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미스 다이어리_극장판 - Oldmiss Diar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선입견을 갖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제목에서 모든 내용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에서부터 누가 나오니까 (특히 연기자가 아닌 광고 주력형 연예인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100% 안 봄.)보기 싫은 것까지.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TV시리즈조차 한편도 보지 않았고, 영화로 나왔을 때는 보란듯이 콧방귀를 뀌면서 내가 볼쏘냐싶었다. 대체 브리짓존스가 한번 울궈먹고, 대개의 잡지책에서 결혼 시즌이나 해가 바뀔 즈음 선심 쓰듯이 올드 미스를 다루는 기사를 쏟아내는데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할게 있다고 다시 또 결혼하고 싶어 안달난, 연애 아니면 죽음을 달란식의 장렬한 포스를 풍기는 여자란 말인가. 게다가 나와 당신을 뺀 모두를 푼수끼는 다분하나 사랑스러운 '노처녀'로 만들어주는 대대적인 캠페인이라도 벌이는지 그들 캐릭터는 어쩜 그렇게 뻔한가 싶어 볼 마음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물론 지현우가 나오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예지원을 보고 싶은 맘은 있었지만 보는 사람 민망하게 오버하고 가닥 안 잡히는 감정을 가지고 허둥지둥대는걸 보는건 사양하고 싶었다.

 카우치의 성기노출사건과 몇몇 이야기들에 딱히 공감도 동조도 할 수 없었지만 보지 못했던 영화를 발견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정이현의 '풍선'은 꽤 괜찮았다. 특히나 정이현이 너무나도 맛깔스럽게 적어 놓은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평을 보고서야 드디어 이 영화를 접했으니, 놓쳤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씬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맘에 쏙들고 예뻐서 이걸 대체 왜 이제야 보는가 싶어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을 지경이었다. 

 보잘것없는 여자가 어찌어찌하여 사랑을 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건 드라마와 영화에서 수도 없이 울궈먹은 소재이다. 올드미스다이어리는 제목에서부터 더 이상 새로운 소재가 나올 수 없는 분야를 여과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그건 나처럼 돼먹지 못한 관객을 위한 낚시에 불과했다. 모름지기 낚시의 묘는 의외성이며 밝혀지고 난 뒤의 쌉싸름한 뒷맛이지만, 내 입맛은 떡밥을 떡하니 물었는데도 아주 달달해서 감질날 지경이었다.

 영화는 예지원의 가족을 중심으로 세가지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전개가 썩 매끄럽지만은 않다. 의도된 우연과 과장된 연기가 눈에 띄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이 썩 매끄럽지 않음에도 토닥이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 역시 마찬가지니까. 첫장면의 파니핑크에서 나온 대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화면은 얼마나 귀엽고, 지하철에서 예지원이 테러를 저지르는 장면은 얼마나 재미있고, 지현우와 예지원이 서로를 바라볼때의 표정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두 여자의 연애를 교차 편집한 화면에 해설을 덧붙이는 친구들의 입심은 얼마나 센지,  일일히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니까.

 그리고, 팬티.  

 어느 날 둘째 할머니는 빨래를 널다가 누렇게 바래고 축 늘어진 자신의 오랜 속고쟁이를 본다. 할머니는 언니와 동생에게 자신이 죽기 전에 꽃무늬 팬티를 입어보고 싶다고 한다. 우리의 화통한 영옥 언니. 그까짓거 뭐 어렵겠냐며 세 여자는 속옷 가게에 들어가 얼굴에 꽃무늬가 드리울 정도로 화려한 꽃무늬 팬티를 골라입는다. 꽃무늬 팬티로 갈아입은 세 여자, 할머니들은 엉덩이를 씰룩대면서 골목을 걷는다. 우리 영옥 언니, 한마디 해주는데 그게 바로 제목, '인생은 팬티다.'이다.  

 팬티, 패션의 완성은 속옷부터라는건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 같다. 안 보이는데 신경쓸게 뭐 있는가. 그런데 희안하게도 예쁜 속옷을 입으면 괜히 봄바람 든 사람처럼 가슴이 부풀어올라 옆사람에게라도 살짝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저, 오늘 제가 속옷을...' 물론 이런 말을 했다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겠기에 말해주지는 않는다. 팬티는 팬티대로 사타구니에 있는둥 마는둥 잊혀지기 일쑤이다.   

 나의 삶이 누렇게 바랜 속고쟁이처럼 쓸모없고 보잘것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때면 둘째 할머니처럼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꽃무늬 팬티를 사입고 싶다. 그럼 좀 나아질까, 괜찮아질까. 하지만 누구나 팬티를 걸치듯이 누구의 팬티도 특별할건 없다는걸 금세 알게 된다. 할머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갖고 싶었던건 꽃무늬 팬티가 아니라 덧없는 세월, 무엇이든지 될 것 같은 젊음, 막연하게나마 꿈꿀 수 있는 나이였다는걸 안다. 하지만 몇번 빨아서 색이 조금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어지러울 정도로 예쁜 꽃무늬 팬티를 입고 있을 것이다.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팬티처럼 사소한 일상과 삶을 축제로 만들거나 잘해보라며 관객의 등을 떠밀지 않는다. 영화는 조용한 목소리로 인생은 팬티라고, 그러니까 가끔씩 꽃무늬 팬티도 입을 수 있는거라고 말해준다. 슈트나 구두가 아니라 팬티로 인해 간과해버린 것들이 꽃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영화가 아주 좋았던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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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7-22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드미스다이어리 김석윤 PD가 만드는 시트콤을 굉장히 좋아해요- 달려라 울엄마도 재밌었고, 올드미스다이어리는 실은 저를 지현우와 누나본능이라는 팬클럽까지 가입하게 만들었던. 아 부끄럽다. 암튼 명작이에요. 영화가 재밌었담 시트콤 보면 기절하실지도 몰라요- 거기 나오는 모든 올드미스앤미스터들이 모두 사랑스러워요. 세 할머니 아빠 우현삼촌 등등까지 모두 다요. 정말 정말 정말!!!!!!!!!!

Arch 2009-07-22 00:24   좋아요 0 | URL
영화도 무척 좋았지만 말했듯이 온갖 편견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보기까지 그렇게 쉽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웬디양님의 적극 추천이니 기회가 된다면 챙겨볼게요. 지현우는 메리대구공방전과 달.나.도에서 최고였죠. 히~

프레이야 2009-07-22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에요, 아치님. ^^
저도 이 영화가 좋았던 게 그 할머니들의 난리부르스 때문이었거든요.
*영옥, *승연, *혜옥 그리고 그들보다 더 나이많은 동네 할머니.
그 할머니에게는 이들 세 할머니는 또 '부러운 청춘'이잖아요.
영옥 할매 그 입담하며, 혜옥의 그 능청스런 조신함ㅎㅎ
하여튼 그 속옷가게 장면이랑 그 후 엉덩이 살랑대며 걷는 그 장면 ㅋㅋ

Arch 2009-07-22 08:5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프레이야님. 저도 할머니들 무척 좋았어요. 욕만 하는 할머니도 아니고,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할머니도 아닌 그냥 어느날 문득 꽃무늬 팬티가 입고 싶고, 연애가 하고 싶고, 사는 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할머니들이니까. 어떤 나이대는, 어떤 사람은 이래야한다란 당위가 옅어지는 영화라 더 좋았던건지도 모르겠어요.

추천은 프레이야님거군요. 으쓱으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