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의 자격>을 무한도전의 아류쯤으로 여겼다. 1박 2일이 애초의 기획 의도를 잃어버리고 장소만 바뀐 버라이어티로 전락하고 있을 때 이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연이어 떼로 나오는 남자들은 별로였지만(충성도 높은 시청자는 아니어서 연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지만) 이경규 아저씨를 믿었다. 그간 봐온걸 토대로 말하자면 애초에 의도했던 것만큼 신선하거나 재미있지 않다. 도리어 그동안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24시간이란 틀에 구겨넣은 것만 같았다.
지난주에는 이 남자들이 아지트를 만드는 과정이 방영되었다. 뭔가 변하고, 그 속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의 시선이 들어있는 것은 어느 때고 좋다. (여자 화장, 비포 애프터류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좋아한다. 다만 그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의 욕망'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별로) 아지트를 어떻게 만드는지만 궁금해서 본건데 다시금 이 프로가 좋아졌다.
'남자의 자격'은 초반에 자리를 잡으면서 공수표를 남발하는 듯한 우려를 갖게 했다. 24시간 금연하기는 별다른 고민없는 진부한 컨셉이었고, 그들 각자의 캐릭터성보다는 기존에 지리멸렬하게 우려먹은 벌칙 주기는 좀 너무한다 싶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쭉 본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변해왔는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날 방송만큼은 그들 각자의 캐릭터성뿐 아니라 재미까지 몇단계는 업그레이드한 것 같았다.
미션 중반에 몇년차 주부들이 나와 자신의 남편이 먹고 싸고 자는 것 밖에 모르는줄 알았다는 인터뷰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런 남자들에게 DIY의 즐거움을 알려준다는게 ‘맥가이버- 아지트 만들기’ 기획의 의도였다. 초반엔 어려움도 많았다. 일을 입으로 하는 사람과 열정만 넘쳐 순식간에 기진맥진 하는 사람. 못질을 어떻게 하는지, 형광등은 어떻게 갈아야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컴퓨터 조립하는데 한 시절 다 보낼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탈 수 없는 그네를 만들고, 외벽에 수성 페인트를 발라서 다시 파랑색으로 덧칠하고, 스티로폼 자르는 소리에 약점 잡힌 경규 아저씨까지.
그런데 그들은 결국 합심해서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못질을 미친 듯이 잘해서 도구로 하는거면 뭐든 다 잘하는 평가를 받았던 국진씨,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일가견이 있고 의욕 과다로 쉽게 잘 뻗어버리는 인어 아가씨의 남자배우 김성민, 묵묵히 일 잘하는 정진씨, 뭐만 했다하면 다치고, 피곤해하고 뜬금없이 호통을 치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경규 아저씨, 무심한 듯 한마디씩 하는게 그럴듯하게 먹히는 태원 아저씨, 아직은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잡혀지지 않은 형빈씨와 윤석씨까지.
형광등에 직접 선을 연결해 불이 들어오게 하면서 환호하는 인어 아가씨 성민을 보고 이경규는 한마디로 일갈한다.- 사람 불러서 하면 될 것을. 형광등을 끼면서 낑낑대는 경규 아저씨랑 태원 아저씨. 태원 아저씨는 우겨넣듯이 형광등을 낀 후 - 뭘 이렇게 만들어놨다냐. 라고 말하는데 굳이 두 분을 할머니 할아버지 캐릭터로 고정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남자의 자격'은 제대로 된 기획보다는 상황을 던져놓고 '남자'들이 어떻게 놀고,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를 본다. 야성을 잃어버린 남자, 기존의 관습적인 태도로는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다는걸 잘이라기보다는 약간, 미세하게 느끼고 있는 남자. 남자들끼리 모여서 갈데라곤 술집 밖에 없다고 불평하는 남자. 그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토이남, 마초, 초식남의 수식뿐 아니라 남성학에 대한 담론도 확장되고 깊어질 것이다. 앞으로 '남자의 자격'은 그 연장선상에서 좀 더 은유적이고 재미있게 '변화된, 귀여운 남자'에 대해 얘기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