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으로 들어서자 슈퍼 하나가 보였다. 솔직한 누구 입에서 아무 말이나 툭툭 뱉어지듯 골목에 있어서 상호가 골목 슈퍼인 곳이다. 골목 슈퍼에서는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아저씨들은 여린 잎의 무 이파리에 집 된장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신다. 불콰한 낯의 아저씨들은 왠 여자의 출연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옥수수 알갱이가 씹히는 아이스크림을 고르고선 셈을 하려는데 아저씨는 주인에게 학생이니까 싸게 해주라고 한다. 학생 아니라고 했더니 꼭 대학생 같다며 수작을 건다. 그 기세가 썩 나쁘지 않았다. 나도 낮의 열기에 취했다면 아마 자리에 앉아 거하게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며 안주가 단촐하다며 히힉 웃어댔을테니까.


 
 h시에 온 것은 우연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원룸과 유흥주점, 고기 집, 마트뿐이다. 좀 더 색다른걸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원룸과 고기 집, 마트를 벗어난 곳을 가고 싶었다. h시는 버스로 몇 분 안 걸리고 시내버스가 수시로 다니는 곳이다. 내가 제대로 피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도 괜찮았다. h시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눈에 띄는 프랜차이즈 상호를 보며 결국 뻔한 걸 뻔한 방식으로 피하는 방법은 없는건가란 생각을 몇 분 정도만 하고 목적없이  무작정 걸었다.

 

 h시의 성당과 사격장, 근처에 있는 몇 억짜리 기념탑을 훑어봤다. 대체 이런 큰 건축물을 세워야만 뭔가를 기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답답하다. 근방은 인적이 드물어서 무척 고요했다. 오래 된 나무가 있고, 백구 한 마리가 갸우뚱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도 고개를 모로 돌려 개를 쳐다보며 멍멍 해봤다.
 살짝 느끼해 보이는 아저씨가 공원 근처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저씨한테 가서 h시 시장에 가려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멀다면서 대체 거기는 왜 가려고 하냐고, 오늘이 장날이냐고 묻는다. 네네, 아무것도 모르고 준비도 안 한 채 무작정 떠난 사람이 뭘 알겠어요 대신 네네를 하는데 아저씨가 말한다.

- 그나저나 바나나 먹고 가요.

 h시의 사람들은 뭔가를 권한다. 화장실을 갔다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나오는데 경찰 아저씨는 하드를 권했고, 부흥 슈퍼 아저씨는 좀 더 평상에 앉아 있을 것을 권했다.

 언덕에서 내려오자 h시의 읍내가 보였다. 골목 사이사이 오래된 상가와 세월의 잔때가 묻은 돌담이 보였다. 만져봤다. 나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을 부러 찾아서 보고 느끼는 것에 둔하지만 오래되고 낡은 것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물론 그걸 제대로 보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한참을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파서 쉴 곳을 찾았다. 도시의 쉼터가 카페테리아라면 읍내의 쉴 곳은 누군가 사심 없이 마련해놓은 평상이다. 부흥슈퍼 평상에 앉아 쉬고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물건을 실어내리는게 보였다.

- 저 여기 앉아도 돼요? (앉아있으면서 질문을 한다.)
- 누가 뭐라 그래~

 h시의 화법은 색다르다. 앉아도 된다, 앉으면 안 된다가 아니라 명확한 의미 전달 대신 실실 웃음 나게 하는 말을 한다. 아저씨가 다시 자전거에 뭔가를 실으시길래 도와주려고 일어섰더니,

- 앉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디

한다. h시의 말에는 오지랖 코러스가 뒤따른다. 지나가는 옆집 가게 아주머니에서 주인 아저씨를 잘 모르는 사람까지 우리 둘 사이의 대화를 거든다. 이 상황을 지켜보지 않은 것은 물론 어떤 말을 했는지도 감이 안 잡힐만한데도 꼭 끼어들어 말에 말을 보탠다. 그게 꼭 상황을 객관화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코러스는 아니지만 실실 웃음이 나는건 어쩔 수 없다.

 평상을 떠나는 길에 아저씨께 홍삼음료를 드렸다. 당신이 대접해야하는데 왜 자기가 그걸 받냐고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던 부흥 슈퍼 아저씨. 아저씨의 가게는 아저씨의 인생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빼곡이 들어찬 물건들과 구석에 마련된 방에 붙은 자식, 손주들의 사진. 당신의 지루함을 달랬을 고물 텔레비전과 몇몇 집기류들.

