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책으로 다 읽었고, 이번주라도 텔레비전은 조금만 보려했기에, 안 보려고 안 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한비야씨의 목소리는 너무 또랑또랑하고 확신에 차있어서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1부와 2부의 앞부분을 못본게 안타까웠다. 그녀가 해준 말들은 멋진걸 넘어서서 감동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삶에 강한 확신을 갖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은 자기 만족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녀는 세계 시민 정신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좀 더 거창한걸 해야지 폼나지 않을까란 것 등등을 늘어놓을게 아니라 지금 내 자리에서 먼저 충실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했다. 그래, 맞아, 그렇게 하면 돼. 다시 힘을 좀 내도 될 것 같았다. B가 옆에서

'너는 전기 코드 뽑고 다니고, 물 잠그고 다니느라 바쁘니까 벌써 세계시민이었네'란 추임새를 넣어 아주 잠깐 뿌듯하기도 했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뜨겁게 하니까. 이 말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오늘 나도 이게 내 가슴을 뛰게하는구나란걸 느꼈다. 잠깐 그러고 말 것 같아 따로 페이퍼로 쓰진 않겠다. 오래 지속되고, 지속되는데도 자꾸 내 맘을 뛰게하면 아마 이마에 붙여 동네방네 떠들며 자랑할 것이다. 

 한비야씨가 여성 할례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문득 그토록 치명적인건 아니지만 다이어트로 표준화된 몸매, 성형으로라도 예뻐져야한다는 분위기 역시 여성에게는 폭력적인게 아닌가란 생각이 떠올랐다.

 아침에 A가 밥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밥을 하라고 시킬 때만 하지, 아침부터 대체 뭘 하느냐'는 말을 했다. 노예에게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으례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은척 휘적휘적 방 밖으로 나갔다. B가 내 말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무안해서 얼굴이 벌개졌다. 나는 왜 그랬을까.
 
 전에 가사 노동 분담에 대해 D와 얘기를 한적이 있다. 더러움을 느끼는 각자의 지표는 다르니까 서로에게 맞는 방식으로 맞춰간다는 D의 얘기에 살짝 성이 났다. 그럼 더러움에 예민한 사람만 계속 가사 노동을 해야하는건가? 그때는 아마도 내가 더러움에 예민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니었다. 

 집안의 A는 내가 한 청소도 B가 한 청소도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나는 A가 어떤 일을 하는줄 알고 있고, 그 일이 A의 육체와 감성을 얼마나 갉아먹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B와 내가 가사를 전담해서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A의 생각은 다르다. A는 더러움에 나와 B가 갖는 역치와 비교도 안 될만치 민감하며 가사 노동 자체를 '자신의 일'로 생각한다. A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게 나는 A가 가사 노동에서 발군의 실력을(주로 많이 해서) 보여줘왔으니 으례 가사 노동은 A몫이라고 여겨왔다. 틀렸고, 잘못됐는데 A의 고지식한 면을 나는 이용해왔다.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피곤할텐데 아침부터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짜증이 난거다. 하루종일 고민했다. 방법이 없다. 내가 더 부지런해지거나 둔감해질 수 밖에. 조금 더럽게 살면 안 될까. 많은 가전제품은 집안을 좀 더 청결하고 제대로 관리하길 요구하고 있다. A스타일에 맞추려면 내가 피곤하고, 모른척하자니 맘이 불편하고. 어쩐담.

*   

 비를 쫄딱 맞았다. 비 맞는거 좋다고 했지만, 퇴근길에서는 아니었다. 책이며 소지품이 죄다 젖어버렸다. 젠장. 얇은 소재의 옷 덕분에 몸매가 그대로 노출이 됐다. B가 한마디 해줬다.
- 비 맞은 생쥐꼴인데 배가 볼록 튀어나와서 거, 보기 좋수다.
 난 보기 좋은 배인거다.

*  

 박노자씨의 책을 읽다가 군입대를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영주권을 얻는 사람이 나오는 부분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볼 때 그들이 폭력적인 군대를 피하는 방법이 그렇게 비난받아야하고, 범법자로까지 규정해야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납득은 되지만 뭔가 이상했다. 군대를 안 보낼 수 있는 자격이란 것도 실은 어느 정도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자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내가 불편한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국가 안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는 선택의 기회도 없는 사안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고 할까.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유승준을 외국인이라며 입국을 거부시키는 방법은 치졸할지 모르지만 빽도 없고, 힘도 없어 자신의 시간을 암울하고 폭력적인 군대에서 보내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해야하는게 아닐까.

 연애를 안 하니 시간이 남는다. 시간이 남는데도 늘 잠이 부족했다. 연애 대신 서재질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서재질은 문득 서방질로 읽힌다.
 며칠 서재를 쉬니 시간이 남는다. 공부도 하고, 책도 보고, 드득드득거리며 생각도 했다. 아침에 잠깐 팔뚝을 내놨는데 금세 타버렸다. 밤공기가 점점 선선해진다. 내 팔뚝은 본래 색으로 돌아올까?

 * 

주말에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 되지만 걱정하는 만큼 기대하고 있다. 어떤 느낌일까, 어떤 만남일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 

일 때문에 찍은 사진이다. 다음엔 여기서 이벤트를 하자고 할까란 생각이 정말 아주 잠깐 들었다. 몹쓸 이벤트쟁이.


