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를 다듬으려고 했다. 텔레비전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야채를 다듬을 때, 마늘을 까거나 빻을 때,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손에 익은 동작을 해낼 수 있을때면 TV생각이 간절하다. 맘에 드는 프로를 하나 골라 일을 마칠때까지 보는 것. 단순하게 손만 놀리는 일에 집중해도 되련만 괜히 그 시간에 텔레비전까지 챙겨보려는 욕심은 단순노동을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는 관습적인 사고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심슨을 조금 보다 예고로 나온 현장다큐 '동행'을 봤다. 이런 이야기들. '그들의 환경은 어렵고 가정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지만, 꿈을 잃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어요'의 얘기들이 바라는 푸근한 감성이 언젠가부터 불편해졌었다. 그들이 아무리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다다를 수 있는 희망이란게 퍽이나 간소함에도 불구하고 허들 경기마냥 지치지도 않고 장애물을 마련하는 삶은 퍽퍽하기 마련이니까. 그 삶을 지켜보는 마찬가지의 퍽퍽한 눈에도 고단해보이니까. 그래서 안 볼까 하다가 예고편에 나온 예지가 너무 예뻐서 그만, 보고 말았다. 

 아빠는 부인이 집을 나간 후 1년 가까이 아이들과 생활을 하고 있다. 집세는 밀려서 보증금을 깎아먹는 중이고, 가스는 끊겨 전기장판으로 두 남매를 재울 수 밖에 없다. 신문지에 전단지를 끼우는 일과 신문배달을 하고 있지만 한번 브레이크가 걸린 살림은 좀체로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아빠는 두달치를 가불해 더 이상 말하기도 민망했지만 다시 한번 신문 보급소 사장에게 부탁을 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나 하려고 해도 자신의 형편에 맞는걸 구하기는 턱없이 어렵다.  

 그래서 예지의 아빠 용갑씨는(이름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두 아이를 보육원에 맡길 생각을 한다. 예지와 주영이에게 당분간만 떨어져있자고 하자 예지는 아빠랑 같이 살고 싶다고, 떨어지기 싫다고, 앞으로는 주영이도 잘 돌보고, 아빠 말도 잘 듣는다고 한다. 예지 때문이라면 앞으로 예지가 잘 할거라고 말한다. 예지 잘못이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건데 아직 어리광 부릴 나이의 예지는 자기가 잘 하면 헤어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은 아빠 앞에서는 함부로 엄마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건 네 잘못이 아닌데. 

 비염이 있는지 훌쩍일때마다 콧물 소리가 들리는 예지가 아빠 품에 안겨 울자, 부추를 다듬다 말고 나도 엉엉 울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아이들이 자책하는게 안쓰러웠다. 하루에 두시간 밖에 자지 못하면서 아빠가 일하는데도 예지네 형편이 나아지지 못해서 참 속 상했다. 그리고 이건, 매일밤 노동에 지친 몸을 술로 달래며 견뎌야했던, 가끔씩 투정부릴 수 없는 맘을 뭉텅뭉텅 뱉어놓는 아빠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의 내 동생, 여전히 우리 아빠, 꼬리를 감추며 피하고 있는 나까지,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생계에 대한 얘기였다. 

 며칠 뒤 아빠는 전단지 돌리는 알바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봐달란 얘기를 했고, 아이들과 같이 살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일할거란 말을 한다. 거기서 어떻게 더 열심히 일을 합니까. 사람 몸이 둘도 아닌데. 안쓰러운데도 내 맘이 자꾸 삐딱하게 기울어져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용갑씨야 내 말 따위는 귓등으로 흘리고 소처럼 일할게 뻔하지만. 

 내가 삐딱하게 예지네를 보고 있는 사이, 예지는 용돈을 모아 아빠에게 파스를 사다드린다. 용돈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군것질 하고 싶은거 참고, 사고 싶은거 꾹 참고선 모았을 용돈. 작은 손으로 앙상한 아빠 다리에 파스를 붙이는 예지를 보니 브라운관 밖에서 부추를 다듬고 있는 내 손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 아이가 아직 가지 않은 길의 면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저러다 덜컥 누가 아파버리기도 하면 어쩌나란 최악의 시나리오도 떠올랐지만, 같이 살 수 있어서 아직은, 그래, 견딜 수 있는 예지네. 이런 입장이 정말 지루하고 영양가도 없고, 문제적이란걸 너무나도 잘 안다.  

 끝맺는 말의 여러 버전을 계속 지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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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3-2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가족이 세끼밥 걱정없이 한 지붕아래 살수 있는 것, 지금 이 나라의 경제력으로 불가능한 일 절대 아닐텐데 말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3-3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력은 10위권 삶의 질은 100위권 대한민국의 현실..

Arch 2009-03-3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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