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외모다. 가슴이 굉장히 큰데다 보글보글 파마. 목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길이의 금붙이를 팔목에 주렁주렁 걸고 있는 여인. 황토방에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누구 내 얘기 들어줄 사람 없냐는 눈짓으로 두리번거리던 여인.

인생 얘기 풀세트엔 관심이 없는데다 하고 다니는 모양새로 보아하니 자랑일색일거란 생각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말끔한 총각이 꼼짝없이 걸려들었구나 싶어 안쓰러웠으나 말끔한 총각에게도 '글세 복부인스러운 분을 찜질방에서 만났지 뭐야'싶은 얘깃거리가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내버려뒀다. 물론 별다른 수도 없었지만.

일요일의 찜질방.

서프라이즈에선 신장 도난 사건 얘기가 나오면서 '네 신장도 조심하라.'란 결론을 내려줘 볼록한 내 배를 쓰다듬게 만들었다.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고 사람들을 보자, 각양각색의 커플들이 수를 놓은 듯이 찜질방 곳곳에 포진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코 앞에선 염색 커플이 드르렁 코를 곯아대며 늘어지게 '퍼'자고 있었다. 저쪽에선 여자 아이가 애인의 무릎을 베고 TV를 보다가 남자 아이의 겨드랑이털을 뽑는 시늉을 하고, 남자는 화난척 여자아이를 간지럼 태우는 눈꼴이 삐뚤어질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자애를 무릎에 눕혀놓고 얼굴을 매만지는 여자 아인 '넌 눈썹만 잘 생겼어.'란 소릴하는데 그걸 본 내가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싶어 '정말 눈썹만?'이란 생각에 남자애를 유심히 보다가 '정말, 눈썹만이네, 용한 아가씨야.'싶고. 토요일은 π데이인데(나만 그렇다고 우길셈임) 수학적이라기보다는 화이트데이스러운 달콤함이 찜질방 곳곳에서 팡팡 터지고 있었다. 아냐, 이 얘기를 하려던게 아냐, 아주 중요하고 매끄럽고, 살랑거리긴 하지만 이 얘기는 아냐.

눈꼴시려워 피한건 아니고, 찜질을 해야한단 강력한 당위가 떠오른 난, 다시 황토방에 들어갔다. 아줌마의 얘기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총각 -아 총각이란 말은 어찌나 총각김치처럼 침이 고이는 단어인지.- 은 고개를 푹 수그린채 묵묵히 웃으며 아예, 아예, 예예 구절을 3/4박자로 반복하고 있었다.

얼추 엿들은바로는 딸아이가 서른이 다 돼가는데, 서른이라 하지만 실은 1월생이라 엄밀히 말하면 29, 뭘로 하면 28. 아무튼 밑지는 인물이 아니라 소리였다. 그래서 든 생각은 딸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데려왔나보다 정도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총각은 여인의 말에 상냥하게 답하려 애썼고, 서슴없이 물어대는 질문에도 또박또박 잘 얘기했다. 참한 총각이로군. 여인도 그 총각이 맘에 들어 자꾸 얘기를 하는걸까? 여차하면 '나는 안 되겠니'란 뉘앙스를 물씬 풍기려 애만 쓰며 드러누운 자세로, 그것도 어필이랍시고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딸이 애인이 없는데 결혼할 나이라 물색 중이란, 비교적 별거 아닌 고민(심심하셨군)과 기름값으로 한달에 50만원을 준다란(딸이 무슨 화물차 운전해?) 것과 남편이 무슨 공단의 알아주는 사람이며 자기도 어쩌고 저쩌고. 그러니까 아주 대단한 우리 집에 걸맞는 딸의 결혼 상대가 없어 속상하단 말씀. 여인의 이야기가 도돌이표로 시작되려는 것을 더 이상 못견디겠는지 참한 총각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내게 눈길 한번 줄만도 하지만, 참한 총각은 참하기만한지라 감히 눈길 찍고 한바퀴 돌 여유가 없었나보다. 실은 '관심 밖, 즐'이겠지만. 여튼 총각 대타로 여인의 말을 듣다, 목구멍에서 자꾸 자식이 물건이냐, 그렇게 잘 나가는데 호텔 사우나가지 왜 여기 왔느냐, 그 팔찌 목걸이 아니냐, 딸도 당신이 지금 이러고 있는거 아냐 등등이 튀어나오려고 간질거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우아하게 생겼어도(서재 각인 효과용 믿지마 발언임) 아치인지라 번번히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고비를 넘겼다.

