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찌가 친구들이랑 그려온 그림을 보는데 여자랑 남자랑 손을 꼭 잡고 있는거다. 그래서 여남은 왜 커플이냐고 물었더니, 옥찌가 요상하게 몸을 비틀며 말하길,
- 둘이 섹시하거든.
이란다. 별꼴이다.

* 띠조사하는 민의 숙제. 네칸 밖에 없자, 지희가 지민일 꼬득이며 말하길
- 지민아, 그럼 큰 이모 빼, 큰 이모. 너 생각의 의자를 생각해봐. 생각의 의자
라고 했다.
지민인 고민하는척 하더니
- 그래? 그럼 누나 뺄게.
란다.  지희는 쿨하게 자길 뺐을 경우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 자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꽤 힘들어질거란식으로 무리수를 뒀다.

* 아주 매운 떡볶이를 해먹었는데 할머니가 드시더니 당신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자, 옥찌 웃겨 죽겠다며 방을 데굴데굴 구르는거다. 그래서 내가 '옥찌, 스타일이 뭔말인줄 아냐'니까 그건 모르겠지만 정말 웃긴다며 어쩔줄 몰라하는거다. 내 추측으론 옥찌 느낌상 '스타일'은 할머니의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한게 아닐까.

* 옥찌가 할머니한테 수수께끼를 냈다.
- 할머니, 나무는 나무인데 돈이 많은 나무는 뭐게.
- 은행나무
옥찌 '아니 어떻게 할머니가 이렇게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를 맞췄지'란 표정으로 할머니와 책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 몇주 전에 옥찌들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놀 수 있는 곳에 다녀왔다. 실내는 건조하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공간은 들썩일 정도로 울렸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같이 간 사촌 애기들 뒤치닥거리하느라 아플새도 없었다. 같이 미끄럼틀을 타고, 공을 가지고 공대포 공다트를 하니까 그런대로 재미는 있었다. 삼성어린이 박물관을 흉내낸 것 같은데 대개의 어린이 시설이 그렇듯 조악한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을 뛰어놓다가 좀 쉬고 있는데 놀이기구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술래를 정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옥찌는 내 도움 없이 대장으로 보이는 언니에게 가서 자기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옥찌는 이제껏 놀았던 것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 우린 주말마다 산에 가기로 했다. 옥찌는 다리 아프고 힘들다며 징징댔다. 옥찌에게 조금만 더 가면 달짝지근한 요구르트를 먹을 수 있을텐데 이렇게 주저앉을거냐고 했다. 옥찌는 잠시동안 요구르트의 맛을 머릿 속에서 그리더니 꼭 사주는거라고 내게 약조를 받아냈다. 그럼, 그럼 지희야.
 민은? 민은 달리기 시합만 할 수 있다면 정상까지 올라가도 문제없다는식이어서 같이 뛰어주기만하면 됐다.
 아마 이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산은 무슨 얼어죽을 산이냐고, 늙은 이모나 갔다오쇼라고 하겠지. 그땐 조금 걸으면 나오는 오뎅집이며 요구르트집에서 같이 먹던 그 맛이 생각나 괜히 5초도 안 돼 숨을 헐떡일 뜀박질을 할지도 모르겠다.

* 요즘 옥찌의 자는 시간이 늦다. '공부의 신' 본방 사수를 해서 다음날 아이들과 얘기를 해야한다며 내가 오는 시간까지도 텔레비전 시청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올 때면 다양한 포즈로 자는척을 하는 옥찌. 금세 들켜 내 방으로 와 종이 오리기며 글씨 쓰기를 한다. 내가 씻고 오는 사이 어느새 잠이 든 옥찌.
 자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 주말에 시간이 없어 옥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옥찌들과 놀지 못하는건 둘째치고 매번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겨야한다는게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지금쯤 아이들이 뭘하고 있을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보다 내일은 누구에게 맡기고, 다음주는 어떻게 할지에 더 신경을 썼다. 뜨끔했다. 누군가를 항상 최선을 다해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귀찮아하고 있었고, 어떻게 해야할지 정도로만 생각해서.
 평일엔 옥찌들과 마주칠 시간이 없어 주말에 아주 신나게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늘 엉터리다. 주말에 아이들이랑 놀다보면 지난주보다 한뼘쯤 자란 아이들이 보인다. 옥찌들은 내게 말을 걸어주고, 가만히 듣는다. 나는 아이의 표정과 말의 내용, 행동을 지켜본다.

* 나의 원대한 꿈중에 하나는 누구네 집 아이들이랑 누구누구네집 애들 다 데리고 산이며 들로 뛰어다니는거다. 이번주엔 내가 다음주엔 누구네 아빠가 다다음주엔 누구네 이모, 삼촌이 보는 날.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장소에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면서 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모든 육아와 가사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이어서 각자의 부담을 가중시키기만 할까.

* 민은 잘 토라지고, 수시로 삐진다. 삐진 민을 흔들면 민은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내게 겁을 주고 앵앵 우는 소리를 한다. 나는 다른건 다 괜찮은데 그 앵앵 소리는 정말 싫다며 하루에도 몇수십번 약속한 '화내지 않기'를 져버리고 민에게 화를 낸다. 정말 이건 방법이 없는걸까. 얼마 전에 '한겨레 신문'에서 읽은 기사에 따르면 아이들이 날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보거나 내 말을 듣지 않는건 인생이란 긴 시간에 비춰볼 때 아무것도 아니란 내용을 접했다. 아이의 반항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와 나의 관계에 있어선 아주 찰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참을 수 없는건 내 맘대로 되지 않아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 투성인데 아이 맘 하나 내 맘대로 하려고 해서란걸 알았다. 아는 것과 별개로 정말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양육에 관한 내용이 늘 다짐과 반성으로 점철되는 것도 꽤 오래 해온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도 나름 양육에 관한 코멘트들의 장점은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랄까. 자기계발서들의 유효기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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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0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그 표정들이랑 행동들이 그려지는 듯 해요오. ㅎ 귀여우신 아이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웃음짓게 하네요 ㅎ

근데 여기 올때마다 궁금해지는 건데요~ 이 배경 화면은 어디일까요? 저 오른쪽 헤드폰도 좀 궁금하고요^^

Arch 2010-02-20 22:5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 저는 난삽한 기록자일 뿐인걸요. 제 조잡한 글의 어느 부분이 조금이나마 재미있거나 의미있다면 그건 다 조카들 덕분일 거에요.

배경 화면은 어떤 분의 영화 상영장에서 찍은거에요. 삼천동에 있는 까페를 빌려서 했는데 그리 크지 않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참 좋더라구요. 공간마다 영화를 볼 수 있게 헤드폰을 비치해뒀구요.

2010-02-20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0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2-2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다보니 참 부러워지는게요,Arch님.
옥찌가 조금 더 자라야 Arch님은 늙은 이모가 되겠지만,
제 조카는 태어나자마자(7월 예정이랍니다) 늙은 이모를 만나겠네요. 우리 조카 좀 안됐네. 어린 시절에 젊은 이모가 좀 놀아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흐음..

Arch 2010-02-22 00:23   좋아요 0 | URL
'늙은'은 맘 먹기 나름 아니겠어요. 전 옥찌들이 나이든 나를 내치면 난 어리광 부리고 그럴건데.
여름 아이는 정말 건강할 것 같아요. 여름에 이모가 되는 소감은?

다락방 2010-02-22 08:25   좋아요 0 | URL
여자는 소주고
계절은 여름이죠!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