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 뒤에서 대기하는 동안 독서등을 켜고선 만화책을 세권이나 읽었다. 만화책 읽는게 소설 읽는 속도와 별반 차이가 없는 나로선 꽤 많이 읽은편이었다. 죽기 위해서 나오는 역할은 처음부터 별로였지만, 끝까지 별로일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여타의 일처럼 벌려놓은건 한가득인데 달아오르지 못했다. 시큰둥했고, 가끔씩 눈이 반짝이긴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워크샵 공연인데 들러리를 선다는게 내키지 않았는지, 좀 갑작스러운 공연이었던건지, 허영심의 발로 때문이었는지, 공연 외의 잡스런 사항들을 체크하는데서 질려버렸는지, 어차피 지방 공연이란 '어차피'의 영향인지, 결국 말로 연기를 다해버려 뭔가를 발견해내거나 새롭게 깨달은 것 없이 스케쥴 따라가기에 급급해서인지, 잘한다는 말보다 서로 서로 깊게 상해가는게 보여서였는지, 진즉에 지쳐있어선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응원하고 보러와준 이들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연기보다는 식사 메뉴 개발에 더 매진했던 몇달이었지만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누구 말대로 뭐하나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는 아치인지라.

* 공연을 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 중 하나는
- 아치, 너 평소 때랑 다르지 않더라.
였다. 극중에서 화내는 장면이 꼭 나란 얘긴데 그런 면에서 고작 '그 캐릭터'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연기해내지 못했던게 분명해진거다. 뭔가 탐탁치 않았던건 내가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결과를 인정하기 싫어서란걸 조금 후에야 알았다. 실제처럼 실감나게가 아니라, 겉도는거란걸.
 엄마와 애인은 소극장의 암전을 두고 갑자기 불이 나면 어떻게 하지란 공통의 근심거리 때문에 잠시 숨이 막혔다는 증언을 했다. 둘에게 서로 그랬노라고 전해주자, 알 수 없는 동질감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건 아니고 그냥 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엄마는 내가 질질 끌려다니는걸 보고 팔다리가 늘어나면 어떡하나란 걱정을 했다. 엄마의 친구분은 아치의 물오른 아치벅지를 보고선 '쟤가 살이 찐거지'라고 물어보셨단다. 엄마의 친구의 친구분은 연극에 대해선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단다. 엄마에 따르면 그 아주머니의 남편은 아주 파렴치한 짓을 했단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의 기구한 운명은 엄마의 단골 얘깃거리다. 어른들은 얘기를 하면서 언뜻 살풀이 하듯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입에 침이 마르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칭찬하는 말들을 하는데 그때마다 난 그게 참 연극적이란 생각을 했다. 
 엄마는 연극에 취미가 없었는데 딸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딸 생각엔 그 정도면 된 것 같았다.

* 연극이 끝난 후 나름 흥청망청 모드에 빠졌다. 곱창으로 과식을 한 후에 바에 가서 마티니, 잭콕, 블랙 러시안을 쓴줄도 모르고 진탕 마셨다. 나라 잃은 백성들처럼 마셔보자는 전유성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아주 진하게 말이다. 다트를 한다고 바에서 설치다 외국 사람들이랑 시비가 붙을뻔 했고, 길가에서 노래만 흘러나오면 춤을 춰대서 일행들이 나를 떼놓고 간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왠일인지 신이 났다. 아무나 잡고 춤을 추거나 펑펑 울고 싶었다. 오늘까지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우유를 나 혼자 꿀꺽 꿀꺽 마시다 속이 부글거리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느낌이었다.
 민폐의 끝점에는 애인이 있었다. 애인은 요놈 요놈하는 눈빛으로 나를 야려주다가도 엎어지려고 하면 부축해주고, 술 너무 많이 먹으면 걱정을 해줬다. 아마 우유 먹다가 탈이 나도 요 녀석 때문에 금세 나을 것 같다.

* 세트 철거 작업을 했다. 조명을 떼내고, 극단 내부를 무대가 아닌 연습장겸 사무실로 바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드릴을 써봤고, 장도리로 못을 뺐다. 못질을 하고, 나사로 돼지코를 조립했다. 나보다 백배는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언니는 드릴의 버튼을 조작하는 법과 장도리로 못을 빼는 법을 알려줬다. 나, 제법 잘 한다. 여남 역할이 뭐가 문제될게 있냐며 호탕하게 웃어제끼고 싶은걸 꾹 참았다. 안 그래도 장기자랑 때 춰본다며 정줄 놓은 춤을 보여줫다가 광년이까진 아니고 뭔가 좀 힘든일이 있는건 아닐까란 눈짓을 받은지 얼마 안 된지라.

*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더니 무슨 업데이트가 된다고 하더니 모래시계가 떴다. 어어 하고 있는데 파일이며 프로그램이 싹 삭제되고 바탕 화면에 휴지통만 하나 덜렁 남겨졌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그 늦은 시간에 안 자고 있을 전문가들을 떠올리다가 왠지 모를 자신감에 고개를 쳐들고 다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인터넷을 열어 비슷한 경험을 해본 몇몇의 사례를 조합해서 시스템 복원이란 많이 들어는 봤지만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것을 해보려고 시작 메뉴를 열었다.
 두차례의 재부팅 후에 컴퓨터가 살아났다. 주옥같은 명문이나 반짝이는 사진이 지워져서 다시 찾은거라면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폴더 속에 있던 글은 고만고만 하거나 형편없었고, 사진은 시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다시 찍는게 나았을뻔한 것 뿐이었다. 사진은 뒤죽박죽 엉켜있고, 영화들은 언제 자신을 열어줄거냐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시스템 복원이란 어마어마한 일을 수행한 후니까 좀 쉰 후에 다시 돌아봐야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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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3-0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생각도 딸 생각과 같아요. 그정도면 된 것 같아요, Arch!

다락방 2010-03-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요, Arch.
난 Arch가 다시 취직했으면 좋겠어요. 나랑 같이 낮시간에 좀 놀아주게. 이젠 뽀도 떠나고 미잘님은 원래 나랑 안놀아줬고..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어요. 외로워요 ㅠㅠ

Arch 2010-03-02 23:37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다락방님.

아, 취직을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흑흑 어흑, 한밤중에 들려오는 괴성, 이이이이이~ 다락방님 무섭죠!
쥬드님도 있고, 인기쟁이 다락방님이 외롭다니! 이런이런, 다른 서재 사람들 각성하라, 각성하라~ 아무래도 야간 서재질로 활동시간대를 변경해야할 것 같아요. 낮에 들러붙은 껌마냥 집에서 인터넷하는건 아치 나이대 숙녀들이 할짓이 아닌걸로 아뢰오!

turnleft 2010-03-03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았어요 Arch!

음.. 글쎄, 저도 고등학교 때 연극을 잠깐 했었는데, 보통 미치지 않고는 빠져들기도 쉽지 않겠구나 싶더라구요.
그러니 연극에까지 숨은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우울해하지 말고 평소의 씩씩 Arch 로 얼른 돌아오세요!

Arch 2010-03-03 19:20   좋아요 0 | URL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턴레프트님 고마워요! 아, 나 씩씩한 캐릭터였어요? 아치의 재발견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