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집에 들렀다가 아빠 환갑 얘기가 나왔다. 아빠께서는 맛은 별로여도 오리 요리는 좀 아니란 의사를 비친 와중에 J 의견은 어떤지 여쭸더니 대답은 안 하시고 누구 환갑을 그냥 지나쳤단 얘기만 하셨다. 어른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느끼는거지만 말의 교환이라기보다는 넋두리일 경우가 많고, 서로 동문서답인줄도 모르고 몰입하는걸 종종 보는데 J의 경우가 특히 더 그랬다. 옷매무새며 살림 솜씨며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데다 확고한 자기 믿음과 흠잡을데 없는 과거지사. J가 그럴 수 밖에 없다란 생각은 하면서도 J를 대할 때 마구잡이로 편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야기 와중에 누구누구와 J의 나이차가 10살 가량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난 J가 양육하는 손주들처럼 자꾸 조르게 되었다. 아아,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여고생처럼. 물잔에 따라준 맥주 거품이 넘칠새라 입에 갖다대며 다른때와 달리 고분고분 J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 21살 때였지. 그때 엄마가 환갑이 다 될 나이였거든. 환갑날에 사위를 보고 싶다는 엄마야 그렇다 치지만 선보러 나온 남자가 참 별로인거야. 엄마는 술, 담배 안 하니까 무조건 결혼하라고 성화고, 난 나대로 반항한다면서 고향집에 코빼기도 안 비쳤지. 공장에서 일하면서 한달에 쥐는 돈은 만원 좀 넘었을 때였어. 인조 눈썹을 가위로 솎는건데 내가 그런건 깔끔하게 잘하잖아. 그런데 개수를 못맞추니까 돈은 안 되고, 위가 안 좋아서 병원 다니느라 돈은 안 모이고. 그래도 3년 일했다고 나온 퇴직금으로 그 당시 제일 비싼 옷을 할머니한테 해드렸어. 누구누구 만났을 때? 지금에서야 누구누구도 얘기하지만 속절없이 생배를 앓았다고 하더라. 내가 위가 안 좋으니까 밥 한공기로도 하루를 먹었거든. 그러니 고봉밥을 먹는 누구가 너무 밥을 많이 먹는게 창피해선 자꾸 자기 양보다 적게 먹은거지.  

 아주 오래된 얘기인데 손에 닿을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지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 너희 아빠가 한 성격 하는데다 그런 아빠를 꼼짝 못하는게 할머니잖냐. 할머니 성격이 보통 아닌데 어떡하겠니, 오빠한테 붙잡혀서 어영부영 결혼을 했지. 그런데 결혼 후부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기는거야.  누구가 귀가 좀 얇아 어디가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오면 날 때리기 시작했던거지. 노름에 손대기 시작하니 한달에 일주일 밖에 코빼기를 안 보이고, 무슨 일만 생기면 날 패대기치니.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참. 

  하루는 등에 피가 철철 날 정도로 맞아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겠더라고. 오빠를 찾아가서 이혼하고 싶다고 통사정을 했지. 그런데 그때 동네에서 우리 형제를 4형제판이라고 해서 우애 깊기로 소문이 나있었거든. 오빠가 단칼에 말하더라고.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어떡하겠니. 꾹 참고 사는 수 밖에. 너희 오빠 태어나고 세월 지나니 매질은 좀 덜해졌는데 내가 그동안 맞은게 너무 억울해서 못살겠는거야. 그래서 너희 큰엄마 찾아가서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고 물었지. 언니가 그러더라. 소주 한병을 주면서 이거 먹으면 죽는다고. 그거 먹고 이틀만에 깨어났지. 그때부터 가끔씩 이렇게 술을 먹게 돼. 술 먹으면서 다시 매질이 시작됐고, 내가 할 수 있는건 취하는 수 밖에 없었어. 왜, 대들지 않았냐고? 말로는 다 했지. 그런데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더라고. 너희 누구누구가 등치가 크니까 상대가 안 됐지. 어느 날엔가는 문을 잠그고 때리기 시작하는데 장에서 이불을 죄다 끄집어내서 이불을 둘둘 말고 이를 악물고 버텼어. 그편이 좀 덜하니까. 엄마가 알았을 때는 정말 창피해서 목숨이 딱 끊어졌으면 좋겠다고 싶더라. 시어머니가 눈치 채고선 누구누구를 때릴 때도 있었지. 그래, 그때쯤 미친듯이 쏟아지던 매가 좀 덜했던 것 같기도 하네. 

 해드리고 싶은 말들을 꾹꾹 삼키며 툭 치면 눈물을 한가득 쏟아낼 것 같은 J를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까지 안 자는 손주들 뒷바라지에 장난처럼 아이들 보느라 폭삭 늙었다며 웃음 짓는 J. 나 역시 말할 수 없고, 영영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이야기들을 꾸욱 눌러 놓고 다시금 건배를 했다. 

