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긴 시립 도서관의 디지털실. 옆자리의 남자는 뭐가 재미있는지 노트북을 보면서 3초에 한번꼴로 큭큭대며 웃는다. 옆 눈으로 찌릿 눈치를 주지만 진즉에 눈치 있는 양반이었으면 웃지도 않았을거란 생각에 눈을 거둬들인다. 추수한걸 거둬들이는 것도 아니고. 추수라는 말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비 온다고 또 이러고 있다.

 아침부터 노트북을 짊어지고 이곳에 온건 인터넷을 하기 위해서다. 자발적 느림을 실천한다는건 웃긴 소리고 생활비는 과연 얼마나 절약할 수 있을까 궁금했고 습관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소일거리를 하느라 다른 일 할 틈을 내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는지도. 인터넷을 하려면 큰 맘 먹고 해야 할 것을 메모한 수첩을 들고, 인증서가 필요할 때면 노트북까지 챙겨서 집을 나선다. 재미있다. 전원만 누르면 바로 인터넷에 접속할 때보다 조금 더. 불편한 게 그냥 불편하지만은 않다. 뭔가 빠지고, 일이 제대로 안 되고, 나는 왜 하는 것마다 요 모양일까 싶어 우울해지다가 아주 조그만 것에 반짝 기분이 좋아진다. 불편함은 약간의 편리함을 꽤 놀라운 신기술처럼 보일 수 있게 한다. 요즘 인터넷 접속이 그렇다. 궁상맞음은 내 취향과 맞다.

* 몇 달 전에 연극 끝나고 호기롭게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대'선언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며칠째 방바닥에서 등을 떼기가 싫은거다. 여행 가야 하는데, 여행을 꼭 가야 하는데, 이러다 일이라도 생기면 여행 못가는데. 간신히 등을 떼내고 여행갈 채비를 하는데 날이 춥다. 날이 풀려야 할텐데, 날이 추우면 여행갈 기분이 안 날 텐데. 날이 추우면 핫팩이라도 붙이고 떠나란 F 말에 힘을 얻어 무작정 길을 나섰다. 계획도 약속도 아무것도 없는 여행. 막연하게나마 김남희씨처럼 시골집 할머니 집에 머물며 남도를 떠돌 생각 정도를 했을까. 익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중앙 시장을 둘러볼 때까지만 해도 좀 신나 있었다. 내가 여행에서 좋아하는건 허름하고 낡아서 누군가의 눈에는 '재개발해야할 건물들이 들어찬 곳'으로 보이는 곳이란걸, 생활 때가 켜켜이 스민 곳이란걸, 낯선 사람에게도 말을 걸어주는 누군가라는걸 아마 조금쯤 알았을까. 

 파리지앵에서도 그러지 않는가. 여행의 참맛을 아는 사람은 한적한 골목과 값싼 식당, 그리고 활기찬 시장에 발길을 두는 사람이라고. 여수에 도착했다. 날이 추웠다. 점점 더 추워졌다. 터미널에서 오동도까지 걷는데 비까지 내렸다. 귀찮아서 우산을 안 썼더니 물에 빠진 아치꼴이었다. 여행 기분은 커녕 춥고 추레했다. 일찍 들어간 민박집에선 무려 7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봤다. 한달치를 죄다 본 셈이다. 이것도 여행 기념이라면 기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을 배경음 삼아 보통의 책을 읽었다. 책과 이별 가요에서 내 심정을 읽는 오바를 허용한다면,

 나 자신의 게으름과 좀 더 정상적인 관객들이 느꼈을 진지함을 비교하며 냉담과 자기 혐오가 뒤섞인 느낌에 시달리기만 했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 있고 싶은 욕구, 가능하다면 얼른 비행기에 올라타 집에 가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때의 심정은 딱 이랬다.

 느즈막히 일어나 돌산 대교를 거쳐 순천에서 남해 대교 가는 버스를 타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봤다. 하지만 밖에 나오니 또 추웠다. 이대로 포기하는가, 아니면 도전해볼 것인가. 도전은 날 풀리면 하는 게 좋겠단 대단히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고 익산으로 돌아왔다. 익산역에서 우동을 먹으며 생각했다. 여행은 무슨. 내가 사는 동네도 모르는 주제에.


* 그래서 동네 여행을 다닌다.