 섬처럼 존재했다가 수익이 나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편의점이 아니다. 내 필요로 하게 된 가게지만 어느새 자신의 삶 한 켠에서 순하게 숨 쉬는 짐승처럼 되어버린 슈퍼. 자기 자신처럼 낡아버려 휘황찬란한 편의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 슈퍼.

  장사 안 돼도 단골 때문에 문 열어둔다는 부흥 슈퍼 아저씨. 그 정도의 품이래야 평상 하나 뚝딱 만들어 지친 다리를 쉬게 할 수 있는거겠지.

 부흥슈퍼에서 산 두유는 유통기한이 한참 남아있었는데도 상해 있었다. 그게 아저씨 마음 같아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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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8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da 2011-05-08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참 좋아요.
어제 읽고 오늘 한 번 더 읽는데도 좋네요.
읽는 내내 슬며시 미소가 지어져요.
상한 두유.. 에구, 어떡해요.ㅠㅠㅠㅠㅠ

Arch 2011-05-12 09:21   좋아요 0 | URL
하루키의 여행법 읽으면서 내가 여행기를 쓴다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어요. 여행기는 아무래도 여행을 하는 사람 안에서 많은 얘기가 나올 수 있어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전 아직 부족하죠.
꽃양배추님,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두유를 먹는 순간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돌걸 생각했는데 쓰고 탁한 맛이 났어요. 순간적으로 이래서 편의점을 가는거야,란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좀 맘이 안 좋았어요. 그건 제조업자가 잘못 만든건데, 아저씨 잘못이 아닌데.

다락방 2011-05-0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페이퍼를 읽고 아치님은 진짜 나랑 엄청나게 많이 다르구나, 하는걸 깨달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 페이퍼 좋아요.
:)

이를테면 아치님은,
'h시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눈에 띄는 프랜차이즈 상호를 보며 결국 뻔한 걸 뻔한 방식으로 피하는 방법은 없는건가란 생각을 몇 분 정도만 하고 ' 라고 썼잖아요.
저는 가까운 지방에 결혼식 참석차 갔다가 너무나 낯선 환경에 완전 주눅 들어서, 고작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을 그곳에 있었을 뿐인데, 남부터미널에 내려서는 눈에 띄는 프랜차이즈 상호를 보고 안심하고 안도했거든요. 어휴, 왔구나, 하고 말이지요. 밥도 남부터미널 에 도착해서야 먹었어요.

Arch 2011-05-12 09:47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이랑 찌찌뽕^^ 나는 알아요, 다락방은 도시여자사람인걸.

다락방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잖아요. 나는 오래된 동네, 낡은 골목, 논이랑 바다랑 산이 보이는 곳에서 나고 자랐고. 다를 수 밖에 없죠. 저는 어디서나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랜차이즈 상점보다 주인 각각의 개성이 담겨있는 가게가 더 좋아요. 우리집 앞 편의점에선 가족들이 하는지 정해진 틀 안에서 살짝살짝 생활하고 있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아, 도시여자사람 좀 보고싶다^^

다락방 2011-05-12 14:22   좋아요 0 | URL
오늘 출근했군요!!!!!

Arch 2011-05-12 14:30   좋아요 0 | URL
다락방이 이제 들어왔으니, 그럼 남은 한명은 누굴까. 아침부터 딱 한명만 찍혔었는데...
방문자수 많은 다락방은 이 기분 모를거야^^

네, 오늘 출근했어요.

다락방 2011-05-12 16:02   좋아요 0 | URL
왜 모른다는거야!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즐찾 40명되면 벅차서 서재를 운영할 수 없을거야. 그러니 즐찾 40을 찍는 순간 나는 서재를 은퇴하자.

이런 생각 했던 시절이요. 그런데 정신차려보니 어느틈에 55명이 되어있었고, 아아, 나는 이제 너무 커버려서 돌이킬 수 없겠구나, 이 55명을 두고 은퇴를 하는건 너무나 무책임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어요. 딱 40일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알아요, 안다구요!

Arch 2011-05-13 11:54   좋아요 0 | URL
정신을 잃은거군요! ^^

다락방, 당신을 즐찾한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도 좋지만 다락방이 서재에 있는게 행복하고 좋아서 있어주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 그러고 있다는거 나 다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