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어보니 열흘이다. 집에 있으면서 안 움직이기 어려워, 물리적인 공간을 이동했었다. 내심, 외롭게 외롭게 굶고 또 굶으면서 책만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외로웠다. 한 밤중에 나타난 귀뚜라미가 반가웠으니. 무서웠다. 바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같아서. 처음엔 하루에 한 끼 먹었다. 라면 한 개. 어느 순간, 안 먹던 아침까지 햇반을 보이차에 말아서 부추김치랑 아구아구 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잘하면 하루 네 끼 먹었을 판. 다행히 그 지경까지 가기 전에 돌아왔다. 책 읽기도 그러해서 처음엔 아주 선전했다.
가자마자 1박 2일만에 진격의 두 권을 읽었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아...이렇게 읽으면 일주일 동안 최소 열 권은 읽고 가겠구나.....왠 걸..그 이후로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염없이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숙소 앞 산책에 1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목욕탕도 매일 갔다. 물리치료실 대신이니까 매일 가야 해. 물리치료 대신이니까 이정도는 오래 있어야 해..속으로 나를 계속 격려했다. 온탕 안에 앉아서 그래그래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람소리 땜에 못 잤으니 자야 해 자야 해 하면서 안오는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한 밤의 아이들>을 읽으려고 늘 벼루었다. 떡하니 책장에 꽂힌 두 권..늘 읽어야 할 책들이 있으므로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를 읽으니 너무 재미있었다. 뭔가 작가의 삶과 소설의 삶이 교차되면서 느낌이 배가되었다. <한 밤의 아이들>을 읽을 요량으로 <조지프 앤턴>을 먼저 읽기 시작했었는데, 결국 아직도 <한 밤의 아이들>을 못 읽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눈 앞에 <이스트 웨스트>가 보여 꺼내 들었다. 일단 가벼웠다.
1박2일 진격의 두 권 <하얀 성>과 <복종>이후로 아마 오르한 파묵과 미셀 우엘벡 책이 더 있었으면 더 읽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단 거기서 멈추고..<이스트 웨스트>를 들었는데 안 읽히는 거다. 하는 일은 없고 시간은 있으니 북플을 붙들고 살았는데, 심지어 다른 님들이 써 놓은 글도 읽기 싫은 거다. 그래서 결국 베끼기 시작했다. 보통 나는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시작이 안되면 일단 베끼고 본다. 그러면 어느 사이 몰입이 되고 그 다음부터 읽힌다.
좋은 충고는 루비보다 드물다
그 달의 마지막 화요일, 새벽 버스가 여전히 전조등을 빛내며 레하나 양을 영국영사관 정문 앞에 실어다놓았다. 버스가 도착하면서 먼지구름을 일으켰고, 레하나 양이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녀의 아름다움은 타인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버스에는 다채로운 아라베스크 문양이 화사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앞쪽에는 녹색과 금색 글자로 ‘비켜요 자기’ 라고 적혀 있었고, 뒤쪽에는 ‘타타-바타’ 그리고 ‘그래 멋진 인생’이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레하나 양이 운전기사에게 버스가 참 멋지다고 말하자, 기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문을 잡아주더니 그녀가 내리는 동안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레하나 양의 문은 안티모니의 도움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크고 검고 맑았는데, 조언 전문가 무함마드 알리는 그 눈을 보자 다시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동틀 무렵에 그녀가 영사관 정문으로 다가가서 수염 기른 라라에게 문이 언제 열리느냐고 묻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문을 지키는 랄라는 금단추가 달린 카키색 제복에 꽃모양 모표로 장식한 터번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화요일에 영사관을 찾는 여자들에게 대개는 몹시 무례하게 굴었지만 레하나 양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호의적으로 답했다.
“삼십 분, 어쩌면 두 시간 뒤에, 낸들 알겠소? 사히브들은 지금 아침식사중이오.”
랄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버스 정류장과 영사관 건물 사이 먼지 자욱한 구내에는 이미 화요일의 여자들이 가득했는데, 그중 몇은 베일을 썼고 몇은 레하나 양처럼 맨얼굴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겁을 먹은 듯 삼촌이나 오빠의 팔에 바짝 기댔고, 남자 동행들은 당당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레하나양은 혼자 왔으며, 조금도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무함마드 알리는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드는 탄원자들 중에서 가장 물렁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조언을 해주며 먹고 살았는데, 뜻밖에도 오늘은 그이 발걸음이 이 묘하고 자립적인 방울눈 아가씨에게로 향했다.