 - 지금이라면 한대만 때려도 사진 찍어서 신고하지 가만 있간. 요새 들어 가끔 누구가 그래. 참고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난 하나도 안 고마운데 말야. 

 바보같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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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05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버진 형제 넷에 막내 여동생 1 해서 다섯남매예요.
우리 고모는.. 시누가 넷인 으리짜한 집안으로 시집가서 엄청난 시집살이에 명절은 고사하고 친아버지 제사때도 친정에 다니러 잘 못오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맨날 그래요..
'니네 고모가 총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데, 지금 봐라.. 넉나간 사람 같잖니.. 일년에 친정 하루를 못오게 그 구박을 하고, 종래에는 자식 다키워놓고 살만하니 그 홀시어머니가 앓아누워 똥오줌 받아내고..'
때리는 것만 폭력도 아닌듯 해요... 저희 고모는 말씀을 거의 안하세요.. 눈을 보면 텅 비어버린 사람의 그것이거든요..

참, 어젠 옆자리 동료가 자기 와이셔츠를 와이프가 다리고, 새벽 6시에 나오는 자기를 위해 더 일찍 일어나 아침상을 차리는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집에 있는 사람이니까.. 어찌나 화가 나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그러니 가정주부들이 우울증에 걸리는게 아닌가 싶어요. 음식하는거 좋아하는데, 내가 음식해주는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랑 살면 하기 싫을 거 같아요..

아 왜 횡설수설하지..

Arch 2009-06-05 23:46   좋아요 0 | URL
당연히 정돈된 말로 표현할 수 있는게 없을 것 같아요. 휘모리님 얘기도 그렇지만 난 어떨땐 차라리 여성해방을 직업을 구하는게 아니라 가사의 가치를 다르게 보는 작업으로 했다면 더 성공적이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들어요. 24시간 풀가동 서비스의 진수를 보여주는 가사 노동을 가족 구성원 중 엄마나 아내가 아닌 사람이 떠맡아서 할 수 있는 구조는 어떨까란 생각도 들고.

가사가 어찌 당연한지, 당연한걸 못해서 얼마나 구박받는 사람들이 많은지 옆자리 동료도 알까요? 아니면 지가 한번 해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까요. 왜 이런식의 얘기는 역지사지여야만 되는건지.
아, 술 먹고 댓글 달면 좀 그렇죠. 좀 그런 댓글 달고 있는 것 같아...

뷰리풀말미잘 2009-06-0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내공이 깊지 못해서 그런지 이런 얘기 들으면 혈압이 막 올라요. 아, 뒷목 땡겨.

휘모리님 댓글 읽다가 생각난건데.. 헉, 와이셔츠!!!!

Arch 2009-06-05 23:47   좋아요 0 | URL
어어, 미잘 뒷목 땡기면 안 되는데... 고개를 깊숙히 숙이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보아요.
미잘, 내공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과 예민함의 차이니까.
사실 뒷골 땡기는 미잘을 내가 참 좋아해요^^

다락방 2009-06-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더우먼이든 슈퍼맨이든 뭐든 좋으니 되고 싶어요. 아주 먼곳에서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소머즈가 되어도 좋겠구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그런데도 꾹꾹 참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구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또 타인이 갑자기 끼어들어 그자리에서 그 사람을 구해낸다고 해도, 그게 정녕 '구해지는' 걸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욱, 하는 제 성격으로는 나쁜놈들은 그냥 발로 차고 엄청나게 때려주고 싶은데요. 간혹 양 팔을 다 뽑아버려도 좋을 것 같구요. 피를 철철 흘리게 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나쁜놈들에게 "이건 다 니가 그동안 나쁜짓을 저질렀기 때문이야"하고 말해주고 싶어요.

미안해, 라는 말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요. 다들 미안해, 라고 말하기전에 얼마나 심한 짓들을 하나요. 미안해,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하는거에요. 미안해, 라는 말은 또 얼마나 무책임한가요.

Arch님 글은,
내가 아주 잘, -잘 이라는 표현은 이상한가요?- 읽고있어요.

Arch 2009-06-08 22:56   좋아요 0 | URL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읽고 계시구나.. 나만 넋두리 하는건 아닐까 생각했더랬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좀 더 성찰을 하고자 수전 손택의 책을 읽지만 자꾸 나 자신의 입장만 들이밀고 있단 생각이 더 많이 들어요. 누군가를 구해준다는 것, 내겐 참 요원한 일이에요. 견디라거나 그 상황 자체가 너라는 말이 옳은건 아닌데 섣부르게 나서는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