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만남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도 가봐야 하는데, 반디 앤 루니스에 계세요.

 잠시 후, 아프님으로 추정되는 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서성이고 있는게 보였다. 전화를 했지만 제발, 저분이 받지 않기를 바랬다. 무슨 소개팅 모드도 아니고. 아, 다행히 저분이 아닐까로 추정되는 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 통화로 모두들 11번 출구에 모여있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어색하게 썬글라스를 끼고 있는 아프님과 푸하님이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승주나무님이 반갑게 웃으시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승주나무님 머리가 너무 업스타일이신데.

 조금 늦은 사람들에게 장소를 알려주기로 하고 민들레 영토로 자리를 옮겼다. 지하철이 밀려서 늦으신 멜기님과 씩씩한 렌초님이 오셨다. 기억나는 몇가지. BT논쟁의 비유와 푼수대가리란 신조어. 분위기를 못타는 내게 쏟아지는 질문들. 질문에 답하고 있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승주나무님과 로렌초님의 말과 말로 혼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각자 읽고 있는 책들을 얘기하기도 하고, 다시 내 성분 질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승주나무님의 살신성인 정신으로 분위기는 무르익어가고 '웬만하면 승주나무탓'이란 패러디까지 툭툭 튀어나왔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건 멜기님이 '자기가 멋있다고 그러면 뭐하냐'는 나르시즘적인 발언에 종지부를 찍는 말이었는데 명쾌한 여운 끝에 쓸쓸함이 묻어나는건, 나, 지금, 멜기님을 조금 알아버려서가 아닐까란 생각. 옆에 앉으신 승주나무님의 열정에 찬 책 추천을 듣다가도 멜기님이 기회만 되면 '그럼 5위부터'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푸하님의 나 못지않은 뜬금없음과 로렌초님의 방대한 지식, 아프님의 의외의 모습(난 이분이 말이 별로 없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서재 이미지가 어땠길래!)을 보자니 먼길이었지만 참 잘왔단 생각이 들었다.

 많은 얘기들이 오간 가운데 아이의 자율성과 규율하는 방법에 대한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편에선 아이의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하고, 어른은 큰 아웃라인만 잡아줘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반면 그 입장에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면서 과연 이상주의란게 현실 안에선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하는건지, 현실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이상이란건 이상 자체로 의미가 있는건지, 현실과 발맞춰가야하는지에까지 논의가 진행됐다. 이건 차후에 더 얘기할거리가 많을 것 같다. 게다가 너무도 당연하게 '청소년은 담배를 못피우게 강제해야한다'는 생각에도 많은 논란거리가 있다는 문제제기를 접하면서 머릴 띵하게 만들었다. 물론 건강에 나쁘니까 담배를 피지 않도록 권할 수는 있지만 법적으로 19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흡연을 금한다는게 과연 내가 19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흡연하지 않도록 강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자율성을 허용하는 범위라는게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첫 자리의 분위기가 사그러질 즈음 우린 거리로 나왔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하는 분들에게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제 2장 이동 및 부딪힘
 

 근처로 이동해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본격적인 음주를 시작할줄 알았는데 아프님이 정말 잘 아는데가 있다며 대학로까지 걷자고 했다.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라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지만 종로에서 대학로까지의 거리가 가늠이 안 됐다. 가보고나서야 걸을만하다는걸 알았지만 처음엔 걷다가 날 저무는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겁을 냈다. 촌스러운건 어디가나 마찬가지.

 주말, 종로의 보도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쉬이 피로해지는 다리 때문에 빠르게 걷다가 사람들에 부딪히자 남자분들이 통상적인 배려차원에서 날 안쪽으로 걷도록 해줬다. 그 전에 가방까지 선뜻 들어주신터라 황망한 기분이었는데 이런 배려를 해주자 괜히 아까 말한 자율성 얘기가 하고 싶어서 목구멍이 간질간질. 이것도 받아봐야 맛이란 말이지.

 바람은 선선했고, 종로를 지나자 사람들도 별로 눈에 안 띄자 정말 걷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서로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묵묵히 걷기만 하는 것도 때론 많은 말들의 공간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도 느꼈다. 막연히 몇 번 노선의 대학로가 아니라 종로와 이어진 대학로라고 하니 머릿속에 지도가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멜기님의 너무 멀단 말에 굳이 100m를 강조하며 모든건 100m로 통한다는걸 보여주는 아프님의 캐릭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가만보면 길을 잘 모르는 것도 같다. 아프님의 말인즉, 랜드마크가 있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하는데 다행히 푸하님이 소싯적 기억을 되살려 어찌됐든 도착하긴 했다.

 다시 민들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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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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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10-23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푸하님이 시니에님 재밌다고, 완전 좋아하시던데요 ^_^

Arch 2008-10-23 00:22   좋아요 0 | URL
그래요? 웃겨드린적이 없는데... 푸하님은 당황하시면 재미있어 하시나? 혹시 숨겨진 BT?

2008-10-23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3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3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10-23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이리 다들 비밀스러우실까...

Arch 2008-10-23 22:3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저야 볼 수 있다지만 다른분들은 좀 답답하겠다 싶죠.

마노아 2008-10-2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로 민토에서 대학로 민토까지 걸어간 거예요? 다리 아팠겠다.^^

Arch 2008-10-23 22:31   좋아요 0 | URL
아니요. 다른 민들레였어요^^ 전 다리 안 아팠는데 비밀스럽다고 의문 기호를 떠올리신 분이 좀 그러셨죠^^

마늘빵 2008-10-23 23:54   좋아요 0 | URL
다시 한번 투어해도 저는 환영. 이번엔 저 혼자서 찾아갈 수 있어요. (정말?)

Arch 2008-10-24 10:21   좋아요 0 | URL
아프님 과연 정말? 입니다. 아프님은 긍정적인게 참 좋은데... 참 좋다구요^^ 저는 아프님 혼자서 찾아갈 수 있다는데 돈 안 겁니다. ㅡ,.ㅜ

순오기 2008-10-2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남녀들끼리 뭉친거예요? 좋다~ 부럽다!!^^

Arch 2008-10-24 21:59   좋아요 0 | URL
헤~ 순오기님의 왕성한 활동을 보면 가장 청춘 같은데요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