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빼어난 산문가 중 한 명인 발터 벤야민은 후에,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록한 적이 있다. 그가 다섯 살이었던 어느 늦은 밤,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사촌의 죽음을 담담한 목소리로 전했다. 어린 벤야민이 잘 모르던 사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벤야민에게 그와, 그의 죽음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했다. 어린 벤야민은 아버지가 하는 말들을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데, 아버지는 계속 사촌의 이야기를 했다. 후에 벤야민은 그 밤,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혼자 있기 싫어서 그랬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들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들의 방을 찾아온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지내는 여자친구의 아버지 또한 늦은 밤, 딸의 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취해서 들어온 것을 안 친구는, 정신은 말똥말똥 깨어 있었지만, 그냥 자는 척을 했다고 한다. 친구의 아버지는 한참 동안 딸의 머리맡에 앉아, 잠들어 있는(잠든 척한) 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웅얼웅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이고, 우리 딸, 이렇게 못생겨서 시집도 못 가고, 불쌍해서 어쩌냐. 아버지들에게 자식은, 때론 그 존재만으로도 많은 말들을 하게 만든다. 혼잣말이든, 속엣말이든.  

이기호의 독고다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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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1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도 나고 이 글을 읽고 이기호의 에세이라는 이 책을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넣은것도 나에요.

Arch 2010-03-12 17:33   좋아요 0 | URL
이런, 추천을 몰고 다니는 다락방 같으니.

hnine 2010-03-12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느닷없이 가슴이 찡....

Arch 2010-03-13 20:16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