임피에 있는 정자. 나무가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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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8-2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팍도사 - 한비야씨편 저도 즐겁게 봤어요. 그 분이 그러더라구요. 저는 아직도 제가 앞으로 뭐가 될지 너무너무 기대되고 궁금해요라고... 50문턱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그분이 너무 멋져보였어요. 그리고 대학입시에 모든 인생이 걸린것마냥 조급해하며 아이를 억박지르는 게 과연 옳은건가 생각도 하고요. ^^

Arch 2009-08-21 00:50   좋아요 0 | URL
나도 너무너무 궁금한데, 내가 뭐가 될지^^ 저도 그 부분 정말 좋았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단 소리는 좀 뻔하지만, 한비야씨만큼 뻔하지 않고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도 드문거 같아요. 대학 입시에서 비켜나면 좀 다른게 보일 수도 있을텐데, 안타깝죠.

순오기 2009-08-21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딸은 한비야씨 방송보고 건강관리를 잘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팍팍~ 왔답니다.
그래서 그 밤에 나가서 뛰었대나 달렸대나~~ ㅋㅋㅋ

Arch 2009-08-21 10:03   좋아요 0 | URL
멋진 엄마에 멋진 딸이로군요^^ 귀엽네요.

다락방 2009-08-2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가 다야 여기서 끝이야 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서도 되새겨 보곤 하니까요. 가끔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들이 Arch님을 따라 잡으려면 멀었다고 생각해요. Arch님의 그 생각들과 의식들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그동안에 찾아오지 못했고 갖고 있지도 못했던 면들이죠.

저도 오늘 이 페이퍼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는데 특히 군대에 대해서도 불끈했어요, 지금. 제 남동생은 군대를 다녀왔어요. 정말 보내기 싫었죠. 부모님도 늘 말씀하셨어요. 돈 있고 빽있고 안보낼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뭐 어떻게 손써볼 것도 없이, 손써볼 능력(?)이 없으니 그저 보내야 했지요. 이 땅에서 살기엔 정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연애를 안하니 시간이 남나요? 저는 연애를 안하니 성질만 괴팍해져요. 어휴.

Arch 2009-08-21 10:24   좋아요 0 | URL
제가 2NE1이거든요(역시 썰렁해) NE는 new evolution이라죠? 사람이 겸손해질줄도 알아야는데 말예요. 제가 다락방님의 이와 같은 댓글을 받으려고 서재질을 한다는걸 아실라나, 모르실라나^^

전 군가산점 문제 때 남자들이 참 찌질거린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어요. 그까짓거 줘버려란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일상적인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잠시 군대 갔다오는게 뭐가 어때서란 생각도 했죠. 더군다나 그들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여성적인 것을 강요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어요. 엄마처럼 넓은 품, 이런거 믿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친구랑 군대 얘기를 하면서 (축구나 후일담류가 아니라) 몰이해가 엄청났구나란 자각이 드는거예요. 내가 이해받지 못한다고 답답했던만큼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겠구나. 대체 어디서 저런 생각이 나오는지 서로의 머리를 까보고 알아낼 수 없으니까 자꾸 생각하고 읽는 것 같아요.

연애 역시 계급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해봐요. 그런 분류법에 따르면 저는 지방에 살고, 돈도 없는데 나이는 많고 말이 많아서 최하층 정도 될까? ^^ 다락방님에게 다른 재미가 생기면 좋겠어요.

다락방 2009-08-21 13:04   좋아요 0 | URL
저는 Arch님보다 나이가 '더'많으니 완전 밑바닥요. ㅎㅎ

저는 있잖아요, Arch님.
서재질 잼나요. ㅎㅎ
서재질도 잼나고 Arch님도 좋고, 뭐 그래요. 씨익 ;)

Arch 2009-08-21 13:31   좋아요 0 | URL
그 아래 배 나온 저 있어요^^

맞아! 다락방님은 서재에선 우아한 이미지이면서 괴팍하다니! 안 어울려요^^ 저도 서재에서 좀 더 재미있는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 얘기가 아닌가? 뭐 암튼. 저도 다락방님이 좋아요. 히~

머큐리 2009-08-2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의 꿈속의 D님이 다락방님이지요..ㅎㅎ (웬 뒷북?) 아 글구 저도 낼 만남을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아치님 얼굴 보면 알아보려나...하는 걱정에 사진을 30초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 (아~ 눈아퍼라)

Arch 2009-08-21 15:16   좋아요 0 | URL
사진은 최고의 각도와 온화한 빛의 조화로 보여지니까, 에~ 그러니까 봐도 소용없다는 소리예요^^ 머큐리님이랑 뽀님은 터미널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기대는 조금만 해요. 응?

다락방 2009-08-21 21:27   좋아요 0 | URL
앗. 뽀롱났어요 ㅋㅋ

순오기 2009-08-22 00:49   좋아요 0 | URL
앗~ 그럼 다락방님도 오신다는 말씀? 히~~~ 좋아라!^^

다락방 2009-08-22 14:29   좋아요 0 | URL
앗, 아녜요 순오기님. D는 제가 맞겠지만, 저는 오늘 다른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해요 ;;

여러분들 모두 재미있게 보내시고 사진도 많이 찍으셔서 다들 후기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