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맹렬히 만나고 있는 P와 커피숍에 갔다.
그가 뭔가를 설명해주는 사이, 나는 치즈 베이글을 와작와작 삼키고, 까페모카를 꿀꺽꿀꺽 마셨다. 말을 마친 P가 씽긋 웃으며 말했다.
- 아치는, 커피 마시면 열대 우림이 훼손되고, 공정무역도 아닌데다(공정무역 커피도 한계가 있다면서), 커피를 한달 동안 마시면 커피 나무 한 그루가 없어진다고 하더니.
아, 그만 머쓱해져서 P의 까페라떼를 뺐어 먹고 말았다.
혼자 있다 보니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읽는 책들이
이런건데 단순히 책을 읽고서 혼자 알아서 실천하며 살면 좋


을 것을 여러 사람에게 말하고 다녔다.
그러다 오늘 딱 걸린거다. P야 된 사람이라, '지가 말해놓고, 저런다'며 퉁박을 주진 않았다. 그렇지만 남들에겐 엄밀하면서 내겐 느슨한 잣대를 들이댄건 문제였다.
고기 냄새를 못맡아서 타의에 의한 채식을 하면서도 고기가 빠졌던 국물은 날름거리며 먹고, 고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제법 잘 먹는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몸에 안 좋을 게 뻔한-라면을 끓여먹고 매해 여름마다 모기를 죽인다며 내 몸에도 안 좋은걸 모르고 살충제 파티도 벌였다.
모르는 게 약이지 싶고, 내가 뭘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런걸 다 지키고 사나 싶다. 그러다가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로 시작해서 맘대로 해버리는 짓들에 무감해지는 것도 견딜 수가 없고. 이래저래 능력과 의지는 모자라는데 의욕만 충만한 상태다.
* 여성주의를 아예 몰랐으면 좋았겠단 생각을 해본다.
좀스럽게 데이트 비용을 아낄려고 할 때나 왠만하면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릴 때면. 폼나게가 아니라 아등바등 사는 것만이라도 좀 벗어나고 싶을 때, 종마 탄 늙은이라도 만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면. 정녕 결혼이 결론이 아닌데도 간편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유해한 꿈을 꿀 때면 말이다.
타성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여행을 꿈꾸는 것처럼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내 자리가 있을 것 같다는 환상 정도일까. 어쩌면 내게 유리하고 입 맛에 맞는 여성주의가 좋았던 게 아닐까. 혹은 여성주의 자체보다 틀에 박힌 생각이 싫다는 아주 일반적인 호기심이 다였는지도.
그럼에도, 이 모순과 편협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와의 끈은 놓칠 수 없을 것 같다. 나를 이루는 것들의 정체를 조금씩 알게 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 구실 좀 하게 만든 게 여성주의였으니까 말이다.
* B에게 낙은 텔레비전 보기와 친구들과 어울리기다. 평소 B는 가사에 비협조적이다. 지난번 B가 한건 크게 터트린 후에 B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앴다. 이유야 아이들이 너무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블라블라 등등이 있었을 것이다. B는 그럭저럭 견디는 형편이었다.
어제 운동을 갔다 와서 모처럼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B와 시답잖은 예능 프로를 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B도 자려는지 방에 들어갔다. 다음 날 쓸데가 있다길래 그 애 방에 들러 USB를 놓고 오는데 B는 휴대폰으로 방송을 보고 있었다. 차라리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작은 화면의 낙은 너무 가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