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술을 마시러 갔다. 주전자 한통 가득한 막걸리를 먹을 때마다 안주를 푸짐하게 내주는 옛촌 막걸리집. 족발, 게찜, 삼합, 새우소금구이, 삼계탕은 다 그림의 떡이었지만 김치찜과 야채 부침개, 꽁치 구이는 정말 맛있었다. 김치찜의 야들거리는 맛하며 과하지 않은 신맛이 아직도 혀끝에서 맴돈다. 그에게 이 집 김치찜은 너무 부드러워서 최고라고 말했더니, 할머니처럼 이 쓰기가 싫나보다란 말을 해준다. 예리하긴.

 그의 후배들이 왔다. 친근한 농담과 막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말들이 오고 갔다. 단둘이 갖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나로선 꽃남 하나 없이 여럿이서 함께 먹는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술을 먹으면 관대해지는 분위기를 틈타 지 꼴리는대로 술을 권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멀쩡한 편이었지만 지들끼리만 얘기를 한다고 해서야.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지도 빠지지도 못한채 멀뚱하게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황말자'가 됐다. 분명히 서로 통성명도 했고, 처음 몇번은 누구씨 어쩌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갑자기 황말자라니. 처음 보는 사이에 무례하단 생각을 했지만 그걸 따질만큼 내 정신이 온전치는 못했다. 게다가 거짓말 안 하고 엄지 손톱만한 모기들이 아치의 야윈 다리-하악하악-를 물어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꽤 관대한 표정으로 '나는 황말자니까 모두들 편하게 생각해줘요.'란 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물고 늘어지던 아치는 안녕, 금요일의 아치는 황말자가 되었다.

 황말자란 이름이 어때서!  
 황정자란 언니와 황순자란 동생을 둔 황말자는 꽤 씩씩하고 기운이 넘친 여자인가보다. 나를 황말자로 부르기 시작한 후배는 꽤 세게 나를 밀어부쳤다. 아니 처음 만나서, 오랜만에 마실 나온 사람한테 이 사람이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다니! 아치라면 삐지거나 무시했을 상황을 우리 말자씨는 어림없다는 식으로 넘겼다. 황말자가 된 아치는 꽤 말발이 세지고 세진 말발에 유머도 간간히 섞어가며 기세등등 막걸리 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늘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사람. 대범하고 융통성 있지만 정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 나는 황말자씨가 좋아졌다.

 물론 황말자가 된 아치가 억울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모처럼 샤랄라 치마도 입고 굽 있는 구두도 신었다. 눈매를 또렷하게 한다며 나오기 3분 전에 속성으로 쓱쓱 칠한 아이 쉐도우와 마스카라까지, 아치 오늘 멋 좀 냈는데 싶은 차림이었다. 무슨 말을 하면 고개를 외로 꼬로 흥하며 코웃음을 치거나 막걸리 잔에 든 술을 두 손으로 받쳐서 조심스럽게 먹어야할 것 같은 차림새 말이다. 막걸리랑 그런 차림이 어울릴지와 내가 부리는 교태 내지는 다소곳함이 코믹스러울거란 예상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황말자가 되어 억센 말들을 쏟아내려니 배알이 꼬일 수 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P때문에 환경주의자에 뭐에 뭐에 온갖 주의가 붙은 아치였을 때보다 이름의 포스만으로 모든걸 다 설명해줄 수 있는 황말자가 됐을 때가 더 편했다. 황말자씨는 뭐가 옳고,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황말자씨는 실수를 했을 때 변명을 하기보다, 미안하다고 제대로 말한 후에 다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다. 황말자씨는 술값 계산을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해버리고-이건 꼭 누구랑 닮았어요!-, 왜 술값을 냈냐는 소리에 내가 너랑 만나는거 좋으니까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황말자씨는 짖궂은 농담에 얼굴을 붉히는 대신 더 짖궂고 못되고 야릇한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길줄 아는 사람이다. 
 
 
 느즈막히 연두색 모기장에서 일어났다. 어지럽고 기분이 과히 좋지만은 않았다. 언제쯤 말자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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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1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요일에 Arch 도 술마셨구먼! ㅎㅎ 그러면서 무슨 나를 질투한다고! ㅎㅎ
내가 문자보내고 나한테 문자했던 사람은 Arch 였어요, 황말자였어요?

샤랄라 치마와 굽 있는 구두는 뱃살이 들어간 Arch 에게 찬란한 아름다움을 주었겠군요! 모기들도 질투해서 다리를 물어뜯을 만큼 말이지요. 모기는 암컷만 피를 빤다잖아요. 암컷들이 다다다닥 들러붙어서 Arch를 질투한거야.

마지막은 멋진데요. 내가 너랑 만나는거 좋으니까,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술값을 계산해주다니!

Arch 2010-07-18 11:13   좋아요 0 | URL
그건, 그건 나가기 전이었거든요. 잘까 나갈까 고민하고 있을 타임, 물론 아치여서 맘껏 부러워했죠 ^^
뱃살은 원상복귀에요. 복근 욕심은 좀 과한 듯. 간지러워 죽겠어요. 모기 침 때문에 간지러운건가요? 모기가 나한테 침 발라놓은거야? (뭐야?)
아니아니, 그건 D모시기 님이라고, 술값을 막 자기가 내고 그러는 사람이 있어요. 아치가 소읍에선 방귀 꽤나 뀌는 사람이란걸 모르는거죠. ㅋㅋ

다락방 2010-07-19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산에 여자 혼자 잘 만한 호텔 있어요?

Arch 2010-07-19 15:59   좋아요 0 | URL
호텔은 있는데 여자 혼자 호텔에서 자게요? 아치집 놔두고?

다락방 2010-07-19 16:15   좋아요 0 | URL
나 남의 집에서 못자는 여자사람 ㅎㅎ

Arch 만나러 가고 싶지 뭐에요. 만나서 술 마시면 나는 당일날 못 올라올 것 같고 자고 와야 할 것 같은데, 여자니까 아무래도 허름한 여관 보다는 호텔에서 자는게 좀 더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훗 :)


2010-07-19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7-19 17:09   좋아요 0 | URL
어머. 내가 새침해요?
나 털털 캐릭턴데? ㅋㅋ

Forgettable. 2010-07-22 04:21   좋아요 0 | URL
아치집 완전 좋음 ㅋㅋ 숙면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