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새언니가 친척 오빠가 술만 먹고 오면 아이들을 불러서 잔소리를 한다는 얘기를 한적이 있다. 이해는 하지만 애들이 콧방귀도 안 뀌는데 그러는걸 보면 답답하단 말도 전했다. 답답하겠지, 그리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짜증나겠지. 어떻게 잘 아냐고? 그건 곧 오빠가 판박이처럼 닮은 우리 아빠 얘기니까.

 아빠도 우리들이 어렸을 때 술 드시고 늦게 들어오실 때면 딸들을 다 불러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둥의 잔소리를 하셨다. 아빠는 잔소리뿐 아니라 가끔 물기도(물어봤다는게 아니라 정말 앙하고 문거다)하고, 괜히 동생들을 괴롭혀 둘 중 하나가 울 때까지 애를 타게했다.

 난 어렸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런게 모두 지금, 내게 관심을 좀 갖어주란 아빠의 주문이란걸. 그렇다고 애교를 떨면서 용돈을 갈취할만한 깜냥이 못되는 난, 대뜸 짜증만 내고 방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아빤 내 싸가지를 당사자가 아닌 엄마에게 호출했고 결국, 두 분의 투닥거리로 한밤의 소요는 끝을 맺었다.

 지금의 나는 아빠의 위악이 관심을 갖아주란 단순 주문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살아온 아빠가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걸 쥐어짜낸 안간힘이란 것도 조금씩 헤아릴만한 나이가 됐다. 하지만 그때는 몇 년째 계속되는 사춘기처럼 불만투성이었다. TV에서 퇴근할 때면 선물을 한아름 사오는 아빠는 주제를 아는지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불현듯 화내시거나 술을 먹고 우릴 괴롭히지만 않았으면 했다. 아빠가 일으키는 집안의 분란이 난 맘에 들지 않았다. 아빠의 그런 균열은 늘 마이너스였고,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었으니까. 가정의 모범으로서의 아빠상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별다른 일만 만들어내지 않길, 근심걱정수심이 할인은커녕 포장만 요란한 3종 세트로 가득 찬 엄마의 얼굴을 볼 때면 난 항상 그렇게 기도해왔다.

 소설을 한창 읽기 시작할 때. 멍과 관련된 내용의 글을 접한 적이 있다. 어떤 여자가 소설가인 극중 화자에게 원고를 보낸 형식의 소설이었다. 여자는 매일 밤이면 술에 취해 온몸에 멍을 달고 오는 남편 얘기를 한다. 소설가는 시큰둥하게 그녀의 글을 읽다가 그만 아차 싶어지고 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였다면 남편의 멍이 지겨워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거나 그를 윽박질렀을 것이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내 삶에 균열을 내기만 해보라고 으르렁거리며 며칠 굶은 개처럼 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그 멍이 너무 안쓰러워, 혹은 너무 아름다워 자는 남편의 잔등을 쓸어올리며 멍을 어루만진다고 했다. 어루만지는 여자를 생각하니 한없이 내가 무능하고 아량없는 인물로 느껴졌다. 혹은 굳이 정치적으로 해석해 균열마저 감싸앉는게 왜 '그녀'의 미덕에 해당되는지, 그녀의 정신 상태를 체크해보고 싶거나 작가의 의도를 파헤치고 싶기도 했다.

 라디오스타에서 김구라는 가족 중에 한번씩 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야 긴장도 되고, 목표가 생기니 화합도 좋아진단 소릴 한적이 있다. 내 주위엔 굳이 그런 의도가 아니어도 충분히 가족들을 힘겹게 하는 사람들 천지인데, 화합은커녕 불화와 고통스러움만 남기곤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멍을 쓰다듬을 수 없는 속좁은 인간들인걸까?

 부부관계에서 멍이 들어오는건 주로 남자. 여자들은 감히 멍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이해를 바라지도 못한다. 그들의 멍은 그 순간 가족의 수치로 기억돼 걷잡을 수 없이 그녀를 압박한다. 멍이 사라지고 나서도 꾸준히 멍을 기억할 것을 요구받는다. 지금까지 아빠가 흔적멍을 주장하는데도 엄만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본능적으로 습득한 엄마의 감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멍은 멍 자체가 아니라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 나, 사회적인 잣대까지를 아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균열

