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 게임

옥찌가 생일 파티를 했다면서 선물을 한가득 가져왔다. 선물 포장을 뜯는 재미가 이런거구나. 나는 옥찌가 부러워서 나도 하나만 뜯어볼 수 있냐고 물었다. 옥찌는 테이프 붙은게 잘 안 떼지니까 이모가 좀 해보라며 선심쓰듯이 선물 하나를 던져주었다. 알록달록한 연필이며 지우개, 손수 글씨를 써넣은 카드까지. 예쁘고 귀엽다. 연필이 너무 많으면 굴러다니니까 이모가 갖고 있겠다고 하자, 옥찌는 무슨 무슨 조건을 내세우면서 그러라고 했다. 당분간 선물은 내 차지다. 이 나이에 왜 남의 선물을, 그것도 잘 쓰지도 않는 연필을 갖고 괜히 기분이 들뜨는지 모르겠다. 주인 올 때까지 귀여운 강아지를 맡고 있는 느낌이랄까.

오랜만에 옥찌랑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옥찌에게 요새도 S랑 잘 지내냐고 물었다. 나를 타고 넘고, 손을 비틀며 장난을 치던 옥찌가 몸을 배배 꼬았다. 옥찌는 네살부터 S를 좋아했다.

- 지희야, S랑 좀 더 친해졌어?

- (눈으로 곰곰히 생각하더니) 내가 얘기하면 이모는 그 삼촌 얘기 해줄거야?

- 응? 그 삼촌이랑 S랑 무슨 상관이야?

- 그럼 나도 안 해.

- 아아아아(코를 사정없이 막고선) 해줘 해줘. 나도 말할게.

- 우리 뽀뽀 게임 했다.

- 그게 뭐야?

- 같이 뽀뽀하고 그러는거야.

- 아,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만들어준 놀이야?

- 아니. Y가 뽀뽀 게임하자고 해서 같이 한거야.

- 그럼 네가 좋아하는 수연이랑 하는거야?

- 아니. (이때 약간 날 무시하는 눈짓을 보냈다. 알거 다 알면서 그러냐는식인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여자한테, 여자는 남자한테 하는거야.

- 아, 이모도 해본적 있어.

- (믿기지 않는 다는 눈짓 한번) 그런데 요샌 안 해.

- 왜?

- 띠리 띠리리리리.

옥찌 얘기 듣고 아주 크게 웃었는데, 과연 그 이유는 뭘까요.


자, 이모 먹어

난 먹는게 참 좋다. 최근에 발견한 획기적인 사실, 국물 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평소 양보다 밥을 더 먹을 수 있다. 내 이 기쁜 소식을 측근에게 전하자, 그는 부끄러움도 없이 금세 눈을 내 배에 고정시켰다.

옥찌들도 누구 조카 아니랄까봐 먹을 것 욕심이 대단하다. 어제 저녁에는 직접 구운 김에 -민이 소금을 왕창 뿌린 김이 폭탄처럼 걸릴 때가 있으나- 배부른줄 먹고 밥을 먹고 있는데, 김이 몇장 남지 않은거다. 서로 눈치를 보던 옥찌들은 잽싸게 남은 김 두 개를 가져갔다. 김 먹고 싶은 욕심보다는 아기 때처럼 아 하면 먹을거 넣어줄까, 안 줄까 궁금해서 나도 좀 주라고 해봤다. 옥찌는 행동이 굼뜨더니 그거 하나 못챙겼냐는 눈짓으로 자기 차지인 김을 야금야금 떼서 먹었다. 민은 조금 고민하더니 내게 김을 주었다.

난 그만, 민이 좀 더 좋아지고 말았다.


화해는 어떻게 해야할까.

정재 오빠-지민이도 이렇게 부른다. 남자가 형보고 오빠라고 부르는건 정말, 귀엽다-가 준 딱지를 가지고 놀던 옥찌들. 자기들끼리 잘 놀고, 손도 잘 씻고, 밥도 잘 먹고 기타 등등 무리없이 각자 일을 잘 해서 당근으로 요구르트를 줬다. 요구르트 꼭지를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서 먹는 옥찌들을 보니, 어렸을 때 요구르트 바닥을 이로 틈을 내 먹던게 생각났다. 아무튼, 옥찌들은 자기들대로 놀고, 난 대충대충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서 사정을 들어보니 많이 남은 민의 요구르트를 지희가 모르고 먹었다는거다. 민은 울상이 돼서 징징거리고, 옥찌는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다가 같이 울려고 하는 찰나,

난 좀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평소 같으면 누가 옳고,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며 사과해라, 다음부턴 이러지마라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민의 요구르트를 들고선 요술을 부려서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거라고 뻥을 쳤다. 물론 뒷감당 안 되면 도망칠 준비도 다 돼 있었다. -그렇다. 나는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다행히 이모 장난이 통했는지, 민은 ‘허 참 별 이모 다 보겠네.’란 표정이 돼서 웃었고, 지희도 거짓말인거 다 아니까 이제 그만하지란 눈빛을 보냈다.

