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시간을 잘못 맞췄다. 알람 대신 지희의 책읽는 소리로 잠이 깼다. 지희를 불렀다. 지희는 왜, 왜 그러며 늦장 피우다 투덜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지희를 안고선 머리에 코를 대보았다. 예전 같은 아기 냄새가 안 난다. 무취의 지희. 이를 두 개나 빼고, 책 한권쯤은 이젠 뚝딱 읽어버리는 지희. 책 읽는 소리, 지희 목소리로 잠이 깨서 조금 행복해졌다.

아이가 자란다는 희망이 위로가 된다는 바람돌이님 말이 맞다. 하지만 가끔은
금세 쑥쑥 자라서 떠나버릴 것 같아 무섭다. 난 아무런 준비도 안 되었는데.

 어제, 조금 늦게 도착해 텅 빈 집을 보자 조금 쓸쓸해졌다. B도 늦고 옥찌들도 늦었다. 내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B와 함께 집으로 들어선 옥찌들. 지희 표정이 안 좋았다. 학원차가 옥찌들만 내려주고 갔었나보다. 나도 B도 없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동생과 단둘이 벤치에 앉아있으니 무서웠다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까 겁이 났다고. 난 울상인 지희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며 꼭 안아줬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하늘이 새까맣게 변하도록 혼자일거란 상상. 옥찌는 차가운 저녁 바람에 소름이 바싹 돋아 있었다. 어쩌면, 아이가 자라는게 아득하다기보다는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얼마쯤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든든한 빽이 되어주고 싶고, 무섭지 않게 다독여주고, 가끔은 아기 흉내로 칭얼대면서 작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싶어서. 지희라면 지민이처럼 ‘아가, 엄마한테 가서 밥 달라’고 하지 않을테니까. 

 오늘 왜 이렇게 맥이 탁 풀려선 갈피를 못잡을까.

 말쟁이 dd씨가 모처럼의 전화를 받더니 그렇게 시간되면 1조만 땡겨달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대출 전화엔 저렇게 의연하게 대응해야한단 말이지. 난 그냥 웃지요. 맥은 왼쪽 손목 힘줄에서 손가락 한마디 떨어진 곳에서 잡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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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9-0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셔요. 아이들은 언젠가는 당연히 떠난다구요. 그게 감당이 안되면 그 애들이 떠나지 않고 늙어서까지 나한테 빌붙어 있을걸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할지요. ㅎㅎ
아 저도 오늘은 진이 다 빠진 느낌입니다. 올해는 아무 약이라도 좀 먹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루 종일 하고 있어요. 몸이 처지니 마음도....ㅠ.ㅠ

Arch 2009-09-04 14:38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렇게 되면 서로 웬수 웬수 하면서 그 끈질김에 대해 한탄하겠죠. 그래요, 끔찍할거에요.

중국에서 들여오는 약재에 중금속이 들어있다고 하지만 용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금요일은 아무래도 그동안 쌓아놓은 기가 쑥 다 빠져버리는 것 같아요. 데이트 약속이라도 있으면 좀 생기가 돌까~ 크~

다락방 2009-09-0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여기에 뭔가 근사한 댓글을 달고 싶어요. 좀 기다려봐요.

다락방 2009-09-0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세 돌아왔어요. 이 시를 줄게요, Arch님.


흔적

-박연준


남자의 가슴이 왜 좋은지 알아요?
종이처럼 평평하니까
여자의 가슴이 왜 좋은지 알아?
무덤이 두 개나 있으니까

그날, 엎질러진 밤은 환하게 어두웠다
밤이 환할 수 있다니
내 무덤가에서 밤새 뒤척이던 손가락들은
아침이 되자 무덤 속으로
아예, 아예 들어가버렸다

혼자 목욕을 하는 저녁이 찾아왔을 때
외로운 팔과 다리, 등, 배, 가슴, 흐린 얼굴
도저히 내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각각의 개체들이
거울 속에서 서로 어색하게 꿈틀대고 있을 때
하얗고 둥그런 왼쪽 가슴에 난 이빨자국
보랏빛으로 선명하게 찍힌 당신의 자국

이렇게 금세 흔적을 남기다니
내 몸은 소문이 빨라
맨 아래 발가락들까지
열 가지 목소리로 수군대고 있는데
보랏빛은 지워지지도 않는데
어둠이 환할 수 있다니

Arch 2009-09-04 16:25   좋아요 0 | URL
근사하고, 아려요. 아리고 아련해요. 다락방님 고마워요.

내가 고마움에 고무돼 할 수 있는거라고는 수첩에 시를 적는 일 밖에 없어요.

순오기 2009-09-0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지희 마음에 공감이 가서~~~ 짠해요.

Arch 2009-09-05 00:40   좋아요 0 | URL
그렇죠?

다락방 2009-09-05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아. 안자고 뭐해요, 이시간에!!

Arch 2009-09-05 01:06   좋아요 0 | URL
뭐하긴. 댓글 달고 있죠. 꼬장 다락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