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군산을 다녀오면서 부쩍 커버린 듯한 옥찌를 보니까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없어도 잘 자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서운하기도 하고. 다행인 감정 쪽으로 맘이 기울긴 했지만 가끔씩 위태롭게 느껴질때도 있다. 식탁에 앉아 엄마표 인삼 딸기를 홀짝이면서 먹는데 옥찌가 다가와 언제 가냐고 물었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갈거라고 했더니 아쉽다란 말을 한다.
아쉽다란 말은 놀이를 하다가 그만 하자고 할 때 옥찌가 자주 쓰던 말이다. 누군가와 헤어진다고 아쉽다고 말하거나 떼쓰지 않던 옥찌라 그 말이 계속 맘에 걸렸다. 안정적 애착을 표하지 않는 이 아이 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이해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자격지심이 범벅된 맘 때문인 것 같다. 혹은 '아쉽다'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인지도.
우리는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면서 웃고 웃음 끝에 대롱대롱 달린 즐거움을 따먹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옥찌와 내가 찍은 사진을 동생에게 보내려고 하자, 옥찌가 직접 문구를 생각해줬다.
- 엄마, 집에 빨리 들어와. 문자 보내니까 즐거워? 사랑하고 행복해.
정말 그런 감정을 알고 말하는걸까? 하긴 이건 나한테도 물어볼 수 있는 말이겠구나. 정말 알고 쓰는거니, 아치?
동생은 사진 속 옥찌와 내가 닮았단 소리를 한다. 그럼, 옥찌 이모인걸. 옥찌에게도 엄마 얘기를 전하자, 활짝 웃는다. 그러면서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종이를 가져와 나를 그린다. 여전히 속눈썹 세개인 이모, 신발 속 발이 비치는 이모. 내가 부모님에게 불만을 갖았던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내가 옥찌에게 채워줄 수 있을까,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채워지진 않겠지만 그것마저도 못해줘서 미안했다.
아이들이 오는 시간 전에 집을 나서며 옥찌에게 메모를 남겼다. 서울에 도착해 그걸 보고 옥찌가 울었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조급하지 않게, 인생은 짧지만 여지껏 살아온만큼 길테니 심호흡 크게 하고 옥찌랑 살아야겠다. 같이 살아야할 많은 이유들과 변명들은 모두 지우고 나를 위해서 옥찌랑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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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렇게 웃게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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