참한 총각도 괜찮지 않냐니깐 어림도 없단 소리를 하며, 자기 딸의 엘레트 코스를 얘기하는데, 발음이 부정확했는지, 언어사용이 부정확했는지 내게는 그저 알라까나또깔라니 별의 방언처럼 들렸다.

만약 이 여인이 우리 엄마라면 어떨까.

그랬다면 난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들어가던가, 금고에서 현금과 장물애비에게 넘길만한 물품 위주로 돈을 훔쳐 집을 뜰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그늘에서 기생하는 삶의 손바닥만한 안정을 손금처럼 즐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의 사정이 직장인 월급명세서처럼 뻔한 나와 부모 사이에선 될법하지 않는 경제적 의존관계가 일상이 되는 일이라...... 능력없는 자식이나 자식 못지 않은 부모나 서로에게 한톨만한 '능력'이 생기길 아직까지 꿈구는 미련이나, 실은 미련 자체가 이뤄지지 않을거란 전제로 가능하단 뻔한 소리나 도찐 개찐 막상막하일 것이다. 한때는 손바닥만한 지원사격 없는 부모를 장시간 원망하기도 했고, 체념하기도 했고, 위악을 부려대며 그들 맘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물론 부모님도 한 성격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는 없지만, 내 부모들도 나처럼, 나보다 더 퍽퍽한 20대를 보냈을거란걸 알아가면서 위안을 받는다. 그들의 최선이 성공이 아닌게 유감스럽다기보다는 그들이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버리고, 잊어야했던 꿈들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효사상 아치로 재탄생하는건 아니겠지만, 부모님의 또렷하고 일관된 좋은 결혼이란 입장과 나를 염려하는 것의 편협함에서 좀 더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여인이 부러운건 맞다. 사실, 여인보다는 존재 자체가 희미한 여인의 딸이 부럽기도 하다. 오피스텔에 산다는 것도, 화물차인지, 택시인진 모르겠으나 매달 용돈을 받는, 다 큰 관계에서 이뤄지는 지원도 부럽다. 하지만 여인과 딸은 아마 평생을 살아도 찜질방 바닥에 들러붙어 질문하던 아치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며, 들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건 부럽다는 것보다 더한 결핍일거라고, 그렇게라도 자위하자며 내 맘대로 결론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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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3-17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말하면 아무데서나 나한테 찍어붙일 녀석을 찾는 엄마때문에 휘모리는 요즘 미치기 30초전이라는 겁니다 쩝쩝

Forgettable. 2009-03-17 09:47   좋아요 0 | URL
그런 점에서는 애봐주기 싫다고 결혼하지 말란 엄마가 더 나은 것 같아요 ㅋㅋ

그런데 도찌니개찌니 이말은 어디말인가요? 이거 엄마한테 듣고 무지 웃었었는데, 여기서 또 듣네요 ㅋㅋ

Arch 2009-03-17 10:29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럼 아무렇게나 만나서 엄마가 모르는 휘모리님의 진면모를 보여주세요. 엄마에게 휘모리님 환상이 있는거 아닐까요? 저도 일생에 딱 한번인 선을 본 이후로 다시는 엉뚱한 녀석들 안 갖다 붙이던데요. 물론 어떤 질문을 하느냐, 그 데미지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휘모리님 안에 있겠지만.

forgettable님, 훌륭한 어머니세요. 도찐개찐, 이렇게 쓰는 말인데 저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기억이... 비슷비슷하다란 뜻이에요. 네이모 창에 검색해보면 나오지 않을까란 생각.

2009-03-18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9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0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1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