 점심 먹는게 즐겁지 않다는 말을 했다. 어디 가나 있는 얌체와 그 얌체가 뭔가를 조금 갖고 있을 때 표변하는 모습이 좀 웃긴달까. 나는 그 웃김을 조소하는 대신 싫은티를 내고 앉았어서 결국 사람들의 오해를 사고만다. 오전에 a가 전화를 걸어 그깟 점심 식사까지 스트레스 받는걸 보니까 속상하단 말을 건넸다. 그때 나도 모르는 에너지 같은 것이, 조직의 일원이면서 독자적인 아치란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말이 생겨났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나 예전에 몇달(와, 정말 오래 울궈먹는다.) 연극을 한적 있잖아. 지금도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맘이 편할거 같아. 왜 저럴까, 왜 이래야하지라며 속상해할게 아니라 조직의 일원이 되는 연기를 하는거야. 궁금한걸 묻기보다 직접 알아보고, 답답한건 연기자의 연기 특성이거나 연기를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어떤 장치같은거라고 생각하는거지. 상사가 말하면 내 생각을 말할게 아니라 '네'라고 대답하는거야. 왜냐하면 조직의 일원이란 역은 고집 세고 문제를 일으키는 타입이 아니거든. 조직의 일원은 안전에 대한 문제나 아주 큰 일 이외에는 'No'란 답을 하면 안 되는거지.'
이렇게 써놓고보니 다시 씁쓸해진다. 시스템이 굴러가는걸 나 혼자 바꾸려는 어마어마한 생각이 있거나 투철한 사명감이나 직업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어긋나는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큰 문제인 것마냥 부풀리는게 좀 힘겨운 것 뿐인데 무슨 연기까지 싶은거다. 이러다 진짜 감정은(진짜 감정은 뭐고?) 뭔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할까, 의례적인 사람이 될까 걱정된다.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직원이 상사들의 무능함과 자신이 배운 지식과 다르게 돌아가는 시스템이 좀 이상하단 얘기를 한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래, 너라면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을 수 있을거야, 이 조직도 좀 더 효율적인 방식(노동의 유연화 이런거 말고)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된거야. 너는 좀 더 야무지고 똑똑하게 하렴.'
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너도 얼마 못갈걸.'
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그나마 개운하다며 밝게 웃었다. 젊고 야무진 이 아가씨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