 낮에 도서관에서 가뭇 잠이 들었다 깨서였을까. 본격적으로 잔다며 엎어졌는데 좀체로 잠이 안 왔다. 해서 빌린 책을 다 반납하고 자전거를 탔다. 내가 가볼 수 있는 곳까지 가볼테야. 모처럼 따뜻한 봄, 바람이었다.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페달을 굴리며 엎어져서 잤으면 정말 억울했을 뻔 했겠다.

 골프 연습장을 벗어나자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시골길을 '나 혼자' 달리는 것도 모자라 처음 보는 새며, 풀벌레 소리, 유채꽃과 풀잎 냄새까지. 기찻길에 흐드러지게 핀 꽃과 어느 마을 초입의 파란 간판 무슨 상회. 낭만적인 인간이 되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감동에 취약한 나로선 사르르 녹고 말았다. 다리 힘이 빠질 즈음에 만난 한증막은 얼마나 반가웠던지. 앞으로 정말 그런게 가능하다면 전국의 한증막을 돌아다니며 기행평을 써보고 싶다.


* 아이들이랑  같이 잠들어서 새벽에 깼다. 더 잘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잠을 더 잤고, 늘 그랬듯이 꿈을 꿨다. 야무지게 두개나.

!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날 못잡아 먹어 안달 난 상사가 전화를 했다. 내가 그럴줄 몰랐다며 고소를 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혹시 내가 뭔가를 훔친걸 아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뇌에 1초간 머물렀다. 묵묵히 상사의 얘기를 듣는데 잘하면 내게 승산이 있어보였다. 나는 가만히 상사를 어떻게 힘들게 할지, 저렴한 것에서부터 지독한 것까지 하나하나 셈해 보았다.

!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 이 사람과 오늘 밤을 같이 있어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저 누군가일 뿐이라 12시 종이 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갈 채비를 했다. 나는 다급한 맘에 되지도 않은 억지를 부려볼까 하다가 가만히 있었다. 누군가는 아주 조용히 해변가 선술집-이 조합이란- 밖으로 나갔다.

 어디서 잔담. 바닷 바람이 몸에 축축하게 감겨들었다. 그때 옥찌들을 재우고 왔다며 B가 나타나 잘 곳으로 안내했다. 우린 고시원을 여관으로 개조한 못미더운 건물로 들어섰다. B가 건물 속으로 사라지는데 그곳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밖에 남아 1층의 튀김집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골목에는 튀김을 한 후 남은 시커먼 기름이 세숫대야에 담겨 있었다. 기름에 몸이 빠지면 꽤 뜨겁겠단 생각을 했는데 어느새 오른쪽 다리가 기름에 빠져있었다. 다리는 색이 곱게 튀겨져 있었다. 뒤늦게 발견된 튀겨진 다리를 놓고 분식집의 책임이냐, 내 책임이냐란 설전이 오고 갔다.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에 일어나 오른쪽 다리를 확인해봤다. 야들야들하게 잘 익어 있었다.


* 대개의 날들은 그저 묵묵히 살아갈 일만, 열심히도 말고 그 자리에서 쭉 살아야만 하는 시간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는 이런 나이듦을 바란게 아니라고 어딘가에 떼를 쓰기도 했다.-요즘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살이'도 하다 보니 는다고, 별일 없이, 아주 즐겁고 짜릿한 것 없이도 살아진다. 젊음의 유치함과 황당함과 무모함, 안하무인의 절망감까지도 가끔씩은 목마를 정도로 부럽다. 같은 이유로 젊은 게 정말 싫으면서도.

북으로 창이 난 내 방에 눕는다. 약간 춥고 어둡다. 요즘 내 맘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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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6-0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여행 다니면서 글 쓰시면 위의 김 남희님 못지않게 잘 쓰실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일, 열심히도 말고 그 자리에서 쭉 살아가는 일, 그거 만만치 않던데요.
오늘따라 arch님 글 속으로 몰입이 잘 되네요.

어째 이 정도 길이의 페이퍼를 쓰시면서 맞춤법 틀린 것도 하나도 없으시담~ ^^

Arch 2010-06-04 09:48   좋아요 0 | URL
항상 좋은 말 해주셔서 감사해요. 힘이 나는데요.

맞춤법은 한글 프로그램이 봐줘서 ^^ 히~

다락방 2010-06-06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춥고 어둡다. 요즘 내 맘이 딱 그렇다.
내 맘도 그래요, Arch님.

1층의 튀김집 옆에 앉아있었던게 꿈이라서 다행이에요. 정말로요.

Arch 2010-06-08 10:16   좋아요 0 | URL
나는 페이퍼를 묵히고, 다락방님은 댓글을 묵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