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게 흔해졌다. 스크린의 모든걸 다 빨아들이듯이 몰입할 수 있는 영화관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도 이젠 없다. 몽상가들의 영화관 장면이 멋진 건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그 순간 때문이란걸 말해서 무엇하랴. 제발 앞 의자를 발로 툭툭 치는 짓만 안 해줘도 소원이 없을 지경이다.
흔한 영화를 굳이 송년회에서까지 볼 필요가 뭐 있겠냐 싶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게 많은 것도 아니었다. 몇 가지 영화가 후보군에 올랐고 어떻게 준비가 됐다.-일의 대부분은 장비를 들고 다닌 미잘님과 뽀님이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산님을 따라간 곳은 배다리 공동체의 작은 생활사 박물관. 영화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이 있을 수 있을까. 스페이스 빔에 계시는 분의 배려로 추운 바깥 날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은 따뜻했다. 흰 벽의 영상과 소리는 자리를 잡아갔다. 상영작은 시험 영상 때 노출 있는 장면에 눈을 반짝인 아치의 적극적인 생떼로 골라잡은 ‘언 노운 우먼’, 알려지지 않은 여자. 중간에 세덱중의 세덱 멜기님이 합류했을 때를 빼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린 영화 속에 푹 빠져 있었다.
영화 보는 행위에 담겨있는 킬링 타임용, 엄숙함, 오락, 스릴 등등의 수사를 고스란히 털어낸 영화-보기는 모처럼이었다.
개코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겨 영화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어쩌나, 난 또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잡아냈다. 영화 어떻게 봤냐는 물음에 조마조마했다고, 긴밀하게 짜여진 초반과 중반의 긴장감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 같아서, 이대로 끝나버리면 어쩌나 싶었다고, 마지막에 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단 얘기 등등을 했다. 너무 좋았다에 대해 뽀님은 조목조목 이유를 대고, 미잘과 봉선화님도 극찬-내 기억력이 맞겠지?-을 하길래 괜히 나만 미적지근한 감상평을 낸게 아닐까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나랑 다른 의견을 얘기하거나 나를 지지 하지 않아도 꽤 신나게 말했던 기억이 나는거다. 너랑 의견이 달라도 난 신나게 내 얘기만 떠든단 소리가 아니다. 아, 넌 그렇고 난 그런데 정말? 그렇게 볼 수도 있네. 다름을 비껴나간 틈새로 우리가 보이고, 다른 얘기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내가 이 사람들 만나면 자꾸 수다스러워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할 말 안 할 말 다 해가며 얼굴이 벌개져 툴툴대다 금세 막걸리가 너무 맛있는거 아니냐며 짜릿해지기 일쑤니. 다들 아치 안에 다중이 있을거라고 수근댈지도 모를 일.
<급 추가 - 미잘 뽐뿌질!>
멜기님은 '내겐 늘 어려운 당신'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멜기님께 마초같다고 했다가 왜 내 말이 맞는지를 설명해야 했고, -설명할 수가 없잖아. 마초가 아닌데.- 가방 들어주라고 했다가 무안 당하고. 아무튼 멜기님이 일부러 나한테만 그러는건 아닐텐데, 나로선 어렵고 어려웠다. 영화를 보기 전에 멜기님께 연락이 왔고 옆에서 봉선화님이 맛있는거 사오란 얘기를 하길래 아주 소심하게 -핸드폰 문자 폰트를 정할 수 있다면 기본 폰트에서 몇 포인트는 작은 글자를 넣었을 것이다.- '봉선화가' 사오라고 했다면서 문자를 넣었다. 한참 후에 도착한 멜기님. 아,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란 노래가 생각났다.
멜기님은 막 튀겨서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닭강정을 양 손 가득 들고 도착하셨다. 인천에 왔으니 이걸 꼭 먹어야한단 생각에 1시간 가량 기다려서 가져온거라고 하셨다. 냠냠쩝쩝 느끼하고 달짝지근하고 다른 맛들을 오십배는 족히 압도할만한 고소한 닭강정. 우리 멜기님이 사~아~ 온 닭강정. 닭강정 하나에 멜기 찬가를 부르고 앉았는 나는 누구냐!
아직도 난 멜기님이 어렵다. 누구 표절 얘기를 꺼냈다가,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냔 소리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자세한건 모른다고 말하는 난, 아직도 멜기님이 어렵고 어렵다. 아마도 푸하님이 아치는 대체 왜 내게 이러냐고 하는거랑 비슷한걸까. 그렇지만 정말 닭강정 때문은 아니고, 나만 너무 금세 식을 것만 같은 열의를 가지고 모임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뻘쭘하다는 얘기에 다정한 위로보다 힘이 되는 얘기를 해준 멜기님이 참 고마웠다. 구성원이 누군가에 따라 힘의 비중과 분위기, 대화의 온도차가 나는 것처럼 멜기님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나는 분위기란게 있는데, 그건 따로 말 하지 않았지만 무척 품격 있다.
개코 막걸리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먹으며 우린 2009년에 읽은 책 중에 내 맘대로 베스트를 선정해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성실한 나와(으하하) 뽀님만 책을 가져와 다른 분들은 택배로 보내기로 했다.
미잘은 진중권의 이매진과 서양미술사를 골랐고,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과음에다 메모를 안 해서 잊어버렸다.)-->내가 받기로 했다.
봉선화님은 88만원 세대(역시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잊어버린건 미잘이 채워주세요.)-->멜기님?
멜기님은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와 지상 최대의 쇼. -->미잘이 리처드 도킨슨의 신작을 읽고 싶다고 했다. 멜기님은 자기도 안 읽었다며 다 읽고 자신한테 보내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하셨다.
뽀님은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봉선화님?
나는 '교수들' -->뽀님
우리들의 밤이 저물고 있었다. 우린 막걸리를 더 먹어 행여 챙기고 다녔을지 모를 아치가 정신을 더 놓기 전에 앵두나무집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