언젠가 김규항씨 글에서 아이들끼리 싸울 때 ‘양보해야한다’며 말했더니 그 후로 싸움이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한 말의 맥락을 살펴보자면 ‘충분해도 경쟁심 때문에 다투었지만, 모자라도 서로 양보하니 다 만족했다.’란 의미인데 난 좀 의아했다. 아이들이 무슨 양보 프로그래밍이 된 로봇도 아니고, 무작정 양보하라는 그 말에 어떻게 순순히 응하는지 궁금했다. 아이들은 자기 세계를 싸움이란 방법을 통해 확장해나가는게 아닐까.

나는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만큼 싸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조금 더 먹기 위한 욕심과 자기만 좋은 것을 취하려는 경우라면 더더욱 필요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필요로 세상이 움직일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 욕심의 한계를 알 필요가 있다. 다툼없이, 강제된 양보란건 아이들이 싸워서 상처를 받고, 다시 화해하고, 또 싸워서 결국 누군가 중재를 하는 과정들이 담보하는 불편함과 입장 차이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난 옥찌들이 서로 양보하고 우애 좋은 오누이이길 바란다. 하지만 옥찌들이 자신이 왜 화가 나고, 상대방은 왜 나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를 이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도 맨날 동생들이랑 투닥거리면서 여기까지 온걸 보면,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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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1-2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Arch 님. 멋있어요. 싸움에 대해서 한순간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Arch님의 이 페이퍼를 읽고 나니 어쩌면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죠. 아직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실히 판단하기도 힘든 어린 아이들한테 무조건 양보하라고 하는건 부조리하죠. 대체 왜 양보해야 하는지 본인이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하잖아요. 자신이 왜 화가 나고 상대방은 왜 나 때문이 기분이 나쁜지를 이해하는 건 정말 중요하죠.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건 바로 그것인 것 같아요.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오히려 다음번에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조심하게 될테니 말예요.

Arch 님은 엄청 좋은 이모네요. 제가 생각하는 나쁜 어른들까지 죄다 Arch님께 보내고 싶어요. 가서 좀 더 배우고 와, 하고 말이죠.

이뻐라 ㅠㅠ

Arch 2009-11-27 16:20   좋아요 0 | URL
금요일에 날도 춥고 어깨도 뻐근하고 눈도 침침한데 왜 이렇게 페이퍼를 쓰고 앉았을까를 생각해봤어요. 중독이란건 이미 알았고, 아마도 다락방님 댓글을 받고 싶어서란 생각이 들었죠. (또 나 좋아하는건 약도 없다고 약올릴거 알지만) 내가 엄청 좋은 이모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어른들을 내게 보내면 마구 괴롭혀줄 자신은 있어요. 저 아시죠. 괴력 아치예요^^

그나저나 문제 안 맞춰요?

다락방 2009-11-27 17:10   좋아요 0 | URL
음..신종 플루 옮길까봐? ㅋㅋ

그나저나 나도 뽀뽀게임 좀 해야되는데....이제 11월도 다 지나갔고......12월인데.........아 ...............................

Arch 2009-11-27 17:53   좋아요 0 | URL
뭐예요. 싱겁게 맞추기는, 칫!
J씨는 부끄러워서? 식상해서? 막 이러던데^^

음, 어떻게하면 다락방님 뽀뽀게임을 할 수 있을까~

다락방 2009-11-27 17:57   좋아요 0 | URL
나는 세상을 아이들의 눈으로 보잖아요. ㅋㅋ


그나저나 Arch님 갑자기 내가 아이들의 눈 얘기를 하니까 말인데, 혹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봤었나요? Arch님은 거기서 무얼 느꼈나요? 그 책이 어땠어요?

Arch 2009-11-28 00:0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가봐요. 난 애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웃겼는데.

읽었는데, 제대로 안 읽었죠. 문고판으로 보거나 영어 공부한다면서 띄엄띄엄 본게 다예요. 띄엄띄엄 결과로 보자면 '그렇게 대단한'책으로 느껴지진 않았어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뷰리풀말미잘 2009-11-2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는 옥찌들에게 이모라기보단 큰 누나 같죠. 가끔 애 셋이랑 놀아주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ㅎㅎ 흐뭇한 페이퍼였어요.

Arch 2009-11-27 17:31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동안이죠. 미잘이 좋음 나도 좋아요^^

hanalei 2009-11-28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게임' 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