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갈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

 시장에 가서 떨이로 마구 퍼주는 나물 종류를 사도 됐고, 그저 구경만 해도 배가 찰 것 같은 그곳 분위기를 훑어도 됐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스니커즈 멀티숍에 들어갔다. 당장 살건 아니었지만, 정말 맘에 들면 못살 것도 없었다. '구경만 할게요.'란 말에 위축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은 무척 유연했다는 소리다.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이것 저것 설명을 해주며 여러 디자인의 신발을 보여줬다. 남자가 보여주는 신발 가운데 대부분이 나이키여서  다른 브랜드의 제품을 보여달라고 했다. 남자는 그런가보다 하더니 세번인가 더, 왜 나이키 신발을 안 신냐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누군가를 그렇게 궁금하게 하는건 나 역시 안달나서 잘 못하는 짓이다. 남자가 듣고 싶은 맘이 사라지기 전에 말해줬다.
 '나이키는 어린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이니까 그 제품을 이용하지 않으려구요.'
 남자는 안 그러는 다국적 기업이 어디있냐며, 다른 신발 회사를 언급하며 다 똑같다고 말했다. 난 난처해하며 잘 빠진 신발들 사이에서 우물거렸다. 상징적인거니까, 아동 노동력 착취에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란 말을 했을 것이다. '팔려는 의지'로 똘똘 뭉친 남자의 몸 안에서 냉소가 피식 새어나왔다. 그따위 냉소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표현하려는 의지는 애시당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 사라져버렸다.

 왜 난 좀 더 자신있게 같이 냉소하거나 당신의 반응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같이 냉소하지 못한건 내가 뜨겁지 않기 때문에 행여 그 뜨겁지 못함을 비난받을까봐라고 지레 짐작해서였다. 중요하지 않다는 반응을 못보인건 당황해서이기도 하지만 애시당초 남을 신경쓰지 못할 정도의 신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 말처럼 아이들이 착취 당하는게 어디 나이키 뿐이겠는가. 도처에 널린게 다국적 기업의 횡포인데. 친환경이나 인간 존중은 그들 광고에서나 떠들어대기 좋을 뿐이다.

 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너 하나가 바뀐다고 뭐가 되겠냐고. 내가 종이컵 안 쓰고, 불 끄고 다니고, 대기전력 낭비 말자며 콘센트를 뽑고 다녀도, 세제를 안 쓰려 노력하고,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 과식하고(이건 좀 다른 욕망이다.), 색소나 향료가 든 음식은 가급적 먹지 않으려 노력하고, 휴지 대신 손수건을 쓰고, 재활용을 한다고 해서, 기껏 나 하나로 뭐가 바뀌겠냐고. 그런데 난 바뀐다고 생각했다. 거칠게 표현해, 대형 마트 돈은 지역 경제에 보탬이 안 된다는 말로 가족들에게 추석 장은 가까운 마트에서 보게 한 것도, 그 말을 꽤 그렇듯하게 받아들인 것도 조금씩 바뀌는 징후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자기는 뭐 하나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말만 그렇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이 정도라도 하고 있지 않냐고 얘기할만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순간. 예기치 않게 너도 사실은 나이키 신고 싶지란 뉘앙스를 느꼈을 때, 너도 귀찮으니까 그냥 콘센트며 모니터를 놔두고 싶지, 너도, 너도란 물음에서는 개운하지가 않다.

 나이키를 너무 신고 싶은데 참는건 아니다. 나이키 상표를 달아서 더 예뻐보이는건지, 원래 나이키가 디자인이 꽤 괜찮은건지도 헷갈린다. 나로선 휴지 대신 손수건을 쓰는게 좋고,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회사에 있는 모든 컴퓨터의 모니터를 끄고 돌아다닐 수도 있다.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짓이다. 절약해서 말뿐인 녹색성장에 일조할 생각도 아니고, 나 하나의 노력으로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저 내가 편하고 좋아서 하는 짓이다. 책을 사버리면 안 읽은다는 이유도 있지만 가까운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니까, 아주 좋아하는 책 말고는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란 생각도 뭔가를 참거나 억압해서 나온건 아니다.

 이번 경우처럼 당황하게 되는 순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도 은근한 지지를 해주길 바랐다는 맘을 눈치챌 때가 문제될 뿐이다. 이럴 때는 당신은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이래요 정도로 약간 넋나간 웃음을 지으며 대응하면 좋을텐데......

 표정을 연습하려고 거울을 봤다. 한증막에서 땀 뺀 것처럼 희뿌연한 얼굴이 동동 떠있다. 웃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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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ei 2009-10-26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껏 나 하나로 뭐가 바뀌겠냐고" --> 혼자가 아니랍니다. 절대 절대 절대 절대

Arch 2009-10-26 09:37   좋아요 0 | URL
알고 있어요^^

다락방 2009-10-2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어떤것들은 혼자 하고 있어요.
나는 종이컵을 안써요.(아니 최소한 사무실에서는 머그컵을 써요.) 그리고 나는 마트에서 비닐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구요. 공중화장실에서 손 씻고 타올을 뽑아쓸 땐 꼭 한장만 뽑아 써요. 또 손 씻고 비누 칠할때는 반드시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잠가요. 그렇지만 이 모든것들을 누군가에게 같이하자 너도 꼭 해 라고 하지는 않고 있어요. 그냥...혼자 해요.....

우리는 어쩌면 모두들 저마다 무언가는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나이키를 권한 아저씨도 정작 나이키를 권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분리수거를 철저히 할지도 몰라요. 그냥..그렇다구요...

Arch 2009-10-26 13:37   좋아요 0 | URL
그럼요, 어쩌면 당연한걸 하면서도 알아줬음 하는 내 맘을 본 것 같아서 주저리주저리 쓴거에요.
전 종이 타올을 세장씩 연속으로 뽑아쓰는 분들을 볼 때마다 말리고 싶고 그래요. 뭐라고 댓글을 달지? 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