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사진기에 들어 있던 사진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은 스토커를 연상시킨다. 스토커하기엔 내 몸이 무거워 따로 고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뭐든 부지런해야 스토커를 당하거나 해볼 수 있다.
쌍꺼풀 개. 웃긴다. 내가 이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도 마찬가지로 '좀 웃기군'이었다.
남자에게 묻는다. 꿈은 뭐냐고, 잘 논다는게 어딜 돌아다니는거냐고, 연애는 어땠냐고,
남자가 일본 여행을 한다며 두꺼운 여행책을 샀다. 언제 갈지는 모르지만 여행은 꿈꾸는 순간부터 시작하는거니까, 책부터여도, 책에서 끝나도 괜찮았다.
- 일본 여행할때였어요. 지도 들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한번씩 쳐다보거든요.(번화가에서 누가 쳐다본다고. 관광객 투성일텐데!) 제가 좀 한적한데만 골라다녔거든요.(오호!)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길을 알면서도 한번씩 물어봐요. 그럼 대단히 친절한 일본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길을 설명해준 다음에 가끔은 저를 집에 초대하기도 해요. 그럼 차도 마시고 그러죠.
- 아, 나도 그런거 해보고 싶은데.
- 응?
- 다른 나라 사람들 집에 놀러가고, 같이 노는거.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나도 써먹어야지.
- 일본 사람들은 밖에서도 담배를 안 피워요. 일본 갔다온지 얼마 안 되면 나도 그 사람들처럼 밖이라고 막 담배피거나 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들 야만인이라고 우스개소리로 떠들고 다니기도 했어요.(잉?) 그런데 좀 지나잖아요. 그럼 나도 막 담배 피고 그래요.
- 에이, 그럼 뭐야. 여행이 그저 기억과 '갔다 왔다'로만 남는거잖아.
- 음... 혼자 여행을 가잖아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 이를 악물잖아, 요. (존댓말이 어색한 사이) 그렇게 악착같은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 자신감?
- 그렇죠. 말도 통하는데 뭔들 안 되겠어란 자신감이 생기는거죠.
그는 남 흉을 보지 않는다. 흉을 보기 시작하면 다시는 그 사람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워져서 자신이 더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난 흉을 보면 미운 맘이 조금씩 덜어지는 것 같고 흉보는 사람 사이에 공감대가 쌓이는 장점이 있다는 등등의 들떨어진 얘기를 하려다 나도 마찬가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쌈질도 꽤 했단다. 그래서 다시 사고를 치면 쌓아놓은 마일리지가 없어서 곤혹스럽단 얘기도 덧붙인다. 그의 문신은 약간 촌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고, 그가 입는 옷은 '아무렇게나 걸친 간지'가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가끔은 타이트하게 몸을 감싼 옷은 멋지구리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옥찌들이 보려고 가져간 '브레멘의 음악대'를 무척 재미있게 읽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어렸을 때 엄마가 나가서 놀라면서 책을 안 사줬단다. 그런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동화책을 사준건 아니고, 실컷 놀려먹었다. 어어, 브레멘의 음악대도 안 읽은 다 큰 아저씨 있다, 옥찌들 공격해! 그랬더니 옆에서 다른 동지도 얼굴이 벌개져선 자기도 안 읽었다고 했다. 브레멘의 음악대는 성인 남성의 어떤면을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일까.
어느 날인가, 이 남자, 뭐가 잘 안 된다며 꼭 생리하는 것 같잖아란 말을 하는거다. 발끈해서 한판 뜨려다가(뭘, 수제비를? 유머가 지독해지고 있다.) 그에 대한 내 맘을 접는걸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했다. 무슨 맘이 있는건 아니고, 혼자만의 유희인 스토커짓을 그만두는 정도? 그랬는데 이를 어째, 그 다음부터 나도 뭔가 꼬이기 시작하면 생리하는 것 같아란 말을 서슴없이 해버리는거다. 젠장, 옮았다.
밑위가 짧은 바지를 입으면 가끔씩 속옷을 보여주기도 하고, 가끔씩만 씻을 것 같은 이 남자.
난 느릿느릿 그에게 주파수를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