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다녀온 길이었다. 괜히 겁주는 의사 덕분에 맘이 싱숭생숭해져 있는데 놀이터에서 옥찌들을 데리고 노는 동생이 보였다. 병원에서 뭐라고 했냐고 묻는 동생에게 대꾸하는 대신 가만히 앉아서 저무는 해를 바라봤다. 동생이 아무말 않고 날 좀 안아줬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안아주는 대신 잠자코 내 곁에 있어줬다. 슬픔이 숨을 고르며 가라앉았다. 분노도 원망도 미련스러운 자책도 조금씩 옅어졌다. 동생은 아무말 없이 나를 위로해줬다.
한밤중에 동생이 나를 깨웠다. 지독한 술 냄새와 꺼이꺼이 우는 소리, 콧물 눈물 범벅으로 헝클어진 동생을 보면서 안쓰럽다는 생각은 멀리 사라지고 화가 났다. 화라기보다는 지겹단 생각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동생편을 든다고 상대방을 같이 욕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을 제시해줬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이런 장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 하지 못할거면서 동생만 무지막지하게 몰아쳤다. 그러다 이 아이가 진정하고 갈 기미가 안 보이자 동생을 비난했으며 뜬금없이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냐고 몰아쳤고,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이럴거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정작 해줘야할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괜찮니, 괜찮아질거야. 네 책임이 아니야.
그리고 꼬옥 안아주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어떻게하면 잘 보일까 고민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걸 해주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은 타인이니까. 타인이 날 배척하면 상처받으니까. 그런데 가족에겐 아니다. 내게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가족에게 난 너무 지독하게 굴었다. 그 중 가장 크게 데인 사람은 동생이 아닐까.
언젠가 동생은 자신이 한심하다고 했다. 자신은 가족들한테 피해만 주고 쓸모없는 존재같다고 했다. 전처럼 화가 났고, 내일 출근해야하는데 피곤하기도 했으며 또 시작인가 싶어 지겨웠다.
누구나 실수는 하고, 그 실수가 반복될 수도 있어. 그리고 누구야, 내가 너였다면 아마 난 더했을지도 몰라. 너나 되니까 이 정도로 옥찌들도 잘 키우고 네 삶에도 충실한거잖아.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한번도 그런 널 지지해주고 응원하지 못했잖아. 네 잘못이 아냐. 어떻게 모든게 네 잘못이겠니. 네가 이렇게 절실하게 느낀다면 한번에 다는 아니겠지만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위로는 아니었다. 예전에 반복적으로 따라다니던 일이 터져 답답해하고 있을 때 친구가 해준 말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고, 누구나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고. 진심으로 가득찬 한없는 지지가 그 순간 정말 고마웠다. 내가 받은만큼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어쩌면 동생이 간절하게 바라는건 그냥 괜찮다고, 다독여줄 누군가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을 뿐. 게다가,
난 한번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위로를 해준적이 없었으니까.
동생이 내게 고마움을 표하거나 느끼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다른 때와 똑같은 동생을 보면서 내가 해준 위로가 어떤식으로든 보답을 받고 싶어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다른 날보다 활기찬 것에 배신감마저 느끼는건 참. 하지만 위로 초보니까 뭐.
그래도 다행이다. 늙어서나마 위로를 받고 싶은 것만큼 위로하는 방법을 조금은 알 수 있어서. 힘내라, 어서 지금 상황을 벗어나라는 것 말고 가만히 옆에 있어주기.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에 보면 적자생존이란 살벌한 동물의 세계 뿐 아니라 아픈 동료를 생각하는 고래의 얘기도 나온다.
-고래는 비록 물 속에 살지만 엄연히 허파로 숨을 쉬는 젖먹이 동물이다. 그래서 부상을 당해 움직이이 못하면 무엇보다도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쉴 수 없게 되므로 쉽사리 목숨을 읽는다. ...... 고래들은 또 많은 경우 직접적으로 육체적인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무언가로 괴로워하는 친구 곁에 그냥 오랫동안 있기도 한다.- (최재천, 효형 출판사, 58 페이지)
그냥 가만히 오랫동안 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