 모든 사람이 모범적일 수는 없다. 모범이라는 것은 모범 택시가 아닌바에야 정해진 요금조차 알 수가 없다. 내 경우에는 그 최대한으로 잡은 경계가 '남에게 피해 안 줄 정도'이다. 그런데 그걸 당장 확인할 수 있을까? 안전벨트 문제를 예로 들자면 '안전벨트를 안 차고 사고가 났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게 아니다. 도리어 안 매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걸 규제하나?' 사회가 한 사람의 인력을 잃게 됐을 때의 손해 때문이란 이유를 들긴 하지만 난 여전히 궁금하다. 마찬가지로 모범적이지까지는 아니지만 '가족끼리라도 피해는 그만 주는 관계'이기를 바랐던건 좀 얌체같은 생각일까? 피해의 범위망도 누구말대로라면 정말 엄살일 뿐인데도? 정말 가족은 누군가 안 보고 싶을 때 버리고 싶은 존재들일까? 그런 가족과 왜 굳이 이렇게 북치고 장구치며 지내야하는걸까? 설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 운운의 이젠 희망사항이 파시즘 정도가 되어버린 도덕교과서 같은 소리를 하려는건 아니겠지?

 눈만 부딪히면 싸우기 시작해서 결국은 몇 달씩 말을 안 하고, 서로 고집은 세서 한치의 양보도 안 하던 나와 막내 동생. 얼마 전 막내가 생일이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날 우린 평소의 패턴답지 않게 약간은 낯 뜨거운 칭찬을 했고 안부 인사를 건넸다. 멀리 떨어져 있고, 그간 '피해'라고 일컬을만한 소소한 일들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 집을 떠나있어 기존의 패턴대로 가자니 뭔가 껄끄러워 좀 더 세련된 흉내를 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막내와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는걸까? 경제력은 있지만 성적매력은 급격히 감소되고 있어서 수순처럼 뒤바뀐 엄마 아빠의 권력관계처럼?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는 없지만 이제야 조금씩 엄마의 멍을 바라볼 용기가 생기고 있다. 용기라고 말하기에도 어줍잖은 곳까지 참 많은 길을 돌아서 왔지만.

 걸핏하면 이혼하라고 악다구니를 쳐대던 딸은 엄마가 멍을 꼭꼭 숨겨가며 빌어먹을 가정이란걸 지켜줘서 비로소 감사해하고 있다. 가족주의 포에버가 아니라 만약 그때 엄마가 너무도 어려운 결정 사이에서 우릴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면 난 이 정도로도 크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는식의 말은 아니다. 아, 이 말들 속에 속속들이 담긴 정치적이고 편견에 쌓인 내용들이란.

 나는 엄마가 복수까지는 아니어도 이제는 가부장의 짐을 내려놓고 사시는 울 아빠에게 가끔씩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맛도 알아가길, 그간 쌓여온 멍의 흔적을 아빠에게도 들이밀면서 '여보, 영감. 기억나?' 하며 짖궂게 굴어보기를 바란다. 그건 엄마가 젊었을 때 아무 도움이 못된 딸이 차마 못해드렸던 엄마 스스로의 치유일거란 생각이 드니까. 만약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엄마는 대뜸

-치유고 뭐고간에 옥찌들이랑 싸우지나 말지?

이러시겠지만.

 여전히 이렇게 나 좋을대로 엄마를 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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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1-20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왜 저렇게 밖에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는지... 그럼으로써 자식들에게 왜 끊임없이 아버지를 부정하고 싶게만 만들었는지.... (제 얘깁니다.) 지금도 전 아버지와 소통하지 못해요. 아버지와의 대화 시도는 항상 아버지의 일방적인 훈계로 이어지고 저는 결국 입을 다물며 내 다시는 말을 하나 하는 앙다뭄으로 끝나버리니...ㅠ.ㅠ

무해한모리군 2009-01-20 08:40   좋아요 0 | URL
가끔 친구들과 얘기하다보면 아빠에게 상처받지 않은 자식이 10에 하나도 안되서 깜짝 놀라곤 합니다. (전 그 하나입니다. 아주 어렸을때 돌아가셔서..) 우리 아버지들은 총알같은 속도로 변하는 자식세대를 따라잡지 못한 꽤나 불행한 낀세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Arch 2009-01-20 10:38   좋아요 0 | URL
다행인건 저희 아빠는 제 싸가지 덕분에 조금 일찍 짐을 내려놓으셔서 이제는 전보다 한결 대하기가 쉬워졌어요. 휘모리님, 저희 아빠의 단골 주제도 바로 '낀세대'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