“처자, 런던 입국허가를 받으러 오셨소?” 무함마드 알 리가 말문을 열었다.
레하나 양이 구내 언저리와 맞닿은 작은 판자촌 노점 앞에서 칠리 파코라를 만족스레 아삭아삭 씹어 먹다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무함마드 알리는 가까이에서 그 눈을 보자 속이 이상했다.
“네, 맞아요.”
“그렇다면 내가 조언을 좀 해드려도 되겠소? 푼돈만 받고.”
“좋은 충고는 루비보다 드물죠. 하지만 아아, 저는 값을 치를 능력이 없어요. 저는 고아거든요. 부유한 숙녀 고객이 아니랍니다.”
레하나 양이 웃으며 말했다.
“내 백발을 믿어봐요. 내 조언은 경험으로 담금질이 되어 있다오, 내 조인이 쓸 만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 거요.”무함마드 알 리가 설득하려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말 가난뱅이예요. 여기엔 급료를 많이 받는 바깥식구와 함께 온 여자들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가보세요. 좋은 충고라면 좋은 대가를 받아야죠.”
미치겠군. 무함마드 알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가 제멋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자, 나는 운명의 여신에게 끌려 왔다오. 어쩌겠소? 우리의 만남이 이미 정해져 있었는걸. 나 역시 가난한 사람일 뿐이지만, 처자를 위해 공짜로 조언을 해드리리다.”
그녀가 또다시 웃었다. “그렇다면 꼭 들어야겠군요. 운명의 여신이 보낸 선물이라면 그건 분명 행운일 테니까요.”
무함마드 알리는 레하나 양을 이끌고서 판자촌 모퉁이 지정석에 있는 앉은뱅이책상으로 향했다. 그녀는 뒤따라가며 자그마한 신분지 봉투에서 연신 파코라를 꺼내 먹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 한 개도 권하지 않았다.
무함마드 알 리가 흙바닥에 방석을 놓으며 말했다. “알아요,”레하나 양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책상 맞은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이삼십 명의 사내들이 부러운 듯 그를 주시했고, 판자촌의 모든 남자들이 백발의 늙은 사기꾼에게 갓 사로잡힌 젊은 미녀를 향해 추파를 던졌다. 무함마드 알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저기, 이름이?”
“레하나예요. 런던 브래드퍼드에 사는 무스타파 다르의 약혼녀죠.” 그녀가 말했다.
“영국 브래드퍼드.”그가 친절하게 정정해주었다.“런던은 물탄이나 바하왈푸르처럼 그냥 도시오. 영국은 엄청난 나라인데, 세상에서 가장 도도한 인간들로 가득하다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그녀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그는 어쩐지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신청서는 작성했소? 그렇다면 좀 보여주시오.”
레하나 양은 깔끔하게 접힌 서류가 들어 있는 갈색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괜찮은가요?”그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염려의 기색이 묻어났다.
그가 책상에 놓여 있는 레하나 양의 손 근처를 톡톡 두드렸다.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한데, 확인해볼테니 기다려요.”
그가 신청서를 훑어보는 동안 그녀는 파코라를 다 먹어치웠다.
“최고요 모든게 다 제대로구려.” 한참 만에 그가 단언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이제 정문 쪽으로 가서 기다려야겠어요.” 그녀가 일어서려고 하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무함마드 알 리가 큰 소리로 외치며 제 이마를 쳤다. “이 일이 만만해 보이시오? 신청서를 제출하기만 하면, 짠, 그자들이 벙긋 웃으며 허가증을 넘겨줄 것 같소? 레하나양 정말이지 당신은 경찰서보다 더 지독한 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요.”
“그런가요,진짜?”그의 과장된 언사가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 레하나양은 꼼짝없이 붙들린 청중이었고, 그는 조금 더 그녀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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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편의 단편집이다. 이스트, 웨스트, 이스트 웨스트 라는 소제목에 각 3편씩을 담았다.
정직한 소제목이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믹스"
빨강, 파랑, 그 사이에 보라. 작가는 그 세계를 넘나들었다.
공간을 이동하고 생각을 교차하고,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작은 것들의 신>처럼 도도히 흐르는 그러나 순간적인 고요함이 깊은 느낌의 장편도 좋지만, 이런 감각적인 단편집도 참 